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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나동 Jun 02. 2023

스웨덴 파업에 지옥과 천당을 오가다

2023년 4월 가족여행을 갔다가 스웨덴 스톡홀름 알란다(Arlanda) 공항으로 돌아왔다.

평소엔 알란다 공항과 스톡홀름 중앙역을 논스톱으로 연결하는 알란다 익스프레스 열차를 이용하곤 했다.

이날은 평일 낮에 도착해 시간 여유가 있는 만큼 돈을 아끼려 교통카드(SL)만을 이용해 추가 비용 없이 집에 가보자고 아내와 의기투합했다.

그게 고생의 시작인 줄 모르고 말이다.

공항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인근 Märsta역까지 이동한 뒤 통근열차(pendeltåg)로 스톡홀름 T-센트랄렌역까지 간다는 계획이었다.

Märsta역에 도착했는데 평소와는 공기가 달랐다. 뭔가 어수선하고 분주한 느낌이었다.

Märsta역에서 본 SJ 열차. 파업 사실을 까마득히 모르고 왜 사람들이 통근열차를 두고 지역 열차를 타는지 의아해했다.

개찰구를 향해 걸어가는데 갑자기 직원이 불러 세운다.

"통근열차가 다니지 않는다, 저기 보이는 노란 버스를 타고 가라, 지금 안 가면 못 탄다"는 말이었다.

버스를 못 탈 수도 있다는 생각에 캐리어 끌고 아이들 손잡고 허겁지겁 달렸다.

임시특별수송버스에 해당하는 노란 버스는 이미 만원이었다.

앞문으로 아내와 둘째 셋째, 나와 첫째는 뒷문으로 간신히 탑승할 수 있었다.

꽉 찬 버스에 서서 짐까지 있으니 죽을 맛이었다.

추울까 봐 두꺼운 옷을 입은 우리 가족은 창문마저 닫힌 만원 버스에서 이내 온몸이 땀으로 젖었다.

완연한 봄날씨에 창문을 투과한 햇볕은 마치 히터 복사열 같이 뜨거웠다.

이대로 가다간 탈진할 거 같았다.

첫째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아빠를 원망하는 레이저 눈빛을 쏘고 있었다.

찜통 같은 버스에서 아내에게 문자로 전해 들은 둘째 셋째 상황도 만만치 않았다.

둘째는 굵은 땀방울이 머리에서 뚝뚝 떨어지고 있었고 버스 앞문 계단에 서서 햇볕을 그대로 받은 막내는 덥다고 울고 불고 난리였다.

난민 버스의 상황이 이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목숨을 걸고 탈출하는 난민들 상황과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정말 1분 1초가 고역이었다.

구글맵으로 실시간 위치를 확인해 보니 스톡홀름 시내까지는 3분의 1도 가지 못한 상황이었다.

버스 탄 지 40분 정도 지났으려나 너무 덥고 힘들어 정신이 혼미해지는 사이 어느 역에 도착했고 드디어 버스 문이 열렸다.

아내는 Märsta역에서 직원에게 두 정거장을 가면 열차로 갈아탈 수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 말을 못 들은 난 이 버스가 스톡홀름 시내까지 가는 줄 알았다.

버스에서 내린 가족 모두 신선한 공기의 고마움을 느낄 수 있었다.

거의 실신 직전 구원받은 첫째는 "공항에서 기차 탔으면 됐는데 이게 무슨 고생이냐"고 쏘아댔다.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난들 이렇게 될 줄 알았나.

역에서 한참을 기다려 드디어 임시 편성된 통근열차를 탔다.

아내와 나는 '고생은 했지만 그래도 6만원 굳었다'라며 마주 보고 웃었다.

그런 우릴 첫째가 '참 독한 엄마 아빠네'라는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기관사 파업으로 운행이 중단된 통근열차 (사진=Dagens Nyheter)

이 난리 통이 벌어진 건 4월 17일부터 시작된 통근열차 파업 때문이었다.

통근열차 기관사 70여 명이 3일간 파업에 돌입해 첫날 열차 운행의 80%, 둘째 날 90%, 셋째 날 77%가 취소된 것이었다.

이 파업으로 출퇴근 시간을 비롯해 약 14만명의 시민이 큰 불편을 겪어야 했고 지각 사태가 속출했다.

평소 15분을 넘지 않던 통근열차 배차 간격은 1시간 심지어 2시간까지 늘어졌다.

특히 주변 도시에서 통근열차를 타고 스톡홀름에 출퇴근하는 시민들 불편이 상당했다.

우리 가족은 통근열차 파업 둘째 날에 아무것도 모르고 돌아와 잊을 수 없는 경험을 했다.

기관사들의 파업으로 운행을 멈춘 통근열차 (사진=Dagens Nyheter)

몇 년 전 한국에서도 지하철 파업이 있었다.

노조가 지하철 파업에 돌입하면 대체로 시민과 언론 모두 노조가 시민을 볼모로 자기 잇속을 챙긴다며 비난에 나섰다.

노조는 불리한 여론과 파업 장기화에 대한 부담 속에 사측과 타협해 파업을 철회하는 수순을 반복했다.

매년 파업 직전까지 갔다가 막판 극적 타결로 이어지는 시나리오가 이어지기도 했다.

이런 행태는 버스 등 다른 운송수단은 물론 대기업 노조 파업도 마찬가지다.

한국에서 노조 파업은 사회불평등 완화, 비정규직 개선 등 공익보다는 주로 임금인상, 복리후생 등 경제투쟁이 주를 이루다 보니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때문에 대기업 노조 등이 파업을 하면 자기 이익만을 위한 귀족노조의 파업이라는 비판이 곧잘 따라붙었다.

살기 어려운데 무슨 얼어 죽을 파업이며 임금 인상이나 하려는 파업 당장 때려치우라는 언론의 시민 인터뷰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파업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에도 불구하고 파업은 노조가 법적으로 할 수 있는 단체행동이다.

노조와 사측은 임단협을 하고 때론 파업도 하는 노사 간 대화를 대개 1년마다 반복한다.

임단협이나 파업 갈등이 매번 반복되는 것이 좀 소모적이라는 생각도 든다.

한편으론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오르는 물가에 맞춰 임금도 올라야 하지 않나 생각도 떠오른다.

다만 너만 임금 오른다고 배 아플 게 아니라 서로 다 같이 비슷하게 올린다면 다른 노조의 임금인상 파업을 백안시하는 분위기도 없어지지 않을까.

스웨덴 파업은 뭐가 다른지 들여다보고 싶었다.

통근열차 기관사들의 파업으로 열차가 오지 않자 승객들이 몰려 혼잡한 승강장 (사진=Dagens Nyheter)

이번 통근열차 파업은 열차 기관사 70여 명이 단체로 운행을 거부하면서 빚어졌다.

애초 기관사들은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3일간 운행을 멈추겠다고 대외적으로 밝힌 상태였다.

파업 이유는 무엇일까.

한 번에 1천600명을 수송할 수 있는 통근열차에는 기관사 외에 승무원 1명이 탑승한다

이 승무원은 교통장애 발생 시 안내방송을 하고 통근열차의 서비스와 안전을 책임진다.

장애인 등 승객 승하차를 돕고 객차 문 작동을 관리한다.

현재 약 350명의 승무원이 통근열차에서 일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스톡홀름 의회가 외부 용역 결과를 토대로 승무원 없이도 통근열차 운행이 가능하다고 결정했다.

CCTV를 설치하면 기관사가 열차 내외부를 감시하며 승무원 역할까지 할 수 있다는 이유였다.

올해 초까지 승무원 일부를 해고한 데 이어 3월부터 스톡홀름 통근열차의 절반이 승무원 없이 운행 중이며 9월엔 모든 열차에 승무원을 배제할 계획이다.

당연히 승무원은 이 결정에 반발하며 승무원제 유지를 주장했지만 스톡홀름 의회 교통위원회는 이를 거부한 것이 갈등의 시작이었다.

어라 그런데 이번 파업의 주체가 승무원이 아니었다. 기관사였다. 자기 일도 아닌데 왜 기관사는 파업에 나섰을까.

기관사들은 승무원이 결코 CCTV로 대체될 수 없으며 승객과 기관사 안전을 위해 승무원이 꼭 필요하다며 열차를 멈췄다.

승무원 한 사람이 승객 1천500명 이상을 관리하는 다른 유형의 교통수단이 없을 뿐더러 그나마 있는 승무원도 없애는 건 부당하다는 게 그들 설명이었다.

기관사들은 승무원 폐지 정책에 반발해 지난 3월에도 단체로 병가를 내는 등 태업으로 열차 운행을 지연시키기도 했다.

기관사들은 승무원이 없으면 자기들 근무여건이 열악해져서 그러는 것 아니냐는 의문이 당연히 들 수 있다.

물론 그런 측면도 있겠지만 승무원이 없으면 승하차 확인 등도 해야 해 열차 운행에만 집중하지 못해 열차 안전이 더 위태로워진다는 기관사들의 주장은 일리 있어 보였다.

스톡홀름 통근열차 (사진=Dagens Nyheter)

더 눈길을 끈 건 열차 기관사들이 노조와 별개로 파업을 벌였다는 사실이다.

노조가 아닌 개인 자격으로 파업을 한다고?

노조 연계 없이 단독으로 벌이는 파업을 와일드 스트라이크(wild strike)라고 한다.

노조와 사측의 쟁의 조정을 거치지 않은 불법 파업이다.

이럴 경우 기관사들은 파업으로 인한 피해에 대해 손해배상 책임을 질 수 있고 파업이 오래 지속되면 근로 거부로 해고까지 될 수 있었다.

피해를 감수하면서까지 기관사들이 파업에 나선 건 단순히 일하기 편하려는 목적만은 아닌 듯했다.

기관사들은 "우린 더 많은 임금이나 휴가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안전을 위해 파업한다"고 말했다.

파업 이틀째 되는 날, 통근열차 운영 회사인 MTR 측은 이번 파업을 불법이라고 선언하고 파업에 참여한 기관사에게 즉시 업무 복귀 명령을 내려줄 것을 노동 법원에 요청하는 것으로 맞대응했다.

이어 파업에 참여한 기관사 73명에게 손해배상 청구 소송도 제기했다.

한국 노사관계에서도 이 같은 사측의 손해배상 청구는 결국 법원 결정을 거쳐 노조원 월급, 재산 가압류로 이어지곤 하는데 노조를 무력화하는 효율적인 조치로 악용된다.

스웨덴 사측도 똑같구나 싶었고 통근열차 기관사들이 주춤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기관사들의 파업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파업을 계속하겠다고 선언했다.

"파업에 돌입하면서 48시간 만에 50만 크로나(6천400만원)를 모금하는 등 파업 자금으로 150만 크로나(1억9천350만원)가 있다"라며 "손해배상 결정을 받는다면 이 자금을 사용할 것이다"라고 했다.

모금액은 전적으로 시민들이 기부한 것으로 시민이 이번 파업을 지지하는 증거이며 우리(기관사)의 주장이 옳다는 취지였다.

스웨덴 언론에서 이번 파업을 바라보는 시민 반응도 한국 언론과는 달랐다.

한 지하철 이용객은 "아침 교통 체증으로 오늘 지각할 것이 뻔하다. 짜증은 나지만 그들이 오랫동안 무언가와 싸웠다면 그 의도를 이해한다"라고 말했다.

또 하나 재미있는 점은 이번 파업을 두고 대부분의 열차 기관사들이 소속된 산별노조 세코(SEKO)가 파업 전부터 기관사들에게 불법 행위에 가담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파업을 비판했다는 점이다.

노조원이 노조와 별개로 파업하고 노조가 노조원을 비판하는 이런 구도는 한국 노동계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풍경이다.

통근열차 승강장 (사진=Dagens Nyheter)

이는 스웨덴 사회의 임금 협상 시스템에서 기인하는 측면이 있다.

1930년대 초반 살트셰바덴 협약으로 노조, 사용자, 정치권이 양보와 타협으로 노사문제를 해결하는 근간을 만든 스웨덴은 1997년 다수의 노조와 다수의 사용자 단체가 일괄 협상을 벌여 임금 인상폭을 결정하는 '산업협정'을 체결했다.

우리로 치면 여러 산별노조가 여러 사용자단체와 일괄적인 임금 인상 협상을 벌이는 격이다.

스웨덴은 이후 25년간 이런 방식으로 임금협상을 벌여 그 결과에 노조와 사용자 단체 모두가 수긍하고 따라왔다.

이로써 사용자는 안정적인 사업 운영을, 노동자는 실질 임금 상승이라고 결과를 얻었다.

올해의 경우 5개 거대 노동조합과 다수의 사용자 단체 사이에 2년 간의 새 협약이 체결됐다.

주요 내용은 첫해에 4.1%, 두 번째 해에는 3.3%씩 급여를 인상한다는 것이다.

조합원의 근로조건에 대해 여러 고용주 단체와 다수 노조가 협상하는 스웨덴 노사 모델은 일단 단체협약이 체결되면 양측 간 평화의 의무가 있고 무분별한 파업을 자제하는 불문율이 있었다.

기관사들의 파업으로 통근열차 운행에 차질을 빚고 있다는 안내문

통근열차 기관사들이 열차의 안전 운행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이 불문율을 깨고 파업에 나섰다.

올해 기관사 노조가 속해 있는 세코(SEKO)는 별개로 사용자 단체와 임금 협상을 벌이고 있는 중인데 기관사들의 이번 단독 파업이 행여 임금협상에 지장을 줄까 봐 파업 전부터 불법행위로 규정짓고 기관사들에게 가담하지 말라고 경고한 것이었다.

세코(SEKO)는 승무원제 폐지의 해결책 역시 불법 파업이 아니라 기존 게임의 규칙 내에서 협상과 합의로 풀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기관사들은 예고한 대로 3일 만인 19일 오전 0시 1분 전 스스로 파업을 철회했다.

파업 3일간 스톡홀름 의회는 승무원의 CCTV 대체 정책을 철회하라는 기관사들의 요구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한국에서 유사한 일이 있었다면 필수공익사업장에서 불법 파업이 일어났다며 비난 여론이 들끓고 파업 주동자 수배가 떨어지는 등 공권력이 작동하지 않았을까.

스톡홀름 통근열차 기관사들의 3일 천하 파업은 그렇게 마무리됐다.

통근열차 타는 스톡홀름 카운티 시민들 (사진=Dagens Nyheter)

2023년 초 독일의 한 열차 내에서 한 남성이 흉기를 휘둘러 승객 5명이 다치는 일이 있었다.

승무원이 없다면 이런 사건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다는 게 승무원과 기관사의 주장이기도 하다.

앞으로 통근열차 승무원 근무를 둘러싼 기관사와 스톡홀름 의회의 갈등이 어떻게 마무리될지 궁금하다.


일부나마 들여다본 스웨덴 노사 시스템은 약간 부러웠다.

갈등을 최소화하고 사회적 비용을 줄이는 노사 관계는 양측 모두에게 예측 가능한 결과를 도출해 기업 경쟁력을 높이는 원동력이 되는 듯했다.

이 때문인지 스웨덴은 파업으로 인한 근무 손실 일수가 2021년 한 해 11일에 불과했다. 사실상 거의 파업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인접 국가인 노르웨이가 11만6천250일, 핀란드가 3만4천100일, 덴마크가 24만3천일인데 비해 훨씬 적었다.

스웨덴 한 언론인은 이를 두고 "스웨덴 사람들은 다른 북유럽 국가들에 비해 파업에 관한 한 순수한 주일학교 아이들"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스웨덴 노사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과거 아주 많은 파업이 발생했고 주요 산업이 파업이 돌입했던 1980년 봄, 많은 공장과 사업장이 거의 2주 동안 문을 닫았다.

이로 인해 440만일이라는 어마어마한 근무 손실 일수가 발생하기도 했다.

스웨덴 '산업협정' 합의는 노사 갈등으로 사회가 혼란에 빠졌던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일 수 있겠다.

반대로 보면 산업협정 합의가 불발되면 많은 노동자 단체가 총파업에 나서 스웨덴 경제가 일시에 마비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스웨덴 노사는 과거의 경험을 거울삼아 그런 파국에 이르지 않도록 가급적 양보와 합의를 하는 것이리라.

Industrial Employers의 협상 책임자(왼쪽)와 Teknikföretagen의 협상 책임자인 새로운 임금 협약안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Dagens Nyheter)

이런 모델이 한국에 있다면 지금같이 매년 반복되는 노사 갈등이 조금 줄어들지 않을까.

1년이 아닌 2년 치 임금협상을 하는 것도 불필요한 사회적 비용을 막는 한 방법이 될 것 같았다.

파업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만 보다가 당장 불편하지만 그들의 주장을 이해한다는 스웨덴 시민의 말은 여유와 관용이 느껴져 인상적이었다.

기관사들의 파업 모금운동에서 불과 며칠 만에 2억원에 육박하는 돈을 기부한 시민 의식도 여러 생각을 하게 했다.


비용을 줄이려고 사람 대신 기계나 인공지능으로 대체하는 사례가 갈수록 늘고 있지만,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고유한 영역은 여전히 있다고 생각한다.

스톡홀름 시한부 거주자로서 통근열차 기관사들의 싸움을 응원한다.


# 스웨덴 언론 다겐스 니히터(Dagens Nyheter)의 여러 기사와 www.ekonomifakta.se 등의 사이트를 참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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