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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나동 Jun 03. 2023

전투경찰 없는 스웨덴 노동절

지난 5월 1일은 노동절이었다.

메이데이(May day)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 곳곳에서 노동절 집회나 시위가 벌어졌다.

스웨덴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국에서 맞벌이 노동자 부부였던 나와 아내는 스웨덴 노동절 행진에 참가해 보기로 했다.

사회민주주의 국가의 노동절 행사는 어떨지 궁금했다.

5월 1일 스톡홀름에서 열린 좌파당 노동절 행사 계획 (사진=좌파당 홈페이지)

스톡홀름에선 좌파당(Vansterpartiet)이 주최하는 거리 행진과 행사가 열렸다.

한국에서 좌파는 곧 빨갱이라는 등식이 성립되곤 하는 무시무시한 색깔론 단어 중 하나지만 스웨덴에선 그 존재를 인정받는 하나의 어엿한 정당이었다.

좌파당은 지난해 총선에서 스웨덴 의회 총 349석 중 6.8%가량인 24석을 얻었다.(8개 정당 중 중앙당과 함께 4번째로 많은 의석을 가진 정당이다)

이전 사민당 중심의 좌파 연립정부를 구성한 정당이었다.

당 대표는 37세 여성 누시 다고스타(Nooshi Dadgostar)다.

좌파당은 민주주의 평등 연대에 기초한 사회, 계급 성별 인종적 억압이 없는 사회, 여성과 남성이 자유롭게 자신의 미래를 건설하는 공정하고 생태학적으로 지속 가능한 사회를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홈페이지에 나와 있다.

Medborgarplatsen 지하철역 주변에 모여 노동절 행진을 준비하는 스톡홀름 시민들

좌파당은 스스로를 생태학적 기반의 사회주의자이자 페미니스트 정당이라고 일컫는다.

역사적으로 사회주의 이념이 퇴물 취급을 받은 지 오래지만 스웨덴 좌파당은 현 사회를 부르주아를 상대로 한 노동자의 계급투쟁으로 보는 사회주의적 인식만큼은 유지하고 있었다.

좌파당의 정치적 색깔과는 별개로 스톡홀름에서는 좌파당의 노동절 거리 행진과 행사밖에 열리지 않았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슬루센으로 가는 Götgatan 거리를 메운 행진 대열

Medborgarplatsen 지하철역에 내리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거리를 꽉 메우고 있었다.

이미 인근 광장에서 식전 행사가 끝난 상태였고 거리 행진이 막 시작되고 있었다.

이곳에서 감라스탄을 거쳐 약 2.2km를 걸어간 뒤 왕의정원(Kungsträdgården)에서 본행사를 하는 일정이었다.

좌파당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시한부 이민자, 한국 노동자 신분이지만 대열에 슬그머니 동참했다.

노동절만큼은 칼 마르크스가 말한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문구가 현실이 될 테니까.

좌파당 행진에 참여한 한 시민이 개를 안고 있다. 개는 좌파당의 상징색인 붉은색 머플러를 둘렀다

군중들은 행렬에 끼어든 낯선 외모의 우리에게 별다른 시선을 보내지 않았다.

좌파당 당원이나 지지자들로 보이는 사람도 있었지만 나같이 평범한 이들도 많은 듯했다.

개와 함께 걷거나 유모차를 끄는 사람, 아이들과 손잡고 걷는 가족 모습도 보였다.

부슬비가 내렸지만 매우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간간이 무슨 내용인지 모를 구호를 외치기도 했지만 그걸 따라 하지 않아도 아무런 거부감이 없었다.

행진 대열이 이끄는 대로 몸을 맡겼다.

노동절 행진에 참여한 많은 시민들

지난해 총선에서 우파 연립정부를 구성한 보수당, 스웨덴민주당, 기독민주당, 자유당의 정치적 합의인 Tidö 협정을 폐기하라는 'RIV Tidöavtalet' 손 팻말이 많이 보였다.

이민이나 복지정책 축소 등의 내용을 담은 Tidö 협정에 대해 인종 차별적이고 불평등하며 기후 활동을 위협한다는 지적이 많다.

연금 인상이나 얼마 전 통근열차 기관사들의 파업 이유였던 승무원제를 유지하라는 구호도 보였다.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진행된 노동절 행진. 슬루센에서 스웨덴 의회 방면으로 이어지는 도로.

길가에서 행진을 구경하는 이들도 많았다.

평소 같았으면 나도 행진을 관찰하는 시선이었겠지만 이 날만큼은 대열 속에서 느껴보고 싶었다.

행진 대열과 인도에 서 있는 이들의 심리적 거리가 많이 떨어져 있지 않다고 느꼈다.

행진 중 경찰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슬루센(Slussen)을 지났을 무렵 행진 대열에 막힌 차량 중 한 대가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이 답답했는지 경적을 한번 크게 울리기도 했다.

노동절 행진 대열과 이를 지켜보는 시민들

사전에 노동절 행사로 인해 이 일대 버스 운행이 중단될 것이라는 언론보도와 스톡홀름 대중교통 회사인 SL의 공지가 있었다.

이 사실을 모르고 행진과 맞닥뜨린 차들이 급히 방향을 돌리는 모습도 보였다.

뒤를 돌아보니 제법 행렬이 길었다. 주최 측이 밝힌 이날 행진 참여자는 9천여명이었다.

왕의정원에 도착하니 이미 무대가 설치돼 있었고 행사가 곧 시작했다.

아이와 함께 노동절 행사 관람하는 부모

본행사는 축하공연, 연설의 반복이었지만 축제 같은 분위기였다.

비가 왔음에도 많은 이들이 자리를 지켰다.

한 연사는 "자본주의가 위기에 처하면 자본가는 희생양과 더 많은 인종차별 정책, 수사학을 필요로 한다. 그들은 우리를 분열시키려 한다. 우리는 인종차별과 비인간적인 정책에 반대한다. 나토 가입을 두고 스웨덴과 다른 국가(터키)와 관계가 악화하면 터키와 무장 투쟁을 하는 쿠르드족에 찬성하는 것이 범죄인가 아님 스웨덴 무기를 예멘 같은 나라에 판매해 피 묻은 돈을 받는 것이 범죄인가. 여성 탄압을 자행하는 이란 정권에 맞서는 이들과 연대하며 함께 싸우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이런 말들이 선언적인 구호에 불과한 것인지 좌파당의 실천에서 비롯된 것인지 솔직히 짐작할 수 없었다.

다만 스웨덴 원내정당이 주최하는 노동절 행사에서 이런 내용의 연설이 울려 퍼지고 일반 시민이 진지하게 경청하는 모습에 놀랐다.

스웨덴 국민 중 일부는 여전히 스웨덴이 중립적인 위치에서 제3세계에 대한 지원과 전쟁 반대를 외치며 세계의 양심 역할을 해야 한다며 나토 가입을 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아내와 나는 '이만하면 됐다' 싶어 행사장을 나왔다.

스톡홀름 시내는 노동절 휴일을 맞아 많은 인파로 북적댔다.

스톡홀름 왕의정원에서 열린 좌파당 노동절 본행사

한국에서 노동절 집회가 열리면 언론에서는 '대규모 노동절 행사로 도심 곳곳이 극심한 교통정체를 빚었습니다' 또는 '노동자들이 거리 행진 도중 경찰과 충돌했습니다' 등의 내용이 주를 이루는 기사를 봤던 기억이 있다.

스웨덴 언론에선 어떤 노동절 관련 기사가 나왔는지 궁금했다.


먼저 이날 열린 노동절 집회 기사가 눈에 띄었다.

노동절에 집회나 거리행진을 한 정당은 사회민주당과 좌파당뿐이었다.

막달레나 안데르손 사민당 대표는 옌셰핑에서 '스웨덴 전체를 위하여'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행진을 하며 선거공약을 지키지 않는 현 정부를 비판했다고 한다.

누시 다고스타 좌파당 대표는 말뫼에서 "정부가 현재 얼마나 많은 가정이 어려운 경제 상황에 처해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노동절, 스웨덴 옌셰핑에서 거리 행진을 하는 막달레나 안데르손 사회민주당 대표(가운데) (사진=Dagens Nyheter)

이어 지난해 총선에서 가장 많은 의석수를 얻었고 현재 지지도 1위인 현 야당 사회민주당에 대한 비판 기사도 보였다.

사민당이 나토 가입이나 원자력 발전 등의 의제에서 줏대 없이 기존 소신을 버렸고, 현 우파 연립정부의 불완전성과 막달레나 안데르손 당대표의 높은 신뢰와 인기에 기대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기사는 사회민주당이 주최하는 노동절 행진에 점점 참가자가 줄어들고 있는데 사회민주당은 정치적으로 거꾸로 가고 있다고 끝맺었다.

사회민주당은 100년 넘게 스웨덴의 가장 큰 노동조직인 LO(Landsorganisationen)와 긴밀한 협력 관계를 맺어 왔다.

말뫼에서 연설하는 누시 다고스타 좌파당 대표 (사진=좌파당 홈페이지)

노동계 파업을 바라보는 상반된 두 가지 시선이 있어 흥미롭기도 했다.

다겐스 니히터의 언론인 에릭 헬머슨은 "노동계의 급진적인 좌편향은 항상 있어왔지만 결코 옳지 않았다"며 "사회민주주의의 큰 힘은 자본으로 성공적인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적이 아니라 필요한 동맹이라는 깊은 깨달음"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스웨덴 노조는 합리적인 임금 수준을 수용하고 불필요하게 파업을 하지 않음으로써 책임감을 보여준다"며 "타협, 합의, 광범위한 개혁이 답"이라고 썼다.

물리적인 파업보다 협상과 합의로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1970~2021년 사이의 합법파업(노란색)과 불법파업(검은색) 횟수. 1990년 이후 불법파업이 급격히 감소했다 (사진=www.mi.se)

반면 롤랜드 폴센이라는 사회학자는 "사회민주당과 노동조합은 스웨덴 임금 노동자들의 무력화를 주도해왔다"고 주장했다.

2019년 사회민주당 정부가 제출해 시행된 '단체협약이 있는 직장에서의 평화의 의무'라는 법안 이후 노동자들의 파업권이 명백하게 제한됐다는 것이다.

그는 오늘날 스웨덴 노동운동에서 권력을 가진 이들은 노조 파업을 막는 것이 목표인 것처럼 변했다고 지적했다.

이어 "파업의 물결이 유럽을 휩쓸어도 스웨덴은 조용했다"며 "노동자들이 파업을 위해 힘을 사용할 때만 노동절이 진정한 휴일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롤랜드 폴센은 파업은 근로조건과 임금을 개선하는 방법이지만 본질적으로 누가 사회를 움직이는지에 대한 명확한 질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금융경제학자, 관료, 정치인, 학자 등은 결코 파업하지 않는다"며 "이는 그들이 없어도 사회가 잘 돌아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얼마 전 스톡홀름 통근열차 파업에서 보듯 기관사 70명이 파업하면 열차가 멈추고 우리 삶도 멈춘다고 말했다.

파업 횟수가 줄어든 지난 30년간 스웨덴의 불평등은 심화됐다고 덧붙였다.(위 그래프 참조)


한 언론사에서 두 가지의 의견을 모두 다루고 있었는데 어느 쪽에 동조하느냐를 떠나 재미있게 봤다.

그리고 한국에선 노조 전단에서나 볼 법한 주장을 언론사 칼럼에서 보는 것도 흥미로웠다.

스웨덴에서 최근 수십 년간 파업이 유럽 다른 나라보다 적었다는 사실과 파업 횟수가 줄어드니 불평등이 커졌다는 시각도 기억에 남았다.

세코(SEKO) 파업으로 운행에 차질이 예상되는 SJ 열차 (사진=Dagens Nyheter)

노동절 하루 뒤인 5월 2일.

사회학자 롤랜드 폴센의 글을 보기라도 한 마냥 서비스통신노조(Seko)가 철도운송 파업을 선언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파업 이유 중 하나는 업무의 급작스러운 변경으로 철도 노동자들이 정상적인 여가와 가족생활을 유지할 수 없으며 연중무휴로 일하는 직원을 위한 통합휴가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인력 부족으로 과도한 업무를 떠안은 직원에 대한 인센티브 제공과 최근 통근열차 기관사들이 파업했던 이유인 승무원제의 폐지 철회 등이 요구사안이었다.

세코는 스웨덴 열차 운영자 조직과 합의에 이르지 못하면 5월 11, 15, 18일 3단계 파업에 돌입한다는 계획이었다.

여러 지역 철도 운송 노조를 아우르는 세코가 파업에 돌입하면 스톡홀름, 말뫼, 예테보리 등 주요 도시에서의 열차나 지하철 운행이 큰 차질을 빚을 수 있었다.

우리 가족이 매일 이용하는 스톡홀름 SL 지하철 레드라인도 파업 2단계 범위 안에 들어가 막판 협상이 어떻게 될지에 관심이 갔다.

다행히 세코(Seko)와 사용자 단체인 Almega Tågföretagen이 밤샘 협상 끝에 5월 15일 오전 합의안을 발표해 파업은 철회됐다.

합의 내용은 2년간 유연 연금을 포함한 임금 총액 7.4% 인상, 최소 2주 전 업무 변경 통지, 승무원제 폐지 문제의 향후 실무그룹 논의 등이었다.

승무원제 폐지 문제 논의가 미뤄지자 기관사 일부는 합의안에 반발해 노조 탈퇴 선언을 하기도 했다.


한국 노동절에 한 건설노조 간부가 구속 전 피의자 심문을 앞두고 법원 앞에서 분신을 시도해 병원 치료 중 숨졌다는 기사를 봤다.

다른 날도 아닌 노동절에 노동자가 영장실질심사를 받아야 하고, 억울함을 호소하며 숨진 것은 참 비인간적이고 비극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서 노동절에 대한 시선, 노동자 지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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