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by 감상자

수업에 전혀 집중할 수가 없었다. 철홍의 말이, 은민의 표정 변화가 연이어 충격적이었다. 그 변화들은 묘하게 흥분됐고, 기분이 좋아졌다. 왠지 친구가 생긴 기분이었고, 연인이 생긴 착각이 들었다.


그저 말 뿐이었고, 사소한 변화였을 뿐임에도 그 모습들 때문에 행복해졌다. 이것저것 확인이 하고 싶어 수업이 빨리 끝나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런 생각 때문인지 수업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가버렸고, 선생님도 교실 밖으로 사라졌다. 나는 나조차 모르게 철홍의 옆에 섰다.


철홍은 내가 온 것을 분명 인지하지 못했는지 창 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의자에 상체를 기댄 상태로 오른쪽 다리는 앞으로 뻗었고, 왼쪽 다리는 살짝 접어 의자의 아래쪽에 놓았다. 그가 나를 외면한다고 해도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우리 이제 친구 된 거야?”


나의 말에 그는 고개를 돌렸고, 한쪽 입꼬리를 올리다가 이내 입 밖으로 옅은 웃음을 내비쳤다. 끝까지 나를 제대로 바라보진 않았지만, 분명히 나를 의식한 상태였다. 이제 가만히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또다시 그의 주먹과 발이 채찍이 되어 날아들 수도 있다고 생각해 긴장을 놓지 않은 상태로, 그가 말했던 친구라는 그 단어에 집중했다.


“친구 하자며.”


그의 의외인 대답에 나 조차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무뚝뚝하게 말을 했지만 분명히 보였던 그 웃음이 더 강하게 느껴졌다. 순간 지금까지 투명 인간이었던 나 자신이 한심하기도 했다. 이렇게 별 것 아닌 일이었는데, 지금까지 말 한마디 못한 내가 원망스러웠다. 그러다가도 그때의 선택이 후회가 되지 않고, 최고의 선택이 됐다는 생각이 문뜩 들었다. 그때 그런 선택을 했기 때문에, 이제는 용기를 낼 수 있게 됐다.


묘한 기분 좋음이 이어졌고, 그것을 충분히 만끽하고 있을 때,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나도 철홍도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그 웃음의 시작은 은민이었다.


“진짜 어이없어, 그렇게 죽일 듯하더니 친구라고? 아우 오글거려.”


그녀의 그 말과 동시에 철홍이 드디어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어느 사이엔가 크게 입을 벌리고 웃고 있었다. 그 웃음 때문이었을까, 이 세상에 나와 철홍, 그리고 은민만 있는 것 같았다. 주변의 그 누구도 느껴지지 않았고, 온통 즐거운 일들만 일어날 것 같았다.


웃음은 조금씩 잦아들고 있었다. 혹시 이 끝에 어색함이 남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 나는 지금껏 그 누구도 친구라고 할 만한 사람을 만들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어떤 것도 예측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예상이라도 했던 것처럼 철홍이 먼저 말을 꺼냈다.


“아우, 이제 아무한테도 심하게 장난치면 안 되겠다. 재미도 없고, 나이 먹고 쪽팔리네 진짜. 야 너희들도 이제 그러지 마.”


지금까지 그들이 했던 모든 행동은 장난이었다. 정말 장난이었냐는 질문에 쉽게 답하지 못하겠지만, 그렇게 장난이 되었다. 나를 억누르던, 가장 심하게 나를 투명 인간이 되게 만들었던 그들의 행동은 철홍의 이 말 때문에 완전히 끝나고 말았다.


철홍의 말에 불만을 가진 이들도 있었겠지만, 아무도 특별하게 나서서 반박하지는 않았다. 만족스러웠고, 이런 변화들이 너무나 좋았다. 그때의 선택이 이런 결과들을 만들어 내는 것 같았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반장 님도 같이 가실?”


그러고 보니 점심시간이 그냥 지나갔었다. 어떻게 시간이 흘렀는지도 몰랐지만, 늦게 학교에 왔고, 순식간에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 배가 고프지는 않았다. 그래도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나도 한발 나아갔고, 누군가 손을 내밀었기 때문에 잡고 싶었다.


“그래, 가자. 은민아 같이 가자.”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는 모르겠다. 그 말이 엄청나게 멀리까지 퍼져나가는 것 같았다. 그 말이 메아리가 되어 이곳저곳에서 울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말이 과연 되돌아오고 있는지는 불분명했다. 그저 울려 퍼지다가 사라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나에게 되돌아오고 있었다.


“매점 갈까? 나도 점심 제대로 못 먹었는데. 누구누구들 때문에 걱정돼서."


그녀가 말한 그 긍정의 말 때문이었을까. 왠지 하늘을 날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물론 나는 그런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그렇게 찾아보던 히어로처럼 특별한 능력을 갖게 된 것은 아니지만, 상관없었다. 지금의 나는 그보다 더 대단하다. 더 뛰어나다. 이런저런 생각들이 순식간에 뒤를 이어나가며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었다. 그 꼬리들은 온통 긍정이었다. 그 꼬리를 끊은 것은 철홍이었다.


“아우 님, 무슨 매점임. 나가서 훼미리 레스토랑이나 갑시다. 내가 쏨.”


그의 우스꽝스러운 발음 때문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지금까지 그렇게나 무뚝뚝해 보였던, 비릿한 웃음만을 보이던, 누군가를 쉽게 투명인간 취급하던 그가 아닌 것 같았다. 누구보다 재미있고 유쾌한 사람 같았다. 그래 지금까지 어쩌면 정말 장난을 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저 조금 심했을 뿐이며, 그저 자신의 장난스러움을 표현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점차 그때의 기억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아득해지는 기억을 멀리하며 우리는 당당하게 교실 밖으로 나갔다. 오후에도 수업이 이어졌지만, 그런 것은 전혀 상관없다는 듯 계단을 성큼성큼 내려갔다. 여름이라 무더위가 느껴질 법도 한데 상쾌했고, 발걸음이 가벼웠다. 우리를 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듯 태연하게 교문을 벗어났다. 그리고 순식간에 음식점의 의자에 우리는 앉아 있었다.


오는 길은 온통 철홍과 은민의 이야기들만 이어졌던 것 같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는 웃었고, 이따금 ‘정말?’이라며 반응을 보였다. 그들은 끊임없이 이야기를 이어갔다. 철홍이 나의 앞에 앉았고, 은민은 자연스럽게 내 옆자리에 있었다. 심장이 엄청나게 뛰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소리가 들킬 것 같았다.


“오올 님들, 너무 자연스럽게 둘이 앉네.”


그의 그 말에 얼굴이 붉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런 상황을 그녀가 불편해하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녀가 수줍은듯한 미소를 갖고 있었고, 고개를 아래로 떨군 상태로, 조금은 흥분된 듯한 말투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아 뭐래, 네 옆에 앉기 싫어서 그런 거 거든?”


정말 그의 옆에 앉기 싫어서였을까? 상관없었다. 그냥 기분이 좋았다. 그녀의 표정 변화와 미소는 온통 나에게 아름다움으로만 다가오고 있었다. 철홍은 크게 웃으면서 자연스럽게 음식을 주문했고, 다 먹지도 못할 만큼의 양인 음식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나도 은민도 놀라며 너무 많이 시킨 것 같다고 했지만, 철홍은 별 것 아니라는 듯 대꾸했다.


“님들 나 이사장 손자임, 우리 집 돈 많음. 내가 삼. 편하게 이것저것 드십시다.”


그의 그 말 때문이었는지 우리는 어느 사이엔가 아무렇지 않게 음식들을 맛보기 시작했다. 왠지 다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다 먹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러나 포만감은 생각보다 빠르게 다가왔고, 오히려 평소보다 많이 먹지 못했다. 배가 부르다는 느낌이 너무 강해서 움직이기도 힘든 상태가 됐다. 눈앞에는 채 먹지 못한 음식들이 여러 방향으로 찢어져 나뒹굴고 있었다.


철홍은 아직 끝난 게 아니라며 후식을 주문했다. 원래의 형태를 잃어 지저분하게 접시에 놓여있던 음식들은 순식간에 치워졌고, 새로 나온 음료들만 눈앞에 놓였다. 그녀가 빨대를 손가락으로 이리저리 움직이며 말을 이었다.


“이렇게 학교 땡땡이쳐도 되나? 그래도 고3인데.”


그녀의 말에 음식점 안의 시계를 바라보았고, 이미 수업 시간이 한참 전에 다 지나갔음을 알 수 있었다. 시간이 나의 의사를 무시한 채 혼자서 멀리까지 전력 질주 한 느낌이었다.


“아우 뭐 어때, 그냥 천천히 들어가게. 뭣하면 둘이 데이트나 하던가. 나는 다른데 놀러 가야겠다. "


당당하게 말하는 자신감의 근원은 우수한 성적을 내고 있다는 현실 때문일 것이다. 하루쯤 쉰다고 큰 타격이 없을 것이며, 이는 은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중위권에서 점점 성적이 떨어지고 있었고, 어쩌면 벼랑 끝에 몰리다 추락할 운명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데이트라는 그 말에 설레고 두근거렸음에도 흔쾌히 대답할 수가 없었다.


분명 그녀와 함께 하는 시간들을 놓치고 싶지 않았고, 두근거리는 마음을 계속해서 느끼고 싶었지만 머뭇거리는 것이 전부인 그때였다.


“그래, 하루쯤이야 뭐. 강상기. 우리 영화 보러 갈래? 스파이더맨인가 그거 재개봉한다던데. 나 그거 보고 싶어.”


그토록 찾아보던 토막 영상이 재개봉을 한다니, 놓치기 싫었다. 아니 정확히는 상관없었다. 머뭇거리던 나에게 그녀가 먼저 손을 내밀었고, 나는 그 손을 잡아야 했다. 아니 잡고 싶었고, 놓고 싶지 않았다. 벼랑 끝에 섰던 두려움은 그렇게 혼자서 추락해 버린 모양이다.


“그래 가자.”


철홍은 어느 사이엔가 사라졌고, 나와 은민은 극장의 좌석에 붙어 앉았다. 평일의 애매한 시간대라서 인지, 재개봉이라 관심이 없는 것인지 사람이 없었다. 그곳은 그냥 나와 은민의 공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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