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설나동 Jun 23. 2023

한국어해설 요청에 화답한 '동화 속 세상'

'유월의 언덕'이 유월이 가기 전에 응답했다.


지난 14일 스웨덴 스톡홀름에 있는 어린이를 위한 동화 속 세상 '유니바켄'(Junibacken, 스웨덴어로 유월의 언덕이라는 뜻) 측에 메일을 보냈다.

유니바켄의 가장 인기 있는 시설인 '동화 기차'(Sagotaget)에 한국어 음성 내레이션을 추가해 줄 수 없느냐는 내용이었다.

'동화 기차'는 세계적인 스웨덴 작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마지막 동화를 시각, 청각, 공감각적으로 구현해 놓은 체험공간이다.

그동안 이곳에 5번을 방문해 '동화 기차'를 탈 때마다 한국어 해설이 없어 아쉬웠던 마음과 스웨덴 한국인 거주자가 일본인 거주자보다 많은 통계에도 일본어해설은 있지만 한국어해설이 없는 건 이해하기 어렵다는 취지의 내용을 메일에 담았다.

유니바켄 측에 동화 기차 한국어 음성 내레이션을 추가해 달라고 요청한 메일 일부.

사실 유니바켄 측이 메일을 보기나 할지, 본다 한들 어떻게 생각할지, 답장이라도 줄지 긴가민가했다.

마음 한편엔 유니바켄을 방문하는 한국 아이들이 한국어 해설을 듣고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동화를 잘 이해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통하지 않을까 기대도 컸다.

그것이 평생 아동의 권리와 평등을 위해 싸운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정신에 접근하는 방식이라는 점도 강조했다.


스웨덴 공공기관에서 흔히 하는 것처럼 영업일 기준 10일(2주일)은 담담히 기다려보자고 마음먹었지만 취업 여부 연락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하루하루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그러다 7일 만인 21일. 느닷없이 유니바켄 커뮤니케이션, 마케팅 매니저로부터 답장이 왔다.

제목만 봐선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었다.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클릭.

유니바켄 마케팅 매니저에게 온 메일 전문.

짧은 영어 실력 탓이겠지만 두 문단에 불과한 메일 내용이 한 번에 잘 이해되지 않아 천천히 읽고 또 읽었다.

첫 번째 문단은 우리 가족이 유니바켄에 계속 방문해 줘서 고맙고 동화 기차는 자신(마케팅 매니저)도 가장 좋아하는 거라는 내용이었다.

핵심이었던 두 번째 문단은 집중해서 여러 번 읽었다.


'우린 현재 동화 기차에 (해설) 언어를 추가할 가능성을 살펴보고 있다. 하지만 모든 동화기차와 장면만의 특성이 있기 때문에 번역, 녹음, 동기화 과정이 좀 필요할 것 같다. 시간과 날짜를 약속할 순 없지만 (그 과정을) 해결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약간 과장하자면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 믿기지 않았다.

무엇보다 유니바켄 측이 내 메일에 응답했고 진심을 알아줬다는 생각에 너무 고마웠다.

내레이션 언어를 하나 추가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일임을 이번 메일을 보내면서 알게 됐기에 유니바켄의 결정에 감동했다.


사실 유니바켄 측이 답장을 보내오지 않아도 수긍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난 14일 유니바켄에 메일을 보낸 뒤 첨부파일로 함께 보낸 사진을 찬찬히 들여다보게 됐다.

예전 유니바켄에 갔을 때 찍은 이 사진엔 '동화 기차' 오디오 해설이 가능한 16개국 국기가 나와 있었고 왼쪽 하단엔 리프트에 사람이 타는 장면이 찍혔다.

유니바켄 동화 속 기차 오디오 가이드 언어가 가능한 국기가 벽면에 그려져 있다. 왼쪽엔 리프트 상단에 해설 언어를 선택하는 장치가 있다.(빨간색 원)

리프트 위에 설치된 장치(빨간색 원)가 동화 해설을 플레이하는 기계인 걸 알게 됐다.

리프트를 탈 때마다 직원이 어떤 언어를 선택할지 묻고 리프트 위에 손을 얹어 뭔가를 누르는 것이 기억났기 때문이었다.

그 장치에 조그만 흰색 버튼이 정확히 16개 있는데 그건 현재 가능한 내레이션 언어가 16개임을 의미했다.

직원이 눌렀던 것이 이 조그만 버튼이었음을 뒤늦게 알 수 있었다.

즉 내레이션 언어를 하나 추가하려면 버튼을 새로 만들어 넣는 등 장치의 구조적 변경이 불가피하고, 더군다나 스키장 리프트처럼 시간 간격을 두고 촘촘히 돌아가는 동화 기차 리프트 위 장치를 일일이 손봐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동화 속 기차'는 리프트를 타고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동화를 경험하는 마법의 체험이다.(사진=유니바켄 홈페이지)

동화 번역도 단순한 직역이 아니라 한글 정서에 맞는 새로운 표현을 찾아내거나 의역해야 하는 만만치 않은 작업이다. 창작만큼 어려운 일이 번역이라고들 하지 않나.

녹음 역시 더빙을 누구에게 맡길지 정하는 것이 쉽지 않은 데다 유니바켄 측이 밝힌 대로 리프트 속도, 동화 기차가 지나가는 장면과 딱 들어맞게 해설을 입혀야 하는 지난한 일이다.


메일을 보낼 때는 그저 번역하고 녹음하면 끝이라 생각했는데 단순히 소프트웨어를 바꾸는 게 아닌 하드웨어 자체를 바꿔야 하는 작업이라는 사실을 미처 알지 못했다.

이 때문에 유니바켄으로부터 설사 답장이 오지 않더라도, 해설 언어를 추가하는 것이 어렵다는 답변이 오더라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런 복잡한 과정을 검토해서 해결책을 찾겠다고 하니 어찌 감동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해설 언어 추가 과정에서 시스템은 전문성이 필요한 부분이라 어찌할 수 없지만, 녹음이나 번역은 내가 도움이 될 부분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봤다.

한국어 해설에 의미를 담는 게 여러모로 회자될 수 있고 어쩌면 더 많은 한국 아이들이 유니바켄을 방문하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싶었다.

유니바켄의 한국어 해설 작업 추진이 확정되고 진행되는 걸 전제로, 녹음은 2020년 한국 작가 최초로 올해의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상을 받은 백희나 작가가 맡는다면 좋을 것 같았다.

2020년 올해의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상 수상자인 백희나 작가(사진=유튜브 채널 Astrid Lindgren Memorial Award)

이 상은 2002년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이 향년 94세로 세상을 떠나자 스웨덴 정부기관인 스웨덴 예술위원회가 그의 이름을 따서 제정한 국제적인 아동문학상이다. 아동문학계의 노벨상으로도 불린다.

백희나 작가는 코로나 때문에 수상 3년 만인 올해 스웨덴에 와서 스웨덴 어린이를 만나 동화구연 행사를 하기도 했다.

백희나 작가는 구름빵, 장수탕 선녀님, 달 샤베트, 알사탕, 이상한 엄마 등 주옥같은 동화를 만들었다. 나 역시 아이들한테 이 동화책을 읽어주며 백희나 작가의 팬이 됐다.

백희나 작가가 한국어 해설 녹음을 한다면 스웨덴,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상과의 인연 등으로 더 빛을 발하지 않을까 싶다.

유니바켄 측에 이 같은 제안을 한번 해볼 예정이다.

백희나 작가의 대표작 '장수탕 선녀님', '구름빵'

유니바켄이 보낸 메일을 보면 한국어 내레이션 언어 추가 작업이 최종 확정, 진행, 완료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다. (어쩌면 기술상의 문제 등으로 작업이 이뤄지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우리 가족은 다음 달 스웨덴을 떠나기에 그 전까지 작업이 마무리되지 않겠지만 언젠가 꼭 다시 와서 한국어 해설 버전이 있는 유니바켄 동화 기차를 타보고 싶다.


그날이 빨리 오기를 기원하며 한국어 해설 언어를 추가하는 쉽지 않은 결정을 흔쾌히 한 유니바켄 측에 다시 한번 감사의 말을 전한다.

이전 08화 국민 40%가 마라토너라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