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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찹쌀이 Oct 24. 2023

13. 불편한 적응

암환자 가족이 되었습니다.

* 아빠는 2023년 5월 '변연부 B세포 림프종 / MALT Lymphoma'(혈액암/림프종/임파선암) 진단을 받으셨습니다.

* PC에서 작성되었습니다.



2차 항암치료부터는 간단해졌다. 첫 항암 때 부작용이 생겼던 큰 링겔 약은 엄청 (정말 엄청) 조그맣게 변했다. 복부에 피하 주사로 맞게 되는데, 7분 내외로 다 맞게 된다. 당연히 부작용도 없다. (아빠는 1차 때 부작용이 났었어서 그랬는지 2차부터는 쭉 항알레르기 주사를 맞긴 했다.) 신기했다. 똑같은 성분의 약인데 두 번째라고 이렇게 간단해지다니.


그래서 총 1시간 반에서 2시간 정도면 항암 주사는 끝났다. 항암 하러 가는 날의 루틴이 정해졌다. 지난 글에 썼듯이 진료 2시간 전까지 채혈 완료, 채혈 4시간 전부터는 금식. 1시 반 진료를 위해 아침 7시에 아침을 먹고, 경복궁역 앞에서 11시 10분 셔틀버스를 타고, 병원에 도착하면 수납하고, 채혈하고, 엑스레이 찍고 (대기 상황에 따라 엑스레이를 먼저 찍는 날도 있었지만), 점심을 먹고, 대기하다가 진료를 보았다.


그다음이 가장 힘든 시간이었다. 항암 주사를 맞으려면 침상을 확보해야 했는데 최소 2시간은 기본이었고 4시간 가까이 걸린 날도 있었다. 한 번은 진료 전에 침상 먼저 대기하면 좀 빠르려나 싶어 꼼수를 쓰려고 했었는데, 약 처방이 먼저 나와야 했고 차갑게 보관되던 약이 몸에 들어가기까지 대기가 필요했기 때문에 불가능했다. 그래서 결국 진료 이후 하염없이 대기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진료 후 침상 대기를 걸어두고 을 사러 신촌역 부근으로 산책 겸 외출했다가, 카페에 가서 빵으로 간식을 먹으며 나는 카페인 수혈을 하고, 침상이 배정되었다는 연락이 오면 다시 가서 주사를 맞고, 엄마가 시간 맞춰 차를 가지고 마중 오시면 같이 집에 돌아가서 저녁을 먹고, 병원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하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3번째 항암 주사가 끝나고 아빠는 손끝이 저린다고 말씀하였다. 벌거 아니라고 덧붙이셨지만 거듭 언급하시는 걸로 보아선 꽤나 신경이 쓰이시는 모양이었다. 어쩌면 그게 첫 자각 증상인 것 같다.


아빠는 암 증상도 전혀 없었다. 항암 주사 부작용도 첫 주사를 맞던 그때 외에는 없었다. 항암 교육 때 식욕이 떨어지고 체중이 줄어들거라 했지만 (실제로 인터넷에서 본 다른 사연들도 그러했지만), 오히려 아빠는 체중이 더 늘어나셨다...ㅎㅎ 식욕이 그대로라 다행이었다. 항상 아침, 점심, 저녁 세끼를 드시고 주무시기 전 간식까지 드셨다. 대신 음식의 이 조금 달고 짜게 세 진 것 같긴 하다. 하지만 그건 연세가 드셔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뭐든 간에 잘 드시니 다행이었다.


그래서인지 아빠는 항암 치료 중에 평소대로 생활하실 수 있었다. 8시 반에 아침을 먹고, 점심은 엄마가 싸드린 샌드위치나 순댓국 같은 걸 드시고, 6시에 저녁을 먹고, 9시에 간식을 드시고, 10시 반에 주무셨다. 퇴직 후 시작된 매주 2박 3일 귀농 생활도 유지하셨다. 해외 출장도 무사히 소화하셨다. 항암을 시작하고 짧게는 2박 3일, 길게는 5박 6일로 네 번이나 해외에 다녀오셨다.


집을 떠나시기 전엔 아빠에겐 가지 말라 말도 못 하고 엄마와 함께 마음 졸이긴 했지만, 그래도 아빠는 그렇게 을 얻으시는 분이니까... 퇴직 하시고도 70이 되셨지만, 여전히 일을 즐거워하시니까. 그런 아빠의 모습이 나도 좋으니까.





거의 매일 집에서 함께 저녁을 먹고 나면 아빠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나도 최대한 저녁 약속을 줄였다. 식사가 끝나면 아빠는 소파에 앉아 넷플릭스를 켰다. 오늘은 뭘 볼까, 라며 영화를 고르셨다. 가끔은 케이블에서 해주는 옛 서부극을 보기도 했다. 나도 거실 테이블에 앉아 아빠와 한두 마디 주고받았다. 나에게도 할 일이 많았다. 하지만 이 시간이 좋다. 아빠는 내 일이 당신 때문에 지장 받는 게 싫으시겠지만, 그래도 좋다. 그 잠깐의 순간으로 나는 딸로서의 몫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아빠의 이야기를 듣는 게 좋다. 지금 밖에 할 수 없는 것들을 지금 할 수 있다는 것이, 행복하고 감사하다.


많은 게 익숙해졌지만 단 하나, 적응하고 싶지 않은 게 있다. 다른 대형 병원들도 그렇겠지만 세브란스에는 환자등록 카드가 있다. 접수 및 수납 등 키오스크에 터치만 하면 쉽게 사용할 수 있는 신분증인 셈이다. 하지만 만들고 싶지 않다. 왠지 그것만은 하고 싶지가 않았다. 병원 생활이 곧 끝나길, 자주 오게 되지 않길 바라는 내 나름의 고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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