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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나동 Jun 06. 2023

3만 축구팬 무단 도로점거에 교통 올스톱

2022년 8월 스웨덴 축구 알스벤스칸(Allsvenskan) 리그 함마비(Hammarby) IF의 홈경기를 본 적이 있다.

그때 함마비 팬들의 열정적인 응원과 매너에 상당히 매료됐었다.

스웨덴 알스벤스칸 리그가 긴 겨울을 보내고 2023년 4월 다시 개막했다.

개막 전날 함마비IF 팬들이 쇠데르말름에서 경기장까지 행진하기 때문에 심각한 교통체증이 우려된다는 기사를 봤다.

축구팬들이 행진해 교통체증이 우려된다고? 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다.

지하철에서 만난 녹색 머플러를 두른 함마비IF 팬

개막전 당일 지하철에서 우연히 녹색 머플러를 두른 함마비 팬을 보고 전날 기사가 떠올랐다.

얼마나 많은 팬들이 행진하길래 교통체증까지 유발하는 건지 호기심이 생겼다.

하지만 '별일 있겠어'라는 생각에 굳이 가지 않았다.

이날 오후 함마비 팬들의 개막 행진 기사를 보고 뒤늦게 후회했다. 대단한 볼거리 하나를 놓친 셈이었다.

기사에 따르면 함마비 팬들은 홈 개막전을 앞두고 쇠데르말름에 모여 경기가 열리는 텔레2아레나(Tele2Arena)까지 행진하는 전통이 있다.

이걸 바이엔마르션(Bajenmarschen)이라고 부른다.

함마비 서포터스인 바이엔(Bajen)과 행진(marschen)을 합친 말이다.

코로나로 행진이 취소된 2020년을 빼놓고 25년째 이어지는 팬들만의 행사라고 한다.

4월 2일 쇠데르말름을 가득 메운 함마비IF 팬들 (사진=Dagens Nyheter)

팬들은 Medborgarplatsen 지하철 역 부근에서 굴마르스프란역을 거쳐 텔레2아레나까지 약 3km를 걸어간다.

공식조직자도 경찰 허가도 없는 비공식 행사이지만 개막전을 앞둔 팬들의 흥겨운 의식이었다.

약간 쌀쌀한 날씨에도 많은 팬들이 저마다 함마비의 상징색인 녹색과 흰색이 섞인 머플러 등을 착용하고 함마비 클럽의 깃발을 든 채 쇠데르말름 거리를 통째로 점령했다.

이날 함마비 개막전의 공식 입장 관객이 3만941명이었으니 거리행진에 참여한 사람만 대충 2만명이 넘지 않았을까 싶다.

이들은 대로를 꽉 메운 채 응원가를 부르고 응원 구호도 외치면서 경기장으로 향했다.

행진에 참여한 함마비 팬들 (사진=Dagens Nyheter)

남녀노소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고 어린아이를 목마 태우고 걷는 모습도 기사에 나와 있었다.

흥에 겨운 일부 팬들은 연막탄도 터트렸다.

팬들은 기념사진을 찍으며 홈팀 개막을 축하했다.

일부 남성들은 굴마르스프란 역으로 가는 다리에서 단체로 줄지어 소변을 보기도 했다고 한다.

분명 추태지만 약간의 일탈이 허용되는 축제였다.

경찰은 드론까지 띄워 행진 상황을 예의주시했지만 별다른 불상사는 없었다.


세계 많은 나라에 축구 리그가 있지만 함마비 팬들의 이런 개막 행진은 좀처럼 보기 어려운 행사다.

스웨덴에서는 함마비IF 외에 몇몇 팀이 비슷한 전통이 있다고 한다.

축구팬뿐 아니라 많은 시민이 이 행진 대열을 구경하러 쇠데르말름에 모인다.

남녀노소 다양한 팬들이 참여한 행진 (사진=Dagens Nyheter)

이 행진이 처음부터 용인된 건 아니었다.

현지 언론과 인터뷰한 참가자는 "처음에는 많은 저항이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시민사회가) 허용됐다"고 말했다.

축구팬들이 스톡홀름 중심 도로를 막고 무려 3km를 걸어가는데 교통체증이 불 보듯 뻔한 일이었을 테지만 시민들은 처음에는 반발하다가 차츰 용인했다는 설명이었다.

하지만 연례행사처럼 반복되는 행진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다.

지난해 한 페미니스트 프로파일러인 시시 월린(Cissi Wallin)은 이 행진을 두고 "집단 폭력이며 '남자들이 아기가 되는 이 날'이 사회에 어떤 대가를 치르게 할지 궁금하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아닌 게 아니라 이들의 행진으로 쇠데르말름에서 경기장이 있는 글로벤 역까지 1~2시간 정도 차량흐름이 완전히 멈췄다.

시시 월린이 말한 집단 폭력이라는 시각에서 보면 이 행진으로 인해 심각한 교통정체가 발생하고 일부 팬들의 노상방뇨로 지역사회에 끼친 악영향이 더 컸을 것 같다.

이와 반대 입장에서 개막 전 팬들 스스로 만든 행진을 하나의 축제와 전통으로 보자는 시각도 있는 것 같았다.

신난 함마비IF 팬들 (사진=Dagens Nyheter)

이런 함마비 팬들의 개막 행진 이면에는 충성심 높은 팬과 세계 여느 축구 리그와는 다른 스웨덴 축구의 특별함이 있었다.

스웨덴 축구 구단과 축구협회는 의사결정 과정에서 팬들과 서포터스 의견을 많이 고려하고 어떤 경우에는 전적으로 반영한다고 한다.

이 때문에 팬들이 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스웨덴 축구에서는 세계 축구계의 대세가 된 비디오 판독(VAR)이 아직 없다.

심판 판정 실수도 축구의 일부이며 비디오 판독이 게임 흐름과 흥미를 떨어트린다고 보는 시각이 아직 지배적이다.

반면 일부 팬들이 원하기 때문에 금지된 행위이긴 하지만 관중석에서 폭죽이 터지기도 한다.

2023년 5월 말 경기에서 AIK 축구팬들이 폭죽을 운동장까지 던지는 바람에 경기가 한 시간가량 중단됐다가 재개되는 일도 있었다. 폭죽을 던져 경기를 방해한 관중들은 몇 개월간 경기장 출입금지 징계를 받았다.

스웨덴 축구에선 팬들과 서포터스의 위상이 높고 경찰은 폭력사태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보다 한 발 물러나서 바라본다.

대신 구단이 질서를 유지하고 서포터스는 폭력행위 근절 등 책임을 나눠지는 형태다.

이를 두고 한 스웨덴 기자는 "마치 선생님이 잠시 자리를 비우고 학생들이 나머지 수업 시간 동안 혼자 자기 주도 수업을 하는 것과 같다"고 논평했다.

팬과 서포터스의 자율성이 커지는 동시에 큰 책임도 뒤따른다는 논리다.

함마비IF 개막전이 열린 텔레2아레나 (사진=Dagens Nyheter)

이런 팬과 서포터스를 중시하는 스웨덴 축구 근간은 바로 '51% 규칙'에 있다.

이 규칙은 구단 지분의 51%를 회원이 소유해 어떤 개인이나 회사가 팬들의 동의 없이 구단을 완전히 사들일 수 없는 것을 말한다.

재미있는 점은 이 51% 규칙은 스웨덴 스포츠 연맹 정관에 명시돼 있다는 것이다.

축구뿐 아니라 아이스하키 등 다른 종목도 51% 규칙을 적용받는다.


함마비IF의 경우 함마비IF 축구협회가 함마비IF 클럽의 의결권 51.24%, 자본 지분 34.41%를 소유한다.

나머지 의결권과 자본은 AEG Sweden AB라는 외부 회사와 5명의 투자자가 가진다.

회원으로 구성된 축구협회가 다수 의결권을 가지고 있는 구조다.

2023년 은퇴를 선언한 스웨덴의 유명 축구선수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는 2020년 AEG Sweden AB 지분의 절반을 사들여 이 회사의 공동 소유주가 됐다.

재미있는 건 말뫼IF 출신인 즐라탄이 함마비IF의 지분을 사서 말뫼 축구팬들의 많은 비난을 받았다는 점이다.

즐라탄은 함마비의 열정적인 서포터스와 클럽 운영에 감동받아 일부 지분을 샀다고 했는데 정작 함마비 팬들 사이에서는 찬반이 엇갈린다.

영향력 있는 인사의 입김이 클럽 운영에 작용하지 않을까 우려하는 시선도 있다.

함마비IF의 의결권 지분 구조 (사진=www.hammarbyfotboll.se)

전 세계 나라 중 축구에서 51% 규칙이 있는 나라는 스웨덴 알스벤스칸 리그와 독일 분데스리가뿐이다.

이 때문에 스웨덴 축구에서는 석유재벌이 맨시티나 뉴캐슬 등 몇몇 구단을 인수한 영국 프리미어리그 같은 사례를 볼 수 없다.

막대한 자본을 무기로 유명 선수를 대거 사들여 단기간에 좋은 성적을 내고 유럽 챔피언스리그 우승까지 노리는 그런 풍경들 말이다.


예전 유튜브에서 독일 분데스리가 도르트문트 클럽 관계자가 한 말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우린 오일머니 같은 대형자본의 뒷받침은 없다. 우리 신념은 스타를 사지 않고 단지 선수를 육성할 뿐이다."

그 말이 멋지다고 생각했는데 '51% 규칙'이라는 배경에서 보니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됐다.

도르트문트는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활약하던 홀란드를 영입해 키운 뒤 지난해 영국 프리미어리그(EPL) 맨체스터 시티로 이적시켰다.

이적료 총액은 1400억원 이상을 받고 영국 프리미어리그로 간 홀란드는 2022~2023년 시즌 36골, 2023~2024년 시즌 27골로 EPL 두 시즌 연속 득점왕에 올랐다.

지난해 바이엔마르션(Bajenmarschen) 모습 (사진=Dagens Nyheter)

그렇지만 스웨덴 축구에서 '51% 규칙'은 위협받고 있다.

벌써 수차례 '51% 규칙'이 완화되거나 없어져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돼 스웨덴 축구계에서 열띤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폐지 주장 근거로 축구 클럽에 큰 자본을 투자하려는 투자자 의지를 억제하고 이 때문에 스웨덴 축구가 유럽에서 뒤처지는 것은 물론 챔피언스리그 등에서 경쟁력이 떨어지는 원인으로 작용한다는 것이었다.

반면 이 규칙이 존속해야 한다는 측은 클럽 민주주의로 클럽이 안정적으로 운영될 수 있고 민영화했을 때 산업적인 관점에서 클럽이 운영돼 클럽 이름이나 연고지 변경, 클럽 매각이나 폐쇄 등 최악의 상황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논쟁은 현재진행형이다.


스웨덴에서 스포츠를 바라보는 관점에 대한 논란도 있다.

세계에서 가장 안정적인 민주주의를 일궈온 스웨덴에서 스포츠는 대중적으로 육성돼 왔다.

축구에서 경쟁은 결코 완전히 공정할 수는 없지만 구단과 협회의 능력이 아닌 자본을 투자하는 외부인을 기반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아직 스웨덴 축구계에서 설득력을 얻고 있다.

지난해 바이엔마르션(Bajenmarschen) 모습 (사진=Dagens Nyheter)

스웨덴 축구팬들은 알스벤스칸 리그 축구 클럽이 회원 소유여야 한다는 51% 규칙을 유지하기 위해 싸웠고 이를 지키는 데 성공했다.

이들은 자신의 축구 클럽이 외부 자본의 투자로 글로벌 브랜드가 되고 우수한 선수가 많이 영입돼 클럽대항전 등에서 좋은 성적을 내는 것보다 팬과 서포터스의 의견을 듣고 반영하는 축구팀을 더 원하는 것 같다.

다수의 스웨덴 축구팬이 '축구 민주주의'를 선택한 셈이다.


언론과 인터뷰한 함마비 IF의 한 팬은 "축구 경기가 열리기 전 항상 15~20명으로 구성된 그룹과 만난 뒤 경기장으로 가는데 그때가 모든 유형의 사람들과 진정으로 교류하는 유일한 시간"이라며 축구의 의미를 말했다.

그는 "축구가 나에게 사람과의 교류를 제공하고 삶과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야기하며 의견을 나누는 기쁨을 준다. 오히려 축구 때문에 소셜미디어를 더 멀리하게 된다"고도 덧붙였다.

스웨덴 민족학자인 Katarzyna Herd는 "축구는 승패를 비롯해 개인, 가족, 그곳에 있었던 모든 사람 등 집단적 기억의 장소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함마비IF 홈경기장인 텔레2아레나 (사진=Dagens Nyheter)

축구를 승패의 스포츠로 바라본다면 리그 우승과 유럽챔피언스리그에서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것이 최고일 수 있다.

하지만 집단적 기억을 공유하는 사람들과의 교류라는 측면에서 보면 세계에서 축구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은 스웨덴 축구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2023년 4월 2일 함마비 축구팬들의 거리 행진은 스웨덴 축구 클럽과 팬들의 오랜 믿음, 스웨덴 사회의 관용이 어우러진 결과물로 다가왔다.

좀 오래된 기사이긴 하지만 영국 가디언지는 2009년 유럽 축구 리그 중 손익분기점을 넘은 4개 리그를 꼽았는데 독일과 스웨덴, 오스트리아와 벨기에였다.

51% 규칙을 확고히 지키는 두 국가의 축구리그가 외부 자본 없이도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였다.

인구 1천만명의 작은 국가인 스웨덴 프로축구에서 관중으로 가득 찬 경기장 모습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스웨덴 알스벤스칸 리그를 영국 EPL,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이탈리아 세리에 A에 훨씬 못 미치는 세계 축구계의 변방이라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51% 법칙과 그걸 지키려는 축구팬의 노력을 알고 난 뒤 스웨덴 축구는 이전과 달라 보였다.

세계 최고 수준의 축구팬들이 앞으로도 자신들만의 축구 민주주의를 일궈 나가고 함마비팬들의 개막 행진 전통도 앞으로 계속되길 바란다.

4월 2일 굴마르스프란으로 연결되는 다리를 건너는 함마비IF 팬들 (사진=www.bajenfans.se)


# Dagens Nyheter, www.bajenfans.se, www.hammarbyfotboll.se 등을 참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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