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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나동 Jun 07. 2023

자전거 탄 스웨덴 여성이 우아한 이유

'살까, 말까.'


스웨덴에서 많이 고민했던 물건이 있다.

스웨덴에서 개발해 희소성이 있고 아이디어와 기술이 조화를 이룬 제품이었기 때문이었다.

평소엔 보이지 않다가 자동차 에어백처럼 사고나 충격이 있으면 터져 머리를 순식간에 감싸는 헬멧이었다.

스톡홀름에서 에어백 헬멧을 착용한 여성 라이더

자전거 라이더에게 헬멧은 제1의 안전 장비다.

하지만 헬멧만큼 고르기 힘든 장비도 없다.

모양이 예쁘고 마음에 들어도 내 머리에 잘 맞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다.

어떤 라이더들은 머리에 잘 맞는 헬멧만 있다면 비싸도 사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기도 한다.

작고 예쁜 두상을 가진 사람은 자전거 탈 때 엄청난 축복이다.

나는 헬멧과 잘 맞지 않는 두상의 소유자라 헬멧을 고르기까지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다.

헬멧은 모양만 좋다고 덥석 사면 낭패를 볼 수 있다. 무조건 직접 착용해 보고 사야 한다.

Hövding의 에어백 헬멧 Chief 3 (사진=Hövding 홈페이지)

이 에어백 헬멧은 머리에 착용하는 것이 아니기에 자전거 라이더들의 '헬멧 찾아 삼만리' 고민을 싹 날려버릴 수 있는 아이템이었다.

스카프나 목도리처럼 목에 두르면 되기 때문에 머리 모양, 크기에 상관없이 잘 어울리는 편이었다.

모르고 보면 무슨 패션 아이템 같기도 하다.

남자가 사용해도 좋지만 특히 여성한테 잘 어울렸다.

무엇보다 머리를 망가뜨리지 않고 자전거를 탈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여성들이 자전거 탈 때 가장 신경 쓰이는 부분이 머리 스타일이다.

전신 복장을 갖추고 로드 자전거를 타야 할 때는 모르겠지만 생활용이나 출퇴근용으로 자전거를 탈 때 헬멧을 착용해 머리가 눌리거나 망가지는 게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에어백 헬멧을 착용한 여성

그래서인지 스웨덴에서 이 에어백 헬멧을 목에 두른 여성 라이더를 많이 볼 수 있었다.

이 에어백 헬멧을 착용한 여성이 머리를 흩날리며 자전거를 타는 모습은 우아했다.

자전거를 타지 않을 때 손에 쥐거나 가방에 넣어야 하는 일반 헬멧과 달리 에어백 헬멧은 그대로 목에 걸치면 되니까 손이 남는 것도 장점이다.

스웨덴 보험회사 Folksam에 따르면 스톡홀름 자전거 운전자 10명 중 1명 이상이 이 에어백 헬멧을 사용한다고 하니 제법 구매자가 많다.

Hövding의 에어백 헬멧 Chief 3 착용 모습 (사진=Hövding 홈페이지)

단점은 비싼 가격이다.

놀랍게도 공식 사이트 가격은 3천499크로나로 우리 돈으로 43만원이 넘는다.

스웨덴의 가격 비교 사이트에서 찾아본 최저가는 3천99크로나로 38만원 정도다.

한창 살까 말까 고민할 때는 이전 버전 제품을 팔았는데 가격이 2천600크로나(약 32만원) 정도에 할인 제품은 20만원 후반에도 구입이 가능했다.

지금은 신제품만 팔아서 가격이 넘사벽 수준이 됐다.


지난해 한참 고민만 하다가 겨울에 자전거를 타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이 에어백 헬멧이 잊혔다.

그러다가 최근 이 헬멧 광고를 우연히 보고 다시 고민이 시작됐다. (이 광고를 안 봤어야 했다.)


광고는 자전거를 타고 가던 한 중년 남성이 차에 부딪히면서 공중 부양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유체이탈한 남자의 영혼은 사고 현장, 자신의 죽음과 그걸 지켜보는 가족 등을 주마등처럼 스쳐가며 지켜본다.

그러다 다시 현실로 돌아와 이 에어백 헬멧이 활짝 펴지며 목숨을 건지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1분이 채 안 되는 영상인데 시청자를 몰입시킨 뒤 에어백 헬멧의 안전 이미지를 심어주는 웰메이드 광고라고 생각했다.

Hövding의 에어백 헬멧 광고

문득 사고가 나면 에어백이 잘 펴지긴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현대 기아의 자동차도 사고 나면 각도가 안 맞아서 에어백이 안 터지는 경우가 많다는데 자전거 사고 발생 시 믿고 있던 에어백이 안 터지기라도 하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제조사는 스턴트맨과 함께 3천건 이상의 다양한 유형의 실험을 하며 사고 데이터를 수집했고 300명이 넘는 제품 애호가들의 도움으로 2천시간 이상의 정상적인 사이클링 데이터를 축적해 제품에 반영했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만든 헬멧을 착용하면 자전거 라이더의 움직임을 초당 200회 기록해 사고나 비정상적인 움직임 패턴이 감지될 경우 에어백이 0.1초 만에 팽창해 머리 전체를 감싼다고 한다.


후드처럼 설계된 에어백은 아스팔트에 긁히는 것을 견딜 수 있도록 내구성 있는 폴리아미드로 만들어졌다.

에어백 전개 시 머리 전체는 보호하지만 시야는 개방돼 주변 상황을 인지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번 터지면 에어백 압력이 몇 초 동안 일정하게 유지돼 동일한 사고로 머리에 가해지는 여러 번의 충격을 막아준다고도 했다.

Hövding의 에어백 헬멧 스턴트 실험 영상

특히 이 헬멧엔 스퀴브라는 회로를 통해 저장된 전류를 방전해 에어백을 팽창하는 두 개의 커패시터(?)가 있다고 한다. 쉽게 말해 비상용 회로가 있어 하나가 고장 나더라도 꼭 에어백이 전개될 수 있으니 걱정마라는 거다.(두 개 다 고장 나면 어떡하라고?)

제조사는 이 에어백 기술이 기존 자전거 헬멧보다 최대 8배 머리를 잘 보호한다는 과학적 연구 결과가 있으니 안심하라고 강조했다.


8배씩이나?

제조사에 한 가지 의문을 제기하고 싶었다.

자전거를 타다 보면 충돌로 라이더가 자전거에서 튕겨나가는 사고가 가장 많이 발생하는 건 맞다.

그럴 때 에어백 헬멧이 잘 전개만 된다면 라이더의 뇌와 머리를 잘 보호해 줄 수 있을 거라고 본다.

다만 자전거 사고가 꼭 그런 유형으로 발생한다는 보장은 없다.

트럭이 자전거를 덮쳐 라이더가 차 밑에 깔리는 사고가 발생했는데 트럭의 엄청난 하중을 헬멧이 견뎌줘 라이더가 머리를 크게 다치지 않은 일이 실제 있었다.

이런 유형의 사고에 에어백 헬멧은 얼마나 견딜 수 있고 라이더 머리를 잘 보호해 줄 수 있는지 궁금했다.

제조사 관계자가 이 글을 볼 가능성이 내가 이 에어백 헬멧을 살 가능성보다 훨씬 낮겠지만 언젠가 보게 된다면 꼭 답변을 부탁한다.

Hövding의 에어백 헬멧 Chief 3 전개 과정 (사진=Hövding 홈페이지)

이 헬멧은 2시간 충전하면 최대 12시간을 사용할 수 있다.

자전거 운행 전 헬멧을 목에 두르고 단추를 끼우면 감지 센서가 작동하고 자전거를 안 타면 이 단추를 빼야 한다고 한다.

무게는 800g 정도로 일반 헬멧의 2~3배 무게다.

무거운 것 같은데 머리에 쓰는 게 아니라 목에 두르는 것이니까 체감 무게는 다를 수 있겠다.

한번 에어백이 터지면 안전상의 이유로 재활용할 수 없다고 한다.(일반 헬멧도 사고가 발생하면 새 상품을 사는 것이 좋다)

어린이는 착용할 수 없고 15세 이상만 사용해야 한다.


이 에어백 헬멧이 세상에 나오게 되기까지의 과정이 재미있다.

스웨덴에서는 2000년대 초반 15세 미만 모든 이가 자전거 헬멧을 의무 착용해야 하는 법이 제정됐다.

이후 헬멧 의무화가 성인 자전거 라이더에게도 적용돼야 하는지가 활발하게 논의됐다.

(현재 스웨덴에서 성인은 자전거 헬멧 착용이 의무가 아니다. 자기 목숨은 스스로 책임지라는 거다.)

그때 룬드에서 산업 디자인을 공부하던 Anna Haupt와 Terese Alstin이라는 대학생이 모두가 사용하고 싶은 자전거 헬멧의 디자인을 고민하던 중 목에 두르는 에어백 헬멧이라는 아이디어를 고안했다.

두 사람은 2006년 이 아이디어로 벤처 대회에서 우승했고 회사를 설립해 7년 뒤 실제 상품을 개발했다.

현재 직원 40명 규모로 회사가 커졌고 15개국 이상 30만여개의 에어백 헬멧을 판매했다고 한다.

Hövding의 에어백 헬멧 Chief 3을 착용한 자전거 라이더 (사진=Hövding 홈페이지)

이 에어백 헬멧은 우리나라엔 아직 공식 시판되고 있지 않다.

혹시나 싶어 찾아보니 구매대행으로 배송비 포함 최저가 38만원 정도에 판매하는 사이트는 있지만 AS가 안 되니 실제 구매할 사람은 별로 없을 거 같다.


새로운 개념의 헬멧을 상품화해 선택의 폭이 좁고 까다로운 자전거 헬멧 시장에서 나 같은 머리 뚠뚠이 라이더에게 하나의 선택지를 준 Anna Haupt와 Terese Alstin에게 정말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그럼에도 정가에는 도저히 못 살 거 같고 할인하면 다시 한번 고민해 봐야겠다.

만약 이 헬멧을 사서 사용하다가 한국으로 들고 갈 수 있을까 궁금함이 생겼다.

제조사 측은 현재 운송 규정에 따라 이 에어백 헬멧은 기내 수하물이나 위탁 수하물로 항공기에 가져가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고 홈페이지에 밝히고 있다.

굳이 가져가고 싶으면 운송회사에 맡겨서 가지고 가라는 말과 함께.


오 마이갓이다.

'안 산다, 안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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