세상 사람들을 어디 충분히 넓은 공터에 다 모아놓고 운명을 믿는 분은 손 한 번 들어보라고 해보고 싶다. 나부터 시작해보자면, 나는 운명을 믿지 않는다. 아주 기가 막힌 우연이 있을 수 있고, 또 그런 우연이 기가 막히게 몇 번 연달아 일어날 수도 있다고는 생각한다. 심지어는 내가 아무리 발버둥치고 노력해도 어쩔 수 없는, 내가 정체를 파악하기 어려운 어떤 커다란 흐름이 있다고도 믿는다. 하지만 그것의 정체가 운명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내가 말하는 '커다란 흐름'이라는 건 운명이라기보다는 내가 내 주변에 놔둔, 나에게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나 물건, 사건들의 집합이다.
내가 성인이 되고 난 다음 찾은, 가장 깊은 애착의 대상을 꼽자면 단연 지금 나의 예비신랑이다. 내가 이 사람을 만나고 평생 결혼 생각 없다던 말을 손바닥 뒤집듯 뒤집어 결혼까지 결심하는 걸 보면서 친구가 말했다.
'운명인가보다.'
그 말을 듣는 순간에 나는 부정할 말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해서 고개를 끄덕이고 커피만 한 모금 더 들이켰다. 하지만 내가 이 사람을 만난 건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한 나의 선택이다. 운명따위가 아니라. 일단 스스로 준비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내가 건강한 애착을 형성하고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지 아직 불안했지만, 스스로 도닥이고 달래가며 흔들리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했다.
물론 내가 의도치 않았던 순풍도 내 등을 살짝 떠밀어주긴 했다. 솔직한 마음을 알아내려면 직접 물어보는 것이 가장 건강한 방법일텐데 그걸 직접 묻기는 죽을만큼 민망한 회피형인 내게 예비신랑은 시종일관 묻지 않아도 마음을 표현했다. 그건 내가 아닌 그의 노력이다. 그도 꽤나 강한 거부회피형이기 때문에 그의 노력에 나는 많은 영감을 받았다. 자신을 표현하면서 진심으로 행복해보이는 그의 표정을 보니 나도 그렇게 하고 싶어졌다. 거기서부터 다시 나의 노력이 시작되었다.
그래서 그를 만나고 결혼을 하게 된 건 절대 운명이 아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운도, 누군가의 명도 아니고 우리끼리 애쓴 결과물이다. 정말이지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