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설나동 Jul 05. 2023

국민 40%가 마라토너라고?

헉~ 헉~

호흡은 망가진 지 이미 오래.

가도 가도 결승선은 보이지 않는다.

많은 이들이 나를 추월한다.

한발 한발이 천근 같다.

윤상 노래 '달리기'가 머릿속에 맴돈다.

이를 악물었다. 이제 와서 멈춰설 순 없으니.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신기루 같이 잡힐 듯 말 듯 다가온 피니시 라인에 몸을 던졌다.

가뿐 숨이 터지며 몸이 반으로 푹 꺾였다.


나의 첫 10km 마라톤 공식 기록은 54분 29초.

애플워치가 인식한 달리기 거리(13.26km)와 실제 달린 거리가 달랐다.

첫 마라톤 대회에서 그동안 내 달리기 실력이 '가짜'였다는 걸 알았다.

내 애플워치 달리기 앱에 기록된 10km 기록은 40분 51초. 심지어 내 개인 최고 기록(PR)이라고 했다.

공식 기록과 14분의 차이.

달리기 앱에 저장된 거리는 13.26km.

앱과 실제 뛴 거리의 차이인 3.26km만큼 내 달리기 기록은 뻥튀기돼 있었다.

연습 때 10km를 달렸으면 실제 7~8km밖에 달리지 않은 셈이니 난 이날 대회에서 처음으로 10km를 뛴 것이었다.


예전 난, 거리에서 땀 뻘뻘 흘리며 달리는 사람을 바보라고 생각했다.

무슨 마라톤 대회랍시고 돈 내고 달리는 사람은 바보 중에 바보라고 생각했다.

그랬던 내가 돈 내고 땀 뻘뻘 흘리며 달릴 줄 몰랐다.

스톡홀름 마라톤 대회 모습 (사진=Dagens Nyheter)

스웨덴 스톡홀름에 와서 놀란 것 중 하나는 가까이 있는 자연이었고 또 하나는 그 자연 속에서 달리는 사람이 많은 거였다.

이 사람들 도대체 왜 뛰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한번 뛰어봤다.

쿵스홀멘 하프 마라톤 대회 10km 코스. 내 인생 첫 마라톤 대회였다.

대회 한 달 전부터 뛰기 시작해 몸을 만든다는 거창한 계획이었다.

역시 쉽지 않았다. 3분 정도 뛰었는데도 숨은 가쁘고 다리는 무겁고.

아 괜히 신청했나, 취소할까. 알아보니 또 환불 불가였다.

나같이 마음이 병약한 사람이 많아서인지 양도는 되는데 환불은 안 된다고 했다.

첫 마라톤 대회 번호표와 기념품으로 받은 티셔츠

어쩔 수 없이 매일 조금씩 거리를 늘리며 뛰었다.

아내도 같이 뛰었다.

뛸 땐 심장이 터질 것 같고 죽도록 힘든데 뛰고 나면 너무 상쾌했다.

스톡홀름의 아름다운 풍광을 보면서 뛰는 것도 즐겁고 행복했다.

주로 저녁에 강변을 뛰었는데 매일 바뀌는 노을빛이 오묘했다.

스톡홀름 시민들이 왜 뛰는지 조금 알 것 같았다.

매일 뛰니까 몸이 적응됐는지 익숙해졌다.

랩타임도 조금씩 단축되자 뛰는 게 재미있어졌다.

20~30분 정도 몸이 달리기에 익숙해지면 더는 힘들지 않는 '러너스 하이'(runners high)를 조금 느껴보기도 했다.

실제 러닝 거리보다 긴 거리를 기록하는 '뻥 워치'인 줄 몰랐던 나의 목표는 야무지게도 초보 러너에겐 과분한 45분이었다.

비록 과대평가된 내 실력이 첫 출전에 들통나긴 했지만 대회만이 주는 설렘, 행복 같은 것이 있었다.

10km를 한 번도 쉬지 않고 달렸고 뭔가 해냈다는 성취감이 솟았다.


한 번만 뛰어볼 요량이었으나 어느 순간 난 한 달 뒤 두 번째 10km 마라톤 대회까지 신청하고 있었다.

이번엔 아내와 함께였다. 좋은 건 같이 해야 한다.

남은 한 달 열심히 뛰자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첫 대회 때보다 연습을 더 못했다.


6월 20일 오후 7시 30분 STHLM 10 대회를 다리에 쥐가 나도록 뛰었다.(해가 길어져 대낮같이 밝은 밤에 대회가 시작됐다)

나의 두 번째 공식 기록은 첫 대회보다 못한 54분 57초. 54분대에 간신히 턱걸이했다.

이번엔 달리기 앱 대신 애플워치 자체 앱을 사용했지만 역시 큰 차이가 있었다.

실제 달린 거리는 10km인데 13.47km를 뛴 것으로 기록돼 있었다.

GPS 신호에 문제가 있는 건지, 워치 자체 문제인지 모르겠지만 이날은 아예 워치를 안 보고 달렸다.

열심히 뛰고 받은 완주 메달

아내는 첫 출전에 1시간 13초로 안타깝게 1시간 언더 기록을 놓쳤지만 자신감을 얻은 표정이었다.

다음엔 하프 20km도 한번 뛰어보고 싶다고 했다.

10km도 한없이 멀게만 느껴졌는데 완주하고 나니 다음 목표가 보였다.

다들 그렇게 달리는 맛에 빠지는 것이겠지.


한 번 뛰어보니 42.195km 풀코스를 2시간 초반대에 뛰는 마라톤 선수들이 얼마나 괴물인지 알 수 있었다.

난 1km를 5분 30초 정도로 달리는 기록인데 정상급 마라톤 선수는 1km를 3분 안팎으로 달렸다.

현 세계 마라톤계 일인자 킵초게의 경우 2시간 동안 100m를 평균 17초대에 달리는 어마어마한 속도다.

2022년 스톡홀름 마라톤 대회 (사진=Dagens Nyheter)

스톡홀름은 마라톤의 도시라고 할 만큼 대회가 많았다.

1년 중 19개의 마라톤 대회가 열렸다.

10km, 하프, 풀코스, 트레일 러닝 등 종류도 다양했다.

2월, 7월, 12월을 빼곤 매달 적게는 하나에서 많게는 네 번의 대회가 열렸다.

2019년 기준 스웨덴 전역에서 1년에 400개 이상의 달리기 대회가 있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대회는 6월에 열리는 스톡홀름 마라톤이었다.

비록 세계 3대 마라톤 대회는 아니고 최정상급 선수가 출전하진 않지만 나름 지명도가 있는 대회였다.

메인 스폰서가 아디다스인 이 대회는 3월 10km, 4월 하프에 이어 6월 풀코스로 규모가 점점 커졌다.

6월 3일 풀코스 대회엔 1만5천명 이상이 참가했다.

특히 이 대회는 강과 섬으로 이어진 스톡홀름 전역의 아름다운 코스를 달리다가 1912년 스톡홀름 올림픽이 열린 스타디움에 마련된 결승선을 통과하게 돼 의미가 있었다.

마라톤 대회가 열리는 날은 도심이 거대한 축제장으로 변했다.

스톡홀름 미니 마라톤 대회 출발

스톡홀름 마라톤 대회가 성인행사라면 다음 날엔 어린이 뜀박질 축제인 미니 마라톤 대회가 열린다.

5~8세는 1,200m, 9세부터 14세까지 2,256m를 뛴다.

0~4세는 부모와 함께 250m를 달리는 코스도 있다.

완주자는 메달과 스포츠가방, 아이스크림, 음료수 등을 받는다.

인근 외스터말름 운동장에서 시작해 올림픽 스타디움으로 들어오는 코스를 뛰는 어린이들은 마치 올림픽 마라톤 대회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다.

'결승선이 코앞이다' 스톡홀름 스타디움으로 진입

'중요한 건 먼저 오는 것이 아니라 재미있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이라는 미니 마라톤 슬로건이 기억에 남았다.

각 연령대마다 1~5위는 실제 포디움에 올라 시상하는 기쁨을 누리기도 했다.

삼남매는 모두 이번 대회에 참여해 슬로건처럼 재미있게 달린 뒤 완주자만이 맛볼 수 있는 아이스크림을 받았다.

나랑 같이 달린 막내와 달리 첫째 둘째는 2,256m를 홀로 달렸는데 올림픽 스타디움으로 진입해 결승선에 들어오는 모습을 보는데 갑자기 울컥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을 훔쳤다.

순위도, 기록도 중요하지 않았다. 혼자만의 레이스를 이겨낸 아이들이 그저 대견할 뿐이었다.

왜 마라톤이 올림픽 가장 마지막에 열리는 경기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어린이와 성인 대회의 결승선이 똑같다

스웨덴에 세계적인 마라톤 선수는 없다.

하지만 아마추어들은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정말 잘 달렸다.

예전 한 블로거가 동아마라톤대회 10km 참가자 기록을 분석한 걸 본 적 있는데 1시간 내에만 들어오면 평균 기록이었다.

나의 10km 마라톤 기록은 두 번 모두 54분대였는데 첫 대회 때는 924명 중 60.38%인 558등, 두 번째 대회 때는 850명 중 66.82%인 568등이었다.

50~51분대 대회 평균에도 미치지 못하는 기록이었다.

스웨덴에서 약 1천개 육상 협회에 60만명의 회원이 소속돼 있다.

스웨덴 최대 규모의 운동 이벤트 주최사인 marathongruppen에 따르면 스웨덴 국민의 약 40%인 400만명이 달리는 걸 즐기며 이중 절반이 마라톤 대회에 참가한다고 한다.

생활체육으로써 무려 10명 중 4명이 달리는 스웨덴 마라톤 저변은 아주 넓은 듯했다.


아내와 나는 스웨덴에서는 물론 한국에 돌아가서도 쉬엄쉬엄 달리기를 계속하기로 했다.

꿈도 하나 생겼다.

언젠가 스톡홀름 마라톤 대회 풀코스를 뛰어보고 싶다고.

더 잘 달리기 위해선 내 '뻥연비' 워치의 대안을 찾을 필요가 있었다.

"여보, 가민(Garmin)이라고 아주 정확한 달리기 시계가 있다던데..."

짝~ 등짝 스매싱 한 대 시원하게 맞았다.

워치가 인식한 거리와 실제 달린 거리가 왜 이렇게 차이 나는 건지 해결책을 계속 찾아봐야겠다.

누구 아시는 분 없나요?

이전 07화 자전거 탄 스웨덴 여성이 우아한 이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