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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나동 May 30. 2023

북유럽 이 나라에 가면 기억해야할 시간

스웨덴의 5월은 본격적으로 낮이 길어지는 시기다.

6월까지 계속 해 지는 시간이 늦어지다가 하지를 기점으로 다시 조금씩 빨라진다.

낮이 길다 보니 자정이 다 된 시간인데도 초저녁 같은 하늘이 펼쳐진다. 이른바 백야다.

어제는 아직 해가 쨍쨍한 오후 6시 무렵 아내와 테라스에서 낮술(?)을 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맥주 2캔과 반 병 정도 남겨둔 와인이 금세 동났다.

애초 술판을 벌일 작정이 아니었고 날씨와 바람이 좋아 시작한 자리였다.

여분의 술이 없는 것이 아쉬웠다.

술이 조금만 더 있으면 좋을 것 같았다.

시계를 보니 6시 47분.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운동화로 갈아 신고 냅다 뛰기 시작했다.

내가 간 곳은 스웨덴에 와서 마트만큼 자주 간 곳 시스템볼라겟(Systembolaget)이었다.

다행히 폐점시간을 몇 분 남기고 도착해 맥주 몇 캔과 와인 1병을 산 뒤 한숨을 돌렸다.

이상하게도 이렇게 아슬아슬하게 산 술이 더 맛이 좋은 건 기분 탓이려나.

systembolaget

술 마시는 사람이 스웨덴에서 꼭 기억해야 할 시간이 있다.

평일 오후 7시, 토요일 오후 3시.

무슨 언론사 마감시간 같지만 시스템볼라겟 폐점시간이다.

집에 술을 넉넉하게 쌓아두더라도 마시다 보면 어제처럼 똑 떨어지는 날이 있다.

약간 아쉬운 마음에 술을 더 사고 싶어도 시스템볼라겟 마감시간을 놓치면 대략 낭패다

그럴 경우 마트에서 저도수 맥주를 사서 마시기도 하지만 영~ 재미가 없다

알코올 도수가 2.8% 정도라 마셔도 전혀 취기가 돌지 않는다.

나에겐 술이 아니라 그냥 무알콜 맥주에 가까운 느낌이다.

마셔도 취하지 않는 알코올 도수 2.8%짜리 물 같은 맥주들

5년 전 스웨덴 여행 때 시스템볼라겟의 존재를 모른 채 마트에서 산 맥주를 마시고 마셔도 취하지 않아 이 놈의 나라는 무슨 이런 술 같지도 않은 술을 다 파는 거냐고 흥분한 적이 있었다.

핀란드에 갔을 때도 황당했다.

마트에서 맥주를 사는 데 점원이 자꾸 계산을 해주지 않고 돌려보내는 게 아닌가.

왜 무슨 이유로? 핀란드말을 잘 이해하지 못해 다른 맥주를 들고 가도 또 안 된다고 했다.

점원이 결국 따라오라더니 알코올 도수 2%짜리 맥주를 내 손에 쥐어줬다.

핀란드에선 오후 9시인가 그 이후부터 마트에서 저도수 술 외엔 못 팔게 했다.

고작 알코올 도수 4~5%에 불과한 맥주를 눈앞에 뻔히 보고도 못 사는 상황에 기막혔던 기억이 있다.

시스템볼라겟

스웨덴에선 보통 알코올 도수 4% 이상 술은 시스템볼라겟이라는 국영 주류판매점에서만 판매한다.

마트에서는 알코올 도수 3.5% 이하의 맥주만 판다.

이런 주류 독점 판매 구조는 국민의 알코올 소비를 제한하기 위해서란다.

처음엔 무슨 공산당도 아니고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부가 술 유통, 판매를 독점하는 '주류 독재'가 말이 되는 일인가 싶었다.

보통의 상품과 달리 술은 많이 마실수록 그로 인한 알코올 중독, 질병, 사망, 폭력 등을 초래할 수 있어 국가가 통제한다는 것이 시스템볼라겟의 설명이다

술로 인한 부작용을 막기 위해선 소비량을 줄여야 하는데 국민이 술을 살 수 있는 시간을 짧게 한 것이다.

다시 복습! 술꾼이라면 기억하자. 평일 오후 7시!

이 때문에 시스템볼라겟의 영업시간은 식료품점이나 마트보다 짧다.

놀랍게도 시스템볼라겟의 영업시간은 스웨덴 의회가 정한다고 한다.

애초엔 토요일에도 시스템볼라겟 문을 닫았지만 술꾼들의 요구가 워낙 강력해 스웨덴 의회도 한 발 물러나 오후 3시까지 제한적으로 허가했다고 한다.

시스템볼라겟은 일요일엔 휴무이기 때문에 금요일이나 토요일 오후(특히 폐점시간 전) 시스템볼라겟에 가면 술을 미리 사두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기도 한다.

시스템볼라겟 풍경

국영기업 시스템볼라겟의 사명은 '좋은 서비스로 술을 판매하지만 가능한 한 많이 팔거나 이익을 극대화하지 않는다'는 거다.

보통의 기업은 이윤을 남기는 게 지상 최대의 목표인데 이런 반자본주의 기업이 있나 싶을 정도다.

이 시스템볼라겟은 가능한 한 국민에게 술을 많이 팔아서는 안되며 그렇기 때문에 '3개 사면 2개 값만 지불' 등의 프로모션을 하지 않는다.

이는 스웨덴에서 연예인 공유같이 잘 생긴 배우가 나와서 '청정라거 테라'라고 외치는 것과 같은 술 광고가 전혀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대신 시스템볼라겟은 주류 독점기업으로 광고나 마케팅을 하지 않아도 소비자에게 좋은 서비스를 제공한다.

소믈리에 수준의 주류 지식을 갖추도록 교육받은 점원들은 소비자가 원할 경우 음식 상황과 조건에 맞는 술을 추천해 준다.

소비자가 원하는 술이 있다면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수입해서라도 구해준다.


이런 국영 독점판매로 인해 피해를 보는 곳은 수제 와인이나 맥주를 만드는 지역 생산자들이다.

이들은 직접 술을 팔지 못하고 시스템볼라겟에 납품하는 형태 등으로만 팔 수밖에 없다.

지난해 총선거에서 지역 와인, 맥주 생산자의 판매 허용 문제가 선거 쟁점 중 하나였는데 현 우파 연립 정부는 이들 지역 생산자의 술 판매 허용을 적극적으로 검토 중이다.

이렇게 된다면 정부 독점 주류 판매 시스템 근간이 흔들리는 거 아닌가.


1955년 설립돼 70년이 다 돼가는 시스템볼라겟은 2021년 기준 스웨덴 전역에 450개 매장이 있고 직원은 6천238명에 이른다.

연간 1억2천670만명이 매장을 방문했고 시스템볼라겟 인터넷 홈페이지에는 6천780만명이 다녀갔다.(인터넷 구매도 가능하다)

연간 매출액은 381억 크로나(약 4조6786억원)에 달한다.

WHO의 유럽 국가 15세 이상 1인당 연간 순수 알코올 소비량. 스웨덴은 뒤에서 3번째다 (출처=systembolaget 홈페이지)

한편으론 술 판매시간을 제한해 소비량을 줄인다는 발상 자체가 너무 단순하고, 옷 안사고 술 사먹는 술꾼들을 과소평가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2021년 스웨덴의 연간 1인당 순수 알코올 소비량은 8.7리터로 11리터인 유럽 평균보다 낮다고 한다. 술 판매시간을 짧게 해 소비량을 줄인다는 의도는 적중한 셈이다.

겨울이 긴 스웨덴의 특성상 술 소비량이 이 정도밖에 안 될까라는 의문은 여전하다.

8.7리터면 500ml 맥주 17개 정도밖에 안 되는데 난 스웨덴에 온 지 한 달 만에 스웨덴 1인당 연간 알코올 소비량을 가뿐히 뛰어넘은 셈이다.

짧은 판매시간으로 알코올 소비를 줄이려는 스웨덴의 주류 독점은 적어도 나에겐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일이었다.

systembolaget에 진열된 다양한 맥주

독점체제 시스템볼라겟의 장점은 있다.

술이란 술은 다 모아두니 선택 범위도 넓어지고 새로운 술도 알게 되고 좋았다.

가장 좋은 건 술값이 비교적 싸다는 거다.

이윤을 최소화한다고 하니 유통마진이 빠지는 셈이다.

알코올 도수 4~5%짜리 맥주 500ml 기준 저렴한 건 11~12크로나(1천300~1천500원대) 정도이다.

아내 말에 따르면 특히 와인이 싸다고 한다.

레드, 화이트, 스파클링 통틀어 만원대나 그 이하 가성비 좋은 와인이 제법 많다고 한다.

아내가 좋아하는 이탈리아 프로세코(Prosecco) 스파클링 와인 가격은 한국보다 훨씬 저렴한 1만원대 초반이라고 한다.

'맥주파'인 나는 아내 덕분에 와인을 조금씩 즐기고 있다.

시스템볼라겟의 샴페인 코너

그런데 시스템볼라겟에서 알코올 도수 5% 이상의 맥주를 사서 마셔도 이상하게 잘 취하지 않았다.

스웨덴 맥주가 이상한 건지 내가 이상한 건지 모르겠지만, 마셔도 취하지 않다 보니 이걸 왜 마시고 있나 하는 자괴감이 들 때가 많았다.

자연스레 독한 술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처음으로 산 술은 스웨덴, 노르웨이에서 자주 마신다는 아콰비트(Aquavit 또는 Akvavit)였다

스웨덴 기자 출신 소설가 스티그 라르손의 소설 밀레니엄을 읽다가 주인공 미카엘 블롬크비스트가 이 술을 마시는 장면을 보고 한 번 사봤다.

아콰비트 akvavit

도수는 40도였고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식물향이 났다.

2만~3만원대 저렴한 가격에 적당히 취할 수 있어 좋았다.

스웨덴에서 만든 유명 보드카 앱솔루트도 있었지만 내 취향은 아니었다.

다른 술도 마셔보고 싶었다.

이번엔 싱글 몰트 위스키의 세계에 발을 담갔다.

한국에서는 오픈런을 해야 구할 수 있다던 싱글 몰트 위스키의 대명사인 발베니, 맥켈란은 시스템볼라겟에 항상 진열돼 있었다.

가격도 한국에선 10만원을 넘어가는데 7만원대에 구매 가능했다.

나의 첫 싱글몰트 위스키 탐나불린

하지만 입문자가 마시기엔 과한 술이라고 생각해 탐나불린(Tamnavulin) 셰리 캐스크를 골랐다.

이름에서 뭔가 제주도(탐라국) 향이 묻은 거 같고 동유럽 느낌도 나는데 스코틀랜드산 싱글 몰트였다.

싱글 몰트 위스키를 마시면 특유의 초콜릿 맛이나 과일향이 난다고 하던데 그 느낌을 조금 알 거 같았다.

스트레이트로, 또는 얼음을 타서 마셔도 좋았다.

홀짝홀짝 마시다 보니 한 병을 비우고 중상급 싱글 몰트에 도전해 보기로 마음먹고 발베니 더블우드를 샀다.

중급이라서 그런지 탐나불린보다 진했다.

나의 두 번째 싱글 몰트 위스키 '발베니'

이것도 마저 비우고 다음 싱글 몰트 위스키로 맥캘란이나 글렌피딕 등을 사보려고 했는데 최근 몇 달 시스템볼라겟 술 가격이 전반적으로 상승해 다시 탐나불린으로 돌아왔다.

코로나와 우크라이나 전쟁의 영향으로 공급업체나 생산자가 가격을 올린 데 따른 여파라고 한다.

한 병 사두면 왠지 든든한 느낌이다.

평일 오후 7시, 토요일 오후 3시를 넘겨도 나에겐 싱글 몰트 위스키가 있으니까 말이다.

다음 술로는 스웨덴 싱글 몰트 위스키를 염두에 두고 있다.

스웨덴도 은근 몇 안 되는 위스키 제조 강국인데 인공지능(AI)이 엄선한 레시피로 만든 싱글 몰트 위스키가 있다고 해 눈여겨보는 중이다.


예전엔 위스키 같이 독한 술을 왜 먹냐고 했던 나인데 스웨덴에 와서 그런 술을 마시고 있으니 참 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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