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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나동 Jun 25. 2023

스웨덴에서 한국 폐지노인을 떠올렸다

그날이 왔다.

'아직 때가 아니야'라고 생각하다가 어느 순간 한계치를 넘어섰다.

커다란 마트 백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많아진 캔을 팔아넘기기로 했다.

이것들을 일렬종대로 헤쳐 모여 시켰더니 맥주 캔이 47개, 탄산수 캔 6개, 음료수 캔 2개, 페트병 3개이었다.

마트백 2개에 나눠 담아 리들(LIDL)로 향했다.

참고로 스웨덴에서는 어느 정도 점포를 가진 마트는 리들 외에 쿱(COOP), 햄솁(Hemköp), 이카(ICA) 등이 있다.

이 중 스웨덴 마트인 이카가 가장 큰 시장 점유율을 가지고 있었고 가격적으로는 리들이, 고르는 재미가 있는 마트는 쿱, 이카였다.

일렬종대로 헤쳐 모인 알루미늄 캔

재활용 캔, 페트병 수거기를 사용할 때마다 무척 기분이 좋아 은근히 이날이 기다려졌다.

캔은 1크로나, 조금 큰 페트병은 2크로나씩 돌려받았다.

캔이 수거기 구멍으로 들어가 분류돼 떨어지는 소리가 경쾌했다.

삼남매한테도 이런 산뜻하고 청량한 기분을 경험하게 해 주려고 함께 서로 캔을 넣겠다고 아우성이었다.

마트마다 이런 수거기는 꼭 있었고, 캔이나 페트병 구매 마트가 달라도 상관없었다.

캔, 페트병 무인수거기

뭔가 지구에 도움이 되는 일을 했다는 자부심도 +1 정도 올라간 느낌이었다.

열심히 캔과 페트병을 집어넣고 받은 금액은 62크로나(약 7천500원)였다.

현금으로 주지 않고 마트에서 물건을 살 수 있는 영수증으로 돌려줬다.

그 돈이면 1Kg짜리 쌀 3개를 살 수 있었다.

캔 57개, 페트병 3개 보증금 62크로나 회수. 왼쪽 버튼을 누르면 기부도 할 수 있다

유럽에 여행 오는 한국인들이 한국에서도 벤치마킹 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대표적인 것이 캔, 페트병 재활용 제도다.

우리나라도 유사한 제도를 도입했지만 아직 활성화되지는 않은 거 같다.

스웨덴의 재활용 수거제도와 비교하면 몇 가지 차이가 있다.

스웨덴은 캔과 페트병에 담긴 음료를 살 때 1~2크로나의 보증금을 추가로 냈다.

코카콜라 330ml 1개 원래 가격이 7크로나라면 1크로나의 보증금을 더한 8크로나를 내는 셈이었다.

처음엔 보증금을 추가로 낸다는 사실을 몰라 맥주캔 가격을 잘못 본 건지 점원이 잘못 계산한 건지 헷갈리기도 했다.

이 보증금이 캔 1~2개 살 땐 별거 아닌 거 같아도 6개짜리 맥주캔 번들을 사면 6크로나(약 700~800원)가 추가로 붙으니 제법 컸다.

한국도 공병 보증금 제도를 시행하고 있으나 보증금을 아예 가격에 포함시켜 판매하니 보증금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다.

스웨덴에서는 캔에 든 맥주, 탄산음료를 사면 영수증에 원래 값에다 캔 보증금이 별도로 명기돼 나온다.

애초 가격에 포함시킨 것이나 추가로 덧붙이는 것이나 사실 조삼모사 같지만, 구매자 입장에서는 보증금 명목으로 돈을 더 냈다고 생각하게 해 돌려받겠다는 의지가 한층 불타오른다.

맥주 6개 번들 가격에 붙은 보증금 6크로나(빨간색 네모)

한국은 공병을 재활용하는 무인회수기를 운영 중인데 전국적으로 개수가 많이 없다.

자원순환보증금관리센터 홈페이지를 보니 올해 6월 현재 전국 146개다.

서울과 경기도에 각각 38개, 43개가 있고 나머지 지역은 아직 보급이 많이 안 돼 있다.

공병 무인회수기가 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이 수두룩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무거운 병을 싸들고 무인회수기를 찾아가느니 그냥 아파트 재활용 수거함에 넣는 게 차라리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을 거 같다.

스웨덴은 어느 마트를 가든 캔, 페트병 무인회수기가 있어 주로 평소 이용하는 마트에서 보증금을 영수증 형태로 쉽게 돌려받을 수 있다.

한국에서 공병 보증금 제도에 더해 캔과 페트병 보증금 회수제도를 추가 도입하면 재활용률이 더 좋아지지 않을까 생각했다.


스웨덴엔 거리 곳곳에 쓰레기통이 아주 많았다.

버스 정류소나 지하철 승강장에서 멀쩡하게 생긴 사람이 쓰레기통을 쓰윽 살피곤 안에 있는 캔을 집어 가는 모습을 자주 봤다.

마트백 같은 것을 들고 전문적으로(?) 수거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냥 잠바 주머니에 넣어가는 경우도 봤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가만 보니 돈이 되겠다 싶었다.

그들처럼 일부러 수거하지는 않았지만 밖에서 산 캔이나 페트병을 집으로 가져오는 습관은 생겼다.

캔, 페트병 수거기에 넣고 돌려받은 보증금 62크로나. 사실 내가 낸 돈이지만 공짜 돈인 듯한 착각이 든다.

한국에서 캔, 페트병 보증금 회수제가 시행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또 있었다.

연세가 많은 분이 쓰레기통 내부에 있던 캔을 들고 가는 걸 보다가 한국의 폐지 줍는 노인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코로나 전 kg당 100원을 넘던 폐지가격이 코로나 이후 kg당 70~80원대까지 떨어졌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었다. 코로나 이후에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았다.

하루 종일 폐지를 주워도 식당에서 밥 한 끼 사 먹지도 못하는 형편이었다.

무거운 리어카를 끌면서 폐지를 모으다가 다치거나 심지어 교통사고를 당하는 노인도 있었다.

푼돈 벌려다가 골병들고 치료비가 더 나가는 경우였다.

노인기초연금 만으론 생활비가 빠듯해 어쩔 수 없이 거리로 나와야 하는 노인이 많은 게 현실이다.

캔, 페트병 보증금 제도를 시행한다면 노인들이 힘들게 수거해도 돈 안 되는 폐지보다 캔이나 페트병을 모으려 하지 않을까.

폐지 100kg 수거해 받은 돈이 8천원이라면 보증금 100원인 캔 80개만 수거하면 된다. 부피나 무게도 훨씬 줄어든다.

많은 폐지노인들이 캔, 페트병 수거로 전환하고 덩달아 재활용률도 높아지지 않을까. 물론 경쟁이 치열해지지 않을지 걱정은 살짝 되지만 말이다.

노인들이 거리로 내몰리는 상황에 대한 국가적 고민이 필요한 것과 별개로 실행가능성 차원에서 캔, 페트병 유상 수거 시스템은 우선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혼자만의 상상을 해봤다.

리어카에 폐지를 가득 싣고 가는 노인 (사진=연합뉴스)

스웨덴은 1984년부터 알루미늄 캔, 1994년부터 플라스틱 병 보증금 제도(pant system)를 시행 중이었다.

이렇게 수거돼 재활용되는 병과 캔은 매년 20억개 이상이라고 했다.

2019년에는 21억5천만개 이상이 수거돼 최고 기록을 세웠다.

스웨덴 환경보호국(EPA)에 따르면 2020년 판매된 페트병의 86%, 알루미늄 캔의 87%가 재활용됐다.

2023년 기준 스웨덴 정부의 페트병, 캔 재활용률 목표는 90%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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