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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나동 Jun 14. 2023

스웨덴 국왕 생일 축하곡이 ‘without you’

지난 4월 30일 스웨덴 '왕의 생일'(kungens födelsedag)이었다.

왕궁에서 왕의 생일을 축하하는 행사가 열린다고 했다.

스웨덴에 사니까 한 번쯤 가보고 싶었다.

왕의 생일 행사가 열린 Yttre borggården

늦게 출발해 행사를 못 보는 건 아닌지 조마조마했는데 행사가 지연됐는지 아직 시작 전이었다.

대충 보고 오려고 했다가 2시간가량 전체 행사를 다 보고 왔다.

국민 투표로 뽑힌 대표자들이 나라를 통치하는 공화국인 한국에서는 이미 국왕이 사라진 지 오래다.

왕이 세습되는 군주국인 스웨덴에서는 왕이 국가원수로서 지위를 가지며 영향력이 상당한 듯했다.

함께 간 둘째한테 "왜 왕의 생일에 가고 싶었냐"고 하니 "음... 스웨덴 왕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고 지금 아니면 못 볼 거 같아서"란다.

그래 내 생각이랑 똑같구나 싶었다.

행사장으로 들어가는 군악대

행사가 열리는 왕국 바깥뜰인 Yttre borggården에 도착하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사람들 틈에 끼여 행사가 시작되길 기다렸다.

해군 악단이 식전공연으로 아비치(Avicii)의 'without you'가 흘러나왔다.

군악대 연주

스웨덴에서 아비치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느낄 수 있었고 자칫 권위적일 수 있는 왕의 생일 행사에 아비치 노래를 선곡할 수 있는 유연함이 돋보였다.

그런데 왕의 생일인데 'without you'라니, 제목과 가사가 이날 행사와 뭔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물론 연주곡이긴 했지만)


군악대가 입장하고 기병음악대도 들어오고 연주가 계속 이어졌다.

특히 말을 탄 음악대는 위엄이 상당했다.

기병음악대

그러는 사이 왕이 나와 귀빈을 맞이하고 리셉션 장소로 이동했다고 한다.

나는 인파 속에서 이동하는 왕의 모습을 못 봤다.

오랜 전통의 행사겠지만 좋은 음악도 계속 들으니 약간 지겨웠다.

인내심이 필요했다.

그러다 마침내 행사 하이라이트인 어린이들이 직접 왕에게 꽃을 건네는 순서가 됐다.

왕에게 줄 생일축하 꽃을 든 어린이들

사전에 미리 선정된 아이들이 왕에게 꽃을 주겠거니 생각했는데 꽃만 있으면 누구나 왕에게 직접 건넬 수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꽃다발 하나 사와 둘째에게 쥐어주고 왕에게 생일 축하 꽃을 주는 진귀한 경험을 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웠다.

가짜 왕이 진짜 왕에게 주는 꽃다발 (사진=Claudio Bresciani/TT)

부모 손에 이끌려 온 아이도 있고 왕 복장을 한 어린이가 진짜 왕에게 꽃을 주는 장면도 있었다.

기모노 옷을 입은 일본 어린이가 왕에게 꽃을 건네기도 했다.

특히 우크라이나 국기를 망토처럼 두른 아이가 스웨덴 국왕에게 꽃을 줬을 때 많은 박수가 쏟아졌다.

우크라이나 국기를 두른 아이

꽃 증정식이 끝난 뒤 왕은 왕궁으로 들어가 왕족들과 함께 발코니에 나와 손을 흔들었다.

생일 행사를 마무리하는 오랜 의식인 듯했다.

방문객에게 손 흔드는 스웨덴 국왕

빅토리아 왕세자비를 포함해 다니엘 왕자, 오스카 왕자, 알렉산더 왕자, 실비아 여왕, 가브리엘 왕자, 에스텔 공주, 칼 필립 왕자, 소피아 공주, 줄리안 왕자 등 스웨덴 왕족이 총출동했다.

왕의 생일 행사를 찾은 관람객

이전까지는 왕궁의 좁은 발코니에서 왕족이 돌아가며 대중에게 인사했다고 하는데, 올해 77번째 생일을 맞아 넓은 발코니를 새로 만들어 왕실 부부, 자녀, 손자 등 온 가족이 한꺼번에 인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전 왕의 생일 행사 때 왕궁 좁은 발코니에서 왕족이 인사하고 있다 (사진=Henrik Garlöv/Kungahuset.se)

스웨덴 국민들은 왕에게 즉석에서 노래를 불러 생일을 축하하기도 했다.

왕의 생일 행사는 권위적이지 않고 어린아이 누구나 왕에게 직접 꽃을 줄 수 있는 열린 행사인 것 같아서 인상적이었다.

파란색 배경에 황금 왕관 패턴이 반복되는 왕실 문양이 왠지 고급스러워 기억에 남았다.


지난해 사망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 이어 왕위를 물려받는 영국 찰스 3세의 대관식도 스웨덴 왕의 생일 뒤에 열려 눈길이 갔다.

특히 찰스 3세의 인기나 여론이 좋지 않아 대관식 몇 주 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영국인 절반 이상이 대관식 비용(1억파운드 추산, 대략 1669억여원)을 국가가 아닌 왕실이 지불해야 한다는 의견을 밝혔다고 했다.

칼 16세 구스타프 스웨덴 국왕 (사진=Thron Ullberg/Kungl.Hovstaterna/TT)

칼 16세 구스타프 스웨덴 국왕에 대한 국민 여론은 그다지 나쁘지 않은 듯했다.

올해로 왕위에 오른 지 50년째인 스웨덴 국왕은 2010년 위기를 겪기도 했다.

왕이 불륜을 저지르고 스트립 클럽 등을 방문했다는 내용의 책이 발간돼 홍역을 치렀다고 한다.

당시 왕은 책 내용을 전면 부인했지만 왕실 전체의 신뢰도는 추락했다.

군주제 국가 왕족의 일거수일투족이 대중과 언론의 관심을 받을 수밖에 없고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군주제 폐지 여론이 높기 마련이다.

스웨덴 국왕은 왕위에 있는 동안 모든 범죄 혐의에 대해 면책 특권을 가진다.

2020년 SOM lab 조사에 따르면 스웨덴인 54%가 군주제 유지에 찬성, 20%는 반대, 26%는 별생각 없음으로 나타났다.

스웨덴 국민 과반수가 군주제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셈이었다.

스웨덴 군주제 지지 54%, 반대 20% 여론조사 결과 (사진 출처 SOM-institutet 2020)

스웨덴 의회는 1971년 국왕의 모든 공식적인 정치권력을 박탈하기로 합의한 Torekov 협정을 맺었다.

스웨덴 국왕은 현재 모든 공식적인 정치권력이 없는 상태지만 국가원수로서 노벨상 수여, 국빈 방문, 국경절 행사 참여 등과 같은 역할과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1980년 스웨덴 의회는 왕위 계승자가 성별에 관계없이 태어난 순서대로 왕위를 물려받도록 법을 개정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애초 남성인 둘째 칼 필립 왕자가 왕위를 물려받았다가 이 법으로 인해 왕위를 박탈당했다.

스웨덴 국왕의 둘째 자식인 칼 필립 왕자. 필립 왕자는 칼 필립 왕자는 해군에서 2년간 복무했다. (사진=Claudio Bresciani/TT)

대신 누나인 빅토리아 공주가 왕위 계승자가 됐다.

빅토리아 공주가 여왕이 되면 다음 왕위 계승자는 첫째 딸인 에스텔 공주가 된다.

칼 16세 구스타프 국왕은 올해 1월 방송된 다큐멘터리에서 법을 소급적용시킨 것은 옳지 않다며 아들인 칼 필립의 왕위 계승 박탈에 강한 아쉬움을 표명하기도 했다.

이 일로 국왕이 의회 결정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왕위 계승자인 빅토리아 공주(오른쪽)와 남편인 다니엘 왕자(가운데) (사진=Christine Olsson/TT)

왕위 계승에 남녀 차별을 없앤 스웨덴 왕은 태어난 순서대로 공평하게 왕위를 물려받는다.

이 같은 성 중립적인 왕위 계승으로 스웨덴 군주제가 존속되고 강화될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왕실의 세 자녀인 빅토리아, 칼 필립, 마들렌 모두 아버지인 칼 16세 구스타프처럼 소위 평민과 결혼한 것도 눈길을 끈다.

빅토리아 공주는 헬스 트레이너이던 다니엘과, 칼 필립 왕자는 모델인 소피아와, 막내딸 마들렌 공주는 은행원인 크리스토퍼 오닐과 각각 결혼했다.

왕세자비인 빅토리아 공주와 다니엘과의 결혼은 특히 왕실의 강력한 반대가 있었다고 하는데 결국 빅토리아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칼 16세 구스타프 스웨덴 국왕은 왕위에 오르자 의회와 협의해 왕위계승법까지 바꿔 실비아 여왕과 결혼했는데 그 아버지에 그 딸이다.

애초 평민과 결혼한 왕족은 왕위를 이을 자격이 주어지지 않지만 왕위계승법을 바꿈으로써 평민과 결혼해도 왕위를 물려받을 수 있게 됐다고 한다.

칼 16세 구스타프 왕이 솔선수범해 자식이 평민과 결혼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준 셈이다.


현재 유럽에서 왕이 있는 군주제 국가는 스웨덴, 영국, 노르웨이, 덴마크, 벨기에, 네덜란드, 스페인 등이다.

이미 한 세기 전에 왕이 사라지고 대통령이 최고 권력자인 코리아 공화국(Republic of Korea) 국민으로서 이날 행사는 경험해보지 못한 군주제 국가에서 왕의 지위를 조금이나마 느껴본 자리였다.

미리 공부를 좀 하고 갔더라면 더 재미있는 '왕의생일'이 됐을 텐데라는 생각도 뒤늦게 들었다.

스웨덴 국왕 일가족 (사진=Linda Broström/Kungl.Hovstaterna)

'왕의 생일' 행사가 끝난 뒤 둘째에게 스웨덴 왕을 실제로 보니 어땠냐고 물었다.

둘째는 "그냥 할아버지 같았어"라고 말했다.

그래 우리 나이로 희수인 77세인데 할아버지 맞다 맞아.

"또 뭐 다른 거 없어" 다시 물으니 "너무 다리 아프고 너무 추웠어" 그런다.

추위 속에 2시간 동안 잘 참아준 둘째가 무척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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