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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나동 Oct 23. 2023

어쩌면 공부보다 중요한 달리기

달리기 좀 하십니까?

다들 중고등학교 때 100m 13~15초대 정도는 뛰지 않으셨나요?

그때 11초, 12초대 뛰는 친구들은 영웅이었지요.

그렇게 보면 100m를 30초에 뛰는 건 식은 죽먹기 아닌가요?


그런 페이스로 1km를 뛰면 300초, 5분입니다.

다시 그 페이스로 10km를 뛰면 3000초, 50분입니다.

10km를 50분에 뛰는 것이 쉬울 거 같지 않습니까?

전 쉽다고 생각했습니다. '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 워치가 뛴 거리보다 훨씬 더 긴 거리를 기록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 전까지는요.

저의 10km 최고기록은 40분 35초에 불과했으니까요.

무려 10km 40분대 기록 보유자였습니다. 물론 이땐 기록도 뻥, 워치도 뻥, 제 달리기 실력도 뻥이었습니다.

몇 날며칠 번뇌와 고민의 시간을 보내며 제 '뻥워치'의 문제가 무엇일지 생각했습니다.

정 안 되면 아내에게 등짝 스매싱을 당하더라도 그렇게 정확하다는 달리기 시계 '가민(Garmin)'을 사볼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다 제 뻥워치의 문제 원인을 찾았죠.

아주 간단한 문제였습니다.

스마트폰(아이폰) 설정-위치서비스-시스템서비스에서 '동작 보정 및 거리'를 켜주니 워치가 정확하게 운동거리를 인식했습니다.

그 이후로 전 10km를 달려본 적도, 100m를 30초, 1km를 5분 페이스로 달려본 적이 없습니다.

스톡홀름에서 달렸던 첫 번째 두 번째 10km 마라톤 대회 공식기록이 모두 54분대였습니다.

워치 기록과는 무려 14분 차이였습니다.


이번에 다시 마라톤 대회에 나갑니다.

목표 기록은 50분대입니다.

이 기록만 내면 제 PR(personal best record. 개인최고기록)인 셈입니다.

껌으로 알았던 10km 50분대는 저에겐 마의 벽으로 다가옵니다.

아마추어가 달리기엔 쉽지 않은 기록이지만 그렇다고 깨지 못할 기록은 아닙니다.

한번 열심히 달려봐야겠습니다.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지난 5월과 6월 각각 10km 마라톤 대회를 뛴 이후 넉 달 만에 다시 마라톤 대회에 나갑니다.

부산의 랜드마크인 광안대교를 뛰는 코스입니다.

평소에는 차량만 통행하는 다리를 이날만큼은 러너들에게 개방하는 겁니다.

많은 마라톤 참가자들이 광안대교 위에서 기념사진을 찍곤 하지요.

광안대교를 뛰는 바다마라톤 대회

두 달 전쯤인가 마라톤 대회 참가 신청하다가 든 생각입니다.

보통 마라톤대회에 참가하면 소소한 기념품을 줍니다.

경기 전 배번호를 비롯해 티셔츠 등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이 배번호와 기념품은 대회 전 택배로 참가자 거주지로 전달받게 됩니다.

'이걸 꼭 택배로 줘야 돼?'

스톡홀름에서 마라톤 대회를 뛰지 않았다면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땐 대회 주최 측이 평소 러닝화, 러닝용품 등을 파는 달리기 용품점인 '러너스 클럽' 내 장소를 빌려 참가자들에게 배번호를 나눠줬지요.

빠른 순번으로 대회 신청을 하거나 선착순 100명 이내로 배번호를 받게 되면 대회 티셔츠나 양말을 받기도 했습니다.

오전 10시 배번호를 배부했는데 가보면 평일인데도 많은 대회 참가자들이 줄을 서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 출근도 안 하나?' 당연히 의문이 들었죠.

물론 이때 배번호를 못 받아도 대회 당일 현장 부스에서 받으면 돼 큰 문제는 없습니다.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가장 유명한 '스톡홀름 마라톤 대회'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미니 마라톤 대회에 '못말려 삼남매' 참가 신청을 하고 배번호를 받으러 갔는데 성인 마라톤 대회 배번호도 함께 배부하고 있었어요.

마라톤 1위 선수에게 부상으로 수여되는 도요타의 수소전기차인 '미라지'가 전시돼 있고 그 옆으로 아주 긴 줄이 있었지요.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두 배번호를 받으러 온 사람이었지요.

직접 배번호를 수령해야 하는 게 약간 귀찮기도 했지만 그래도 대회 전 분위기를 느낄 수 있어 좋은 기억으로 남았습니다.

그러다가 '왜 택배로 배번호를 나눠주지 않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불가피하게 오지 못하는 사람이나 참가자에게 배번호나 기념품을 택배로 부쳐주면 편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평일 오전 스톡홀름 러너스 클럽에 마라톤 대회 배번호를 받으러 온 참가자들(왼쪽), 스톡홀름 마라톤 대회 참가자들의 긴 줄

근데 우리나라 마라톤 대회는 거의 예외없이 참가자에게 배번호, 티셔츠를 비롯한 기념품 세트가 택배로 배송되지요.

대충 검색해 봐도 우리나라에 정말 많은 마라톤대회가 있습니다.

대회 기념품엔 티셔츠가 빠지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면 티셔츠가 꼭 필요한가 싶습니다.

평소에 달릴 때 입는 티셔츠를 입고 나오면 되니까요.

물론 참가자들이 동일한 티셔츠를 입고 뛰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만 굳이 필요 없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일괄적으로 티셔츠를 나눠주는 게 왠지 낭비처럼 느껴졌습니다.

티셔츠를 옵션으로 해서 참가비를 차등해서 받는 건 어떨까 싶었습니다.

기념품도 택배와 직접 수령 등 참가자가 직접 선택하도록 하면 좋을 것 같았습니다.

직접 받으러 가는 사람은 참가비를 깎아주거나 아님 택배를 선택하는 사람은 참가비를 더 받는 방식으로요.

완주 후 받는 메달도 굳이 필요한가 의문이 들었습니다.

꼭 필요한 사람만 받아도 될 듯했습니다.

티셔츠가 필요하면 개별적으로 구매하면 될 것 같고 서로 다른 옷을 입고 뛰는 게 대회 참가자들의 개성과 다양성, 그리고 지구 환경적인 측면에서도 도움이 될 것 같았습니다.

마라톤 대회에서 기념 티셔츠를 일괄적으로 주지 않고 택배도 줄이는 것이 가속화하는 기후위기를 조금이라도 늦추는 방법이 아닐까 생각해 봤습니다.


스톡홀름에서는 대부분 배번호나 기념품을 직접 수령하는 경우가 많은데 왜 한국 마라톤 대회에서는 택배가 당연시되는 것일까요.

한국에서는 평일 근무시간 잠시 직장을 벗어나 사적인 볼일을 보거나 일찍 마치기 쉽지 않은 환경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반면 스톡홀름에서는 상대적으로 근무시간이 짧고 여유도 있어서 대부분 직접수령이 가능한 것인가 싶더군요.(물론 스톡홀름 면적이 188㎢로 771㎢인 부산보다 4분의 1 가량 작아 시 외곽에서 중심부까지 접근성이 좋은 영향도 있을 겁니다.)

그래서 약간 슬펐습니다. 세계에서 6번째 행복한 나라와 57번째 행복한 나라의 차이를 보여준 사례인 거 같아서요.


스톡홀름에서 성인 마라톤 대회를 하면 대부분 어린이 미니 마라톤 대회도 함께 진행했습니다.

가족이 함께 마라톤을 신청해 부모가 아이를 응원하고 아이들이 부모를 응원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습니다.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달리기 대회를 참가하고 완주하는 기쁨을 알게 됩니다.

물론 달리기와 친숙해지는 것은 당연하고요.

잘 달려야만 대회에 참여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등수에 관계없이 최선을 다하는 거지요. 달리기를 즐기는 축제였습니다.

체력이 좋아지는 건 덤입니다.

우리나라는 어린이 달리기, 마라톤 대회를 좀처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운동회에서야 릴레이 대회를 볼 수 있는 정도입니다.

어린이 마라톤 대회는 '돈'이 안 돼서 일까요?

대회 주최 측은 어린 시절부터 달리기에 익숙해진 아이들이 훗날 미래의 대회 신청자가 되리란 생각을 못하는 걸까요?

사실 그것보다 당장의 수익에 급급한 것이겠죠.

요즘 중학생, 고등학생은 말할 것도 없고 초등학생도 짠해 보일 때가 많습니다.

학교가 끝나도 놀기보다 학원 뺑뺑이를 돌고 과연 무엇을 위해서 저렇게 살아야 하는지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향후 부산교육감 선거에서 매년 학교별로 달리기 대회를 열겠다고 공약하는 후보가 있다면 어떤 고려사항도 없이 뽑을 겁니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지만요.

거기서 우승하면 학교 대표로, 또 부산 대표로, 전국 대회까지 출전해 경쟁하는 상상을 해봅니다.

한때 유튜브에서 달리기 영상을 줄곧 찾아본 적이 있습니다.

현재 세계 마라톤 일인자 킵초게부터 10000m, 5000m 트랙 대회, 아마추어 마라톤 대회 영상까지.

그때 전미 대학 체육 협회(NCAA)가 주최하는 10km 달리기 대회를 봤습니다.

미국의 많은 대학 달리기 대표들이 평원의 넓은 흙길을 달리는 모습은 정말 장관이었습니다.

학교 명예와 개인 자부심을 걸고 끝까지 죽어라 뛰는 모습은 감동적이었습니다.

1등 기록이 무려 28분대였습니다. 거의 100m를 16~17초에 뛰는 속도로 10km를 뛰는 것입니다.

달리기를 비롯해 학교 체육활동을 중시하면 관련 대회도 많아질 것이고 여러 체육 인프라가 바뀔 겁니다.

도심에서 안심하고 달릴 수 있는 길들도 많이 생기지 않을까요?

NCAA 10km 마라톤 대회(사진=유튜브)

학교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학교는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 최고이고 우대, 존중받는 분위기인 듯합니다.

그까짓 '문제 더 빨리 더 잘 푸는' 공부 못 한다는 이유로 열등, 무력, 패배감에 빠지기 일쑤입니다. 무엇보다 학교가 아이들을 그렇게 길들입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부산의 일부 고등학교에서 서울 상위권 대학을 보내려고 공부 잘하는 아이들만 따로 뽑아 공부를 시키는 우등반을 운영한다고 합니다.(아마 부산뿐 아니라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일 듯합니다.)

1980~1990년대도 아니고 요즘 세상에 우등반을 만들어 공부로 줄 세우기를 하고 아이들을 갈라놓고 마음에 상처를 주고 아직 꽃도 펴보지 못한 아이들에게 패배의식을 심어주고...

이게 과연 어른이, 학교가, 선생이, 국가가 할 일인가요?

국가인권위원회는 이런 차별적인, 비인간적인 교육정책을 운영하는 학교들에 대해 왜 시정조치를 내리지 않는 것일까요? 알고도 눈감는 것일까요? 차별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일까요?

부모들 역시 이런 교육제도의 피해자인 동시에 공범이겠지요.

내 아이가 우등반에 들어가면 뒤처지지 않았다는 안심을, 내 아이가 우등반에 들어가지 못하면 더 많은 사교육을 시켜서라도 그 속에 포함돼야 한다는 욕망을 느끼지 않을까요.

하지만 우등반이라는 불합리한 학교 내 차별 구조를 깨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는 것이겠지요.

아니 생각은 해도 그게 잘못됐다고 말할 수 없는 구조인 거겠지요.

공부만이 최고인 교육 시스템 속에서 공부가 전부가 아니라고 외치거나 다른 대안을 모색하는 자체가 쉽지 않습니다. 큰 용기와 비용이 드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오히려 그런 시도나 노력이 다른 학부모들한테는 패배자의 외침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습니다.

어려운 문제입니다.

2023년 6월 4일 스톡홀름 미니 마라톤 대회 9세 남자 경기

아무튼 학교에서 체육활동은 공부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초등학교에서는 그나마 뛰어놀던 아이들이 중학교, 고등학교 시기에는 대학 입시 부담감에 짓눌려 마음껏 뛰어놀지도 못합니다.

지금 같은 교육 구조에서는 설령 체육을 하더라도 '이 시간에 공부해야 하는데'하는 죄책감이나 부채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10대 시절 체육, 스포츠 활동이 얼마나 뇌 운동을 활성화하고 스트레스와 우울감을 떨칠 수 있는지에 대한 연구는 조금만 인터넷 검색해 보더라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10대 자살률은 2018년 10만명당 5.8명에서 2022년 7.2명으로, 같은 기간 20대 자살률은 10만명당 17.6명에서 21.4명으로 상승했다고 합니다.)

10대 때 달리기를 비롯한 운동의 즐거움을 아는 아이들은 커서도 운동을 즐길 것입니다.

운동은 10대 때만이 아니라 성인이 됐을 때도 정말 중요합니다.

건강을 지켜주고 직장, 사회생활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이겨내고 삶의 활력을 느낄 수 있는 힘이 될 수 있으니까요.

우리나라가 각종 스포츠 종목에서 금메달을 많이 따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에서 국가대표가 금메달을 목에 거는 건 같은 국민으로서 자부심을 드높여줄 수는 있지만 개인의 삶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얕은 스포츠 저변에서 몇몇 엘리트 프로 선수들이 메달을 따는 것보다, 메달을 못 따더라도 스포츠를 즐기는 아마추어가 많은 사회가 더 좋다고 봅니다.

그래야 우리 사회가 좀 더 생활 스포츠 친화적인 환경이 될 수 있고 개인들이 건강해질 수 있을 테니까요.

삶 속에서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자전거 도로가 생기고, 달릴 수 있는 산책길이 만들어지고, 곳곳에 수영장이 들어서고, 길거리 농구대도 더 많이 생기고 뭐 그렇게 말입니다.

스웨덴 스톡홀름 칼라플란의 자전거 탄 풍경

아시안게임에서, 올림픽에서 열심히 노력한 엘리트 프로 선수들이 메달을 따서 병역 혜택을 받는 것도 좋지만 생활 스포츠로 시작한 아마추어 선수들이 국가대표로 뽑혀 메달을 따는 모습도 보고 싶습니다.

지역 마라톤 대회가 지금처럼 관심 있는 러너만이 아닌 어린이부터 60, 70대까지 참여하는 지역 축제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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