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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나동 May 28. 2023

폭망한 오로라여행…사파리투어는 잭팟

키루나 여행을 다녀온 지 몇 달이 지나 첫째한테 물었다.

"키루나하면 뭐가 떠올라?"

"음... 정말 추웠던 거랑 하루 종일 숙소에만 있었던 거. 오로라는 뭐 별로."

우리 가족의 첫 오로라 여행은 망했다.

그런데 진정 망했던 것일까.

라플란드 키루나에 도착..도로 한편에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눈

지난 1월 초 3박 4일 일정으로 떠난 키루나 여행을 복기해 보면서 삶의 교훈을 얻고 작은 의미도 찾아보려 한다.

'스웨덴까지 왔는데 오로라는 한번 봐야 하지 않겠어?'

키루나 여행을 마음먹은 시작이었다.

항상 여행은 설레었지만 이상하게도 오로라를 볼 수 있다는 게 설레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인터넷 검색만 해도 잘 찍은 오로라 사진이 너무 많아 뭐 그렇게 다를 게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분명히 안 봤는데 본 거 같은 뭐 그런 느낌이었다.


아무튼 키루나로 떠났다.

아비스코가 아니고 노르웨이 트롬쇠가 아니고 왜 키루나냐고 묻는다면 스톡홀름에서 더 가깝고 가기 쉬웠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오전 일찍 출발하는 비행기라 새벽 3시 30분에 일어나 부산을 떨었다.

매우 이른 시간이라 버스가 다니지 않아 23kg 꽉 채운 캐리어를 질질 끌면서 롭스텐(Ropsten) 역까지 약 2km 거리를 걸었다.

지하철 첫차를 타기 위해서였다.

공항까지 한 방에 가는 택시를 탈 수 있었지만 비싼 택시비와 승차인원 5명이라는 애매한 숫자 때문에 포기했다.

물론 돈 몇 푼 아껴보려고 가족 고생시킨 것은 맞다.

새벽 운동한 셈 치자고 말했더니 오로라 보러 가는 버킷리스트 여행인데 '이게 무슨 야반도주도 아니고'라는 타박이 돌아왔다.

식구가 4명에서 5명으로 늘어난 순간 여행의 질은 떨어지고 비용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숙소, 교통편을 예약할 때 이 5라는 가족 수는 정말 애매하기 짝이 없다.

웬만한 호텔 등 숙소는 방 하나에 최대 인원이 4명까지인 경우가 많다.

침대가 5개인 패밀리룸을 구하는 건 하늘의 별따기이고 숙박비도 확 뛴다. 패밀리 룸이 없다면 어쩔 수 없이 방 2개를 예약해야 할 때도 있다.

기차 등에서도 반드시 한 명은 따로 앉아야 하고 외국에서 택시를 이용할 때도 적정 인원을 넘다 보니 이런저런 눈치가 보인다.

이상 야반도주하듯 오로라 여행 떠나며 꼭두새벽부터 가족 고생시킨 아빠의 비겁한 변명이었다.


첫차를 타고 T-센트랄렌역에 도착한 뒤 시속 200km로 공항까지 18분 만에 주파하는 알란다 익스프레스를 타고 알란다 공항에 도착, 노르웨지안 항공기에 무사히 탑승할 수 있었다.

(알란다 익스프레스는 아이가 있는 가정에 강추한다. 성인 동반 17세 이하 아이는 무료탑승이다.)

(키루나행만 그런지 모르겠지만 노르웨지안 항공사는 체크인을 하는 카운터와 탑승 게이트 터미널이 달랐다. 사전에 안 물어봤으면 비행기 놓칠 뻔했다.)

기내에 기름 냄새가 많이 났고 새벽부터 잠도 못 자고 많이 걸은 탓인지 첫째와 둘째는 먹은 것도 없는데 속을 게워내 마음이 아팠다.

온통 눈세상 키루나

키루나 공항은 진짜 자그마했다.

코털이 어는 거 같은 알싸한 공기부터 달라 라플란드 추위가 실감 났다.

곳곳에 눈이 산더미같이 쌓여 신기했다.

스톡홀름도 해가 짧은데 여긴 더 짧았다.

낮 12시인데 주변이 어둑어둑해지고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해가 떨어지면서 서서히 키루나 추위가 본색을 드러냈다.

키루나 시내를 좀 돌아본 뒤 놀이터에서 눈썰매를 타고 놀다가 마중 나온 차를 타고 30분가량 떨어진 한 캠프에 도착했다.

눈으로 뒤덮인 스웨덴 키루나

우리 가족이 3박 동안 머물게 될 곳이었다.

너무 추웠다. 캐빈 밖으로 나갈 엄두를 못 냈다.

그래서 밥 해 먹고 쉬고 있는데 캠프 주인아저씨가 오늘 오로라 지수가 높다며 얼른 나가자고 그런다.

우린 사전에 오로라 헌팅 투어를 신청한 상태였다.

그래도 이렇게 갑작스럽게 옆구리를 찌르다니 당황스러웠지만 이왕이면 오로라를 빨리 보는 게 좋을 거 같아 중무장하고 주인아저씨를 따라나섰다.

차를 타고 10분 정도 가니 사방이 확 트인 벌판이 나왔다.

이 벌판은 사실 호수가 꽁꽁 얼어붙은 것이었다.

근데 진짜 너무 추웠다.

주인아저씨가 모닥불을 피웠는데도 아이들 손가락 발가락이 급속도로 얼기 시작했다.

나도 발가락 감각이 없어졌다

막내는 급기야 춥다고 울음을 터트리고 결국 오로라 구경도 못하고 숙소로 복귀했다.

영하 18도라는데 체감온도는 훨씬 더 낮았다.

주인아저씨가 방한복과 방한화, 방한장갑을 빌려줄 테니 다음엔 입고 나오라고 했다.

1월 키루나 정오 풍경. 이미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 노을이 지고 있다.

둘째 날도 무지 추웠다.

오로라 투어는 날씨가 가장 좋다고 예상되는 셋째 날 다시 하기로 해 이날은 별다른 일정이 없었다

잠시 밖에 나와 주변을 돌아보는데 하늘 색깔이 참 오묘했다.

눈 쌓인 얼어붙은 강을 걷는데 기분이 색달랐다.

강이 아주 넓어 시야가 확 트였다.

눈 쌓인 얼어붙은 강

그러곤 다시 숙소로 들어가 저녁까지 나오지 않았다.

추워서 못 나왔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하다.

씻는 것조차 귀찮았다.

그러다 잤다.

드디어 인생 첫 오로라

다음 날 새벽 4시인가 오로라 앱 알림에 문득 눈이 떠져 밖으로 나갔다

하늘에 뭔가 일렁일렁거리는 연두색 혹은 녹색 빛이 보였다.

이게 오로라인가 싶었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고 빨리 미니 삼각대 펼치고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이렇게 볼 줄 알았다면 오로라 헌팅 투어 신청은 안 했을 텐데 뒤늦은 후회를 하면서 말이다.

쉴 새 없이 변하는 오로라

오로라는 눈으로 보는 거보다 사진으로 찍어야 더 선명하게 잘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오로라는 계속 움직이고 사라지고 반복하는데 사람 눈은 망막에 그때그때 잔상만 남아 바로 지워진다.

반면 사진은 길게는 수십 초 동안 센서에 빛을 모으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오로라를 직접 보니 신기하고 황홀했다.

한편으론 그동안 내가 봐왔던 휘황찬란한 오로라 사진보다 못한 오로라를 보고 실망스럽기도 했다.

키루나에서 만난 오로라

그래도 오로라가 신기루처럼 사라지기 전에 한 장이라도 건지려고 계속 찍었다.

장갑을 벗은 손이 깨질 듯 시리고 아팠다.

나중엔 타임랩스를 켜둔 채 주머니에 손 넣고 오로라를 감상했다.

오로라를 오롯이 눈에 담고 싶었다.

키루나 오로라 타임랩스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에서 주인공인 벤 스틸러는 그토록 찾아 헤매던 숀 오코넬을 히말라야 산맥에서 만난다.

망원렌즈를 들고 잠복하던 숀 오코넬은 기다리던 눈표범을 발견하고도 카메라 셔터를 누르지 않고 그저 눈표범이 사라질 때까지 보기만 한다.

"아름다운 순간이 오면 카메라로 방해하고 싶지 않아. 그저 그 순간 속에 머무르고 싶지."

나도 인생 첫 오로라 그 신비로운 순간을 즐기고 싶었다.

키루나에서 인생 첫 오로라

아내가 숙소로 빨리 돌아가 애들을 깨웠는데 첫째는 평소엔 그렇게 굼뜨더니 빛의 속도로 옷을 입고 나와 잠시나마 오로라를 봤다.

둘째는 잠시 눈을 뜨더니 한다는 말이 "나 안 봐도 돼. 나중에 다시 여기 와서 보면 돼"하고 다시 잤단다.

셋째는 깨워도 여전히 꿈나라였고.

5명이 와서 3명만 오로라를 본 가성비 현저히 떨어지는 여행이었다.

눈으로 직접 본 오로라는 기대 이상이었고 오로라를 볼 수 있는 기회를 준 하늘에 감사한 마음이었다.

숙소로 들어가서도 그 여운이 가시지 않아 쉽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키루나 오로라

아침을 일찍 챙겨 먹고 셋째 날 메인 투어인 사파리를 떠났다.

주인아저씨 차에 탑승해 스웨덴에서 가장 높은 산인 '니칼루옥타' 주변에 사는 야생동물을 보는 일정이었다.

1시간가량 눈길을 지루하게 달렸다.

영화 겨울왕국에 나오는 '스벤' 비슷한 동물이라도 불쑥 나와주길 기대했지만 한 마리도 보지 못했다.

그때 갑자기 주인아저씨가 차를 세우고 앞을 보라고 말했다.

전방 50m 거리에 엄마 무스와 새끼 무스가 도로를 건너는 모습이 보였다.

무스 2마리는 이내 길을 건너 숲 속으로 사라졌다.

신기한 마음에 보긴 했지만 너무 순식간에 무스 모녀는 지나가버렸다.

주인아저씨는 '잭팟(jackpot)'이라고 말했다.

이제 사파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모양이다 싶었는데 그걸로 끝이었다

차를 돌려 숙소로 돌아왔다.

주인아저씨는 차 타고 왔다 갔다 한 2시간 동안 무스 2마리를 본 우리 가족에게 정말 운이 좋은 거라고 했다.

무스 2마리 보고 끝난 50만원짜리 야생 사파리 투어

우리가 기대한 건 이런 게 아니었는데, 캠프 홈페이지엔 눈으로 덮인 대초원을 달리는 순록 무리의 사진이 정말 예술이었는데.

무스 2마리 본 것이 가족 5명 총 50만원짜리 야생 사파리 투어라니.

이건 뭐 보이스피싱급 여행 사기가 아닐까 싶었지만 그래 이것도 여행의 일부이고 평생 도저히 잊히지 않는 (분통 터지는) 추억으로 남으려니 했다.

캠프 홈페이지에 나온 야생 사파리 투어 장면. 무스 2마리와 너무 비교되지 않나

기분 상해서 이날 저녁 예정됐던 오로라 투어는 스스로 보겠다고 말했다.

새벽 오로라를 본 경험도 있고 더욱이 오로라 지수도 높아 충분히 다시 볼 가능성이 높겠다 싶었다.

주인아저씨도 오늘밤이 오로라 피크라고 말해줬다.

카메라 삼각대도 빌려 DSLR과 휴대전화 투 트랙 촬영으로 세기의 오로라 역작 사진을 찍어보리라 마음먹었다.

잠도 거의 안 자고 밤새도록 오로라 앱 알림을 기다렸다.

하지만 끝내 알림은 오지 않았고 새벽 들락날락하며 호숫가를 전전했지만 짙게 낀 구름은 하늘을 쉬이 내주지 않았다.

아쉬움이 많이 남는 밤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게 자연의 섭리인 것을.

누군가 오로라를 3대가 덕을 쌓아야지 볼 수 있는 지리산 천왕봉 일출과 비교하기도 했다.

실제 오로라 여행을 갔는데도 날씨와 여건이 맞지 않아 오로라를 못 보고 돌아오는 경우도 많다.

전날 오로라를 본 것만도 행운이었고 감사한 일이었다.

키루나-스톡홀름 야간 침대열차.. 생각보다 타볼 만했다

마지막 날엔 키루나 시내를 잠시 돌아보다가 총 15시간 걸리는 야간 침대열차를 타고 스톡홀름으로 돌아왔다.

침대, 이불 등 잠자리를 스스로 만들어야 하지만 3층으로 된 침대칸에서 누워 자며 여행하는 것도 새로운 경험이었다.

아이들이 무척 좋아했다.

놀랍게도 내가 만나본 스웨덴인 대부분은 오로라를 본 적이 없다고 했다.

현지인에게도 오로라를 보는 건 특별한 경험인 듯했다.

우여곡절 끝에 가족과 함께 버킷리스트 하나 삭제 완료다.

마지막 날 날씨가 흐려 오로라는 물 건너 간 와중에 장노출로 아내를 향한 나의 사랑(LOVE)을 표현하려고 했는데 'DOVE'가 돼 버렸다. 내 사랑 '비둘기'여!

내가 생각하는 오로라 여행 팁

야생 사파리 투어는 변수가 많아 차라리 스노모빌이나 개썰매 체험이 더 나은 것 같다. (근데 체험이나 액티비티 자체가 너무 비싸다. 숙박비가 비교적 저렴하고 각종 체험으로 돈을 버는 구조인 듯.)

오로라 헌팅 투어는 복불복이긴 하겠지만 돈이 아까울 수도 있다.

오로라를 찍을 땐 휴대전화라도 삼각대가 있으면 좋고 블루투스 릴리스가 있으면 더 좋겠다. (주머니에 손 넣고 버튼만 누르면 된다)            

너무 추운 시기는 피해라. (키루나 캠프 주인아저씨는 11월에 오로라 투어 여행객이 가장 많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만큼 성수기라는 말일 테니 시기를 잘 선택하시길)            

아무리 오로라 지수가 높아도 구름이 끼면 말짱 도루묵이다. 운 없으면 못 볼 수도 있으니 마음을 편하게 먹고 여행에 임하는 게 정신건강에 좋다. (다음에 다시 오면 된다던 둘째는 오로라 사진만 보고도 마치 본 것처럼 만족하며 잘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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