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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나동 May 25. 2023

꼬마는 눈썰매, 어른은 스키…골프장의 변신

스웨덴 하면 떠올렸던 게 눈이었다.

부산에 살아 일 년에 눈 한번 제대로 볼 기회가 없었던 우리 가족에게 스웨덴 생활에서 가장 기대되는 것 중 하나가 눈이었다.

스웨덴 겨울을 즐겨보리라 마음먹고 지난해 11월 중순 스웨덴 첫눈 온 다음날 눈썰매를 인터넷으로 주문했다.

눈썰매 하나씩 들고 신나게 논 삼남매
눈밭에 드러누운 첫째
눈 온 다음날 하늘이 청명했다
눈썰매 타느라 모든 걸 불태운 막내

근데 도대체 눈이 와도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우찌 되겠지 싶어 오가며 봐뒀던 장소로 한번 가봤다.

평소 주민들이 출퇴근하는 자전거 도로 옆 사면이었다.

제법 경사가 있어 눈썰매 타기 좋았다.

매년 겨울 눈썰매 타러 전북 남원에 갔던 기억이 생생한데

스웨덴에서 처음 타는 눈썰매라 아이들도 무척 좋아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탔다.

나도 빌려서 타보니 재미가 좋았다.

다만 사면 끝부분이 인도와 아스팔트 도로와 맞물려 강제로 제동을 해야 하고 딱딱한 바닥에 다칠 수 있는 점이 아쉬웠다.

다른 대안이 시급했다.

스웨덴에서 눈썰매를

그런데 이번엔 제대로 된 눈이 한동안 안 왔다.

스웨덴 오면 눈이 많이 온다던데 이게 뭔 일인가 싶었다.

20여 일 만에 제법 그럴싸하게 눈이 내렸고 아침밥 먹고 곧장 집을 나섰다.

며칠 전 놀이터에서 손자를 데리고 나온 한 할아버지에게 주변에 눈썰매 탈 만한 곳을 추천받았는데 사실 긴가민가했다.

속으로 '그게 가능해? 진짜로?'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경사면이 있다는 놀이터를 염두에 두고 가는 중에 추천받은 장소인 '플랜 B'의 가능성을 타진해 보기로 했다.

일단 버스부터 탔다.

눈썰매 타려고 중무장한 채로 버스 기다리는 남매

목적지까지 2코스 정도 남았는데 버스 창문 너머로 길게 쭉 뻗은 사면으로 눈썰매를 타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진짜네.'

그 할아버지 말씀이 참말이었다.

"아빠, 더 가야 된다며"라는 셋째의 말을 뒤로하고 바로 하차벨을 눌렀다.

내린 곳은 골프장이었다.

이미 많은 아이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눈썰매를 타고 있었다.

눈썰매장으로 변한 골프장

나에겐 진짜 엄청난 충격이었다.

예전 어린이날을 맞아 부산의 한 골프장이 시민에게 처음으로 개방됐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나는 골프를 치지 않지만 왠지 골프를 떠올리면 뭔가 고급 스포츠 느낌이라 좀 괴리감이 있다.

우리나라 골프장에서 눈썰매를 타는 게 상상이 되지 않았다.

만약 그렇게 했더라면 덩치 큰 보안요원이 "어이 학생 여기서 그라믄 안 돼, 나와"할 거 같은 느낌이다.

어린이날에 어린이를 위해 골프장 개방했다는 게 기사가 되는 나라에 살다가, 눈 왔다고 동네 아이들 마음껏 눈썰매 타라고 생색 없이 골프장 문을 여는 이곳에 약간 감동 먹었다.

애초 놀이터 할아버지 말을 듣고도 내가 잘못 이해했거나 의심이 들었던 이유는 내가 살아온 상식으론 그게 잘 납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건 어느 나라가 더 좋냐 뭐 그런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분위기나 전통 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다.

골프장에서 눈썰매를 탈 줄이야

스웨덴에서는 사유지라도 상업적인 목적이 아닌 이상 채집의 권리가 허용된다.

알레만스레텐(allemannsretten)이라고 불리는 공동접근권이다.

그래서 스웨덴에서는 어떤 숲에서든 동물에 피해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링곤베리나 버섯 등을 따서 집으로 가져갈 수 있다고 들었다.

그게 시민의 당연한 권리로 받아들여진다.

비단 숲에서 열매를 따는 것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그런 류의 톨레랑스를 허용하는 셈이다.

시원하게 펼쳐진 눈 내린 골프장에서 눈썰매 타는 즐거움

골프장에서 눈썰매만 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눈썰매가 아이들을 위한 눈레포츠라면 어른들은 기다란 스키를 신고 골프장 곳곳을 '크로스컨트리'한다.

그냥 일부만 이용하는 게 아니라 통째로 개방하는 거다.

눈썰매를 타다가 골프장 여기저기에서 크로스컨트리 스키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고 또 한 번 신기했다.

골프장에서 스키라니... 버킷리스트 하나 생겼다.

골프장에서 크로스컨트리 스키 타는 사람

이날 해질 때까지 즐겁게 눈썰매를 탔다.

핸들이 달려 방향 전환이 되는 눈썰매(스웨덴에선 스피드레이서라고 불렀다)는 부러웠다.

다음번에 눈이 오면 다른 골프장에 가볼까 생각 중이다.


스웨덴은 겨울이 길지만 스키나 눈썰매, 스케이트 등 겨울스포츠를 접할 기회가 많고 지자체에서 무료로 즐길 수 있는 장소까지 알려주고 있었다.

스웨덴은 괜히 겨울스포츠 강국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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