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설나동 May 29. 2023

나토가입보다 표현의 자유가 중요한 나라

한 국가 대통령이나 총리의 말 한마디는 때로 실정법 이상의 영향력을 가진다.

특히 정부 수반이 국가 안보에 관한 사안을 두고 우려를 표명한다면 정부 조직은 물론 입법, 사법부가 전부 그 가이드라인을 일사불란하게 지키려는 경우가 많다.

이런 상식(?)을 뒤집는 나라가 있다.


2022년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스웨덴은 핀란드와 손잡고 나토(NATO 북대서양조약기구) 가입을 정식 신청했다.

전쟁 3개월 만이었다.

해를 넘긴 2023년, 함께 나토에 동시 가입하자던 스웨덴과 핀란드의 처지는 극명하게 엇갈렸다.

핀란드는 터키와 헝가리의 의회 비준을 거쳐 단독으로 가입이 확정돼 나토의 31번째 회원국이 됐다.

반면 현재까지 우크라이나에 169억 크로나(2조1125억원) 상당의 군사지원을 해오며 나토 가입을 추진한 스웨덴은 터키와 헝가리의 반대로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회원국이 타국으로부터 공격을 당하면 다른 회원국들이 동시에 개입하는 군사동맹체인 나토는 31개 회원국 중 한 나라라도 비준을 하지 않으면 가입이 되지 않는 만장일치제를 채택하고 있다.

이미 가입비준을 마친 28개국(핀란드는 비준 예정)과 달리 터키와 헝가리가 입장을 바꾸지 않는 한 스웨덴의 나토 가입은 쉽지 않은 상태였다.

나토의 우산 밖에 있는 스웨덴으로선 언제든지 러시아의 공격대상이 될 수 있다는 위기감이 커졌다.

덴마크 스웨덴 극우운동가 라스무스 팔루단 (사진=Dagens Nyheter)

안 그래도 쉽지 않아 보이던 스웨덴의 나토 가입에 적신호가 켜진 건 반이슬람 극우 운동가 라스무스 팔루단이 지난 1월 스웨덴에서 이슬람 경전인 코란을 소각한 일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이슬람 세계의 스웨덴 보이콧 사태가 벌어졌다.

여러 이슬람 국가에서 스웨덴 국기가 불타고 스웨덴 경찰과 보안당국은 테러 위협까지 느꼈다.

특히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은 스웨덴이 극우 운동가의 코란 소각을 방조한 것이라며 코란 소각을 막지 않으면 스웨덴의 나토가입이 쉽지 않을 것임을 천명했다.

급기야 스웨덴에서 친 쿠르드족 단체가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의 꼭두각시 인형을 불태우는 일도 있었다.

튀르키예, 시리아, 이란, 이라크 등에 흩어져 사는 쿠르드족은 과거 유대인처럼 독립국가를 세우기를 열망하고 있지만 튀르키예는 이런 쿠르드족을 탄압해 왔다. 스웨덴은 무장 투쟁에 나선 쿠르드족 망명자 다수를 인도적 차원에서 받아들여 튀르키예의 눈엣가시다.

울프 크리스테르손 스웨덴 총리는 지난해 취임하자마자 나토 가입의 키를 쥔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을 찾아갔지만 별다른 성과 없이 돌아와 체면을 구기기도 했다.

튀르키예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크리스테르손 총리는 극우단체의 코란 소각에 '스웨덴 안보에 위험하다'며 즉각 우려를 표명했다.

스웨덴 외무장관도 비슷한 취지의 말을 했다.

총리와 외무장관의 엄포 때문이었을까, 이후 스웨덴 경찰은 코란을 소각하겠다는 팔루단 등 극우단체의 집회 신청을 일절 허가하지 않았다.

이런 경찰 조치가 당연한 수순으로 여겨졌다.

지난 1월 스톡홀름 시위에 등장한 튀르키예 대통령 인형 (사진=Dagens Nyheter)

스웨덴 검찰의 대응은 경찰과는 달랐다.

코란을 소각한 팔루단 행위가 범죄에 해당하는지 몇 달간 조사한 검찰이 2023년 3월 발표한 결과는 눈길을 끌었다.

스웨덴 검찰은 코란 소각이 특정 집단에 대한 선동 범죄가 아니며 표현의 자유 일부라고 밝히며 사건을 종결 처리했다.

판단 이유도 흥미로웠다.

검찰은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려면 강력한 사유가 필요하며 (표현의 자유가) 유럽 협약과 스웨덴 법의 기초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사람이나 특정 집단에 무례함을 표현하는 것과 어떤 상징(이슬람 성전인 코란)을 소각하는 것엔 차이가 있다는 것이었다.

코란을 태우는 것에 사람들이 불쾌함을 느끼더라도 이슬람을 믿는 집단 자체가 아니라 이슬람 종교라는 상징 자체를 겨냥한 것은 표현의 자유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또 코란을 태운 행위가 집회 후 이슬람 국가들의 반발 등으로 다른 의미를 갖게 되었고 다른 맥락(이슬람을 믿는 집단에 대한 모욕 등)을 가졌기 때문에 더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검찰은 스웨덴 의회(Riksdag)가 1970년 종교나 종교 공동체가 신성하게 여기는 상징의 모욕 금지를 폐기한 것도 결론의 근거로 삼았다

일테면 어떤 민족이나 종교를 믿는 집단이 아닌 종교 그 자체에 대한 모욕이나 무례한 행위는 표현의 자유로써 허용된다는 것이었다.


스웨덴 언론 다겐스 니히터(Dagens Nyheter)는 이번 스웨덴 검찰의 결론이 이례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도 짚었다.

2년 전 팔루단은 스웨덴 남부도시 말뫼에서 코란을 불태웠고 당시 검찰 역시 소수민족에 대한 선동이 아니라고 결론 내리며 사건을 마무리한 이력이 있었다.

검찰뿐 아니라 스웨덴 한 판사도 2022년 이에 대해 동의하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궁금한 점은 팔루단은 과거에도 코란을 소각한 혐의로 검찰로부터 무혐의 처분을 받았는데 예전엔 조용하다가 스웨덴의 나토 가입과 맞물린 지금에서야 왜 이슈가 됐는 가다.

코란 소각 사태 이후 이슬람 국가 현지에서 불타는 스웨덴 국기 (사진=Dagens Nyheter)

관심 있게 본 부분은 스웨덴 총리와 외무장관이 코란 소각 행위가 안보를 위협한다고 말한 상황에서 검찰이 어떤 결정을 내릴까 하는 부분이었다.

실제 총리와 외무장관 발언 이후 스웨덴 경찰은 팔루단 등 우익단체가 코란을 소각하겠다며 신청한 집회를 모조리 불허했으니 검찰 역시 팔루단을 처벌해 본때를 보여줄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검찰은 팔루단의 행위가 표현의 자유에 속한다며 소신 있게 사건을 종결시켜 버렸다.


검찰의 이런 결정은 필연적으로 경찰의 코란 소각 집회 금지에 대한 재검토로 이어졌다.

스톡홀름 행정법원 역시 경찰 당국이 안전상의 이유로 코란 소각을 전면 금지한 것은 부당하다며 코란 소각이 허용돼야 한다는 취지의 결정을 잇따라 내렸다.

법원은 코란 소각으로 스웨덴에 대한 테러 등 공격 위협이 증가한다는 경찰의 해석은 과도하고, 헌법이 보장하는 집회와 시위의 자유를 제한하며 코란 소각을 막을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검찰과 법원은 코란 소각이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된다는 총리나 외무장관의 발언은 안중에도 없이 '마이 웨이'를 걸었다.


정권에 따라 법원 판결이나 검찰 수사가 줏대 없이 달라지곤 했던 한국 현실이 떠올랐다.

스웨덴 검찰이나 법원도 나토 가입이라는 절체절명의 안보 위기 앞에서 총리 말에 보조를 맞추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우리나라 같으면 정부 수반의 말을 따르지 않은 검찰이나 법원에 국가 안보보다 중요한 게 어디 있느냐, 도대체 어느 나라 기관이냐고 비난하는 목소리가 일지 않았을지 모르겠다.

스웨덴 검찰과 법원의 결정을 보며 같은 행정부나 사법부가 총리 등 집권 내각의 눈치를 보지 않고 서로 견제하고 자기 할 말하는 진정한 삼권분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과 악수하는 울프 크리스테르손 스웨덴 총리(왼쪽) (사진=Dagens Nyheter)

비록 코란 소각 이슈가 계속 이어지며 스웨덴의 나토 가입은 더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간 스웨덴 사회의 한 축인 표현의 자유를 내팽개치면서까지 나토 가입을 구걸하지 않겠다는 스웨덴 사회의 자존심을 봤다면 과장일까.

한국에서 누군가 표현의 자유가 밥 먹여주는 거냐, 뭐 그리 대단하냐고 묻는다면 솔직히 대답이 궁색해지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스웨덴에서는 국가를 떠받치는 중요한 하나의 기둥이다.(대한민국 헌법에도 사상표현의 수단으로 언론의 자유를 명시하고 있긴 하다.)

스웨덴 헌법이 정부기구, 왕위 승계법,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 등 스웨덴 통치 방식을 정의하는 4가지 기본법으로 구성됐다는 점을 알게 되면 스웨덴에서 표현의 자유가 가지는 의미가 묵직하게 다가온다.


스웨덴 헌법에서 규정하는 표현의 자유는 무엇이든 의견을 갖고 원하는 거의 모든 것을 말할 권리를 의미한다.

다른 사람의 명예를 훼손하거나 공개적으로 모욕하는 것을 제외하고 라디오, TV, 인터넷에서 자유롭게 자신을 표현할 권리를 갖는다.

표현의 자유 기본법을 위반하는 범죄의 예로 성폭력 요소가 포함된 영화, 반역이나 간첩활동을 포함하는 내용 게시, 국가 또는 사회 안전을 위협하는 영화 등이 있다.

영화를 제외한 라디오, TV, 다른 형태의 방송에 대한 검열을 일절 할 수 없다는 점도 포함된다.

3선에 성공한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 (사진=Dagens Nyheter)

2023년 5월 28일 튀르키예 대선이 있었다.

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이 3선에 성공하며 재집권했다.

스웨덴 정치권은 스웨덴 나토 가입에 부정적인 튀르키예 대통령의 낙선을 은근 기대했을 것 같았지만 결과는 다시 '겨울'이다.

크리스테르손 총리는 에르도안 대통령이 당선되자 자신의 트위터에 당선을 축하한다며 "우리의 공동 안보는 미래의 우선순위"라는 짤막한 글을 남겼다. 행간에 나토 가입을 원하는 애절함이 뚝뚝 묻어나는 듯했다.

선거 전 튀르키예 대통령이 코란 소각을 빌미로 스웨덴을 공격하며 민족주의를 자극해 지지율 상승 도구로 이용했다는 분석도 있는 만큼 재집권한 에르도안이 스웨덴의 나토 가입에 전향적인 자세를 취할 가능성도 있겠지만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스웨덴이 자존심을 지키면서도 하루속히 나토에 가입하는 날이 오기를 기원한다.

Lycka till Sverige! (스웨덴에 행운을)


이 글을 쓴 시점이 2023년 3월이었는데 거의 1년 만인 2024년 3월 스웨덴이 나토의 32번째 회원국이 됐다.

스웨덴 나토 가입의 최대 걸림돌이던 튀르키예와 헝가리 의회가 2024년 1월과 2월 각각 스웨덴 나토 가입 비준안을 가입하면서 스웨덴은 마침내 꿈을 이뤘다.

3월 11일 나토 기구가 있는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스웨덴 국기 게양식에 참석한 울프 크리스테르손 스웨덴 총리는 나토 가입이 "200년 이상의 군사적 비동맹 노선을 끝낸 뒤의 역사적 조치이자 아주 자연스러운 수순"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평시에 스웨덴 영토에 나토 영구주둔 기지나 핵무기를 배치할 필요는 없다"라고 러시아를 자극하지는 않았다.

특별했던 중립국 지위를 끝내고 나토 회원국이 된 스웨덴이 앞으로 국제사회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궁금하다.

울프 크리스테르손 스웨덴 총리의 튀르키예 대통령 당선 축하 트위터
이전 21화 스웨덴 파업에 지옥과 천당을 오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