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by 감상자

분명 휴대폰의 작은 화면과는 비교가 되지도 않을 정도로 큰 화면이었다. 혹시나 아주 작은 소리라도 새어나갈까 봐 아무런 소리 없이 움직이던 모습을 지켜볼 때와 다르게 커다란 음향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하지만 어딘가 화면은 뚜렷하게 느껴지지 않았고 이질적이었다. 나의 옆에 그녀가 있고, 그녀의 어깨가, 그녀의 손이 나의 어깨와 손에 닿을 것만 같기 때문이었을까, 제대로 집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정면만을 응시할 뿐이었고, 아무도 없는 공간에 둘만이 있다는 설렘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가 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의 향기가 더욱 진하게 느껴졌고, 순간 놀라 소리를 지를뻔 했지만 잘 참아냈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녀 쪽으로 몸을 기울여 그녀가 낼 소리에 집중했다. 분명 둘만 있는 공간임에도 공공시설에서 지켜야 할 에티켓을 잊지 않은 듯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는 그녀는 역시 완벽에 가까운 존재임이 분명했다.


“저 주인공, 갑자기 변한 게 꼭 너 같아.”


물론 주인공처럼 특별한 거미에 물린 것도 아니며, 특별한 능력이 생긴 것도 아니었지만 변해버린 나의 모습이 묘하게 그와 닮아 있는 것 같아 화들짝 놀랐다. 그의 몸이 한순간에 변화했듯 나도 키가 불쑥 커버렸고, 힘을 바탕으로 변화하는 그의 행동처럼 나도 용기를 바탕으로 행동했다. 어쩌면 그를 따라 하고 있을 뿐이지만 상관없었다. 지금 내 옆에는 그녀가 있고, 그녀가 더 가까이 다가왔고, 나에게는 용기라는 이름의 새로운 힘이 있었다.


“그런가? 근데 나는 뭐 특별한 능력은 없는데.”


나의 말에 그녀는 소리가 크게 들릴까 봐 몸을 웅크린 채 숨죽여 웃었다. 아무도 없어서 그냥 웃어도 될 텐데 그러지 않는 그녀를 보며 의아함이 들기도 했지만, 그게 또 귀여워 보였다. 그녀는 계속 작은 목소리로 내게 말을 했다.


“네가 무슨 어벤저스도 아니고, 당연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 너 실제로 그런 능력 있으면 잡혀가.”


순간 부끄러웠다. 내가 그렇게 바보 같은 말을 했는지는 둘째 치고, 너무 진지하게 대답했던 것은 아닐까 싶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나는 그녀를 웃게 했고, 즐거웠고, 행복했다. 결국 가까스로 영화에 집중하던 나의 시도는 실패했다. 그래도 지금의 감정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영화가 어떻게 끝났는지도 잘 모르게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그녀와 나란히 상영관을 나왔고, 마치 보통 연인이라 불리는 존재가 된 것 같았다. 그래서 심장이 더 요동쳤다. 그런 나의 마음을 전혀 모르는지 그녀는 계속해서 영화 이야기를 했다.


일순간 놓쳐버렸기에 과거에 보았던 토막 영상들을 토대로 대화를 이어나갈 뿐이었다. 그래도 아무런 무리 없이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었고, 대화는 끊기지 않았다. 우리는 어느 사이엔가 카페에 앉아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나 영화 엄청 오랜만에 봐. 맨날 학교 아니면 학원에 있고, 모의고사 아니면 내신 준비하고 그러니까.”


끊임없이 이어지는 대화 속에 문득 그녀의 일과가 걱정됐다. 정규 수업이 끝나면 바로 집으로 가는 나와는 다르게 그녀는 언제나 열심히 했고, 그렇게 항상 상위권을 유지했다. 나 때문에 그녀가 소중하게 여길 하루를 망쳐버린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됐다.


“나는 괜찮은데, 너는 오늘 공부 못한 거 아니야? 학교 다시 안 가도 될까?”


물론 그녀와 함께 하는 이 시간이 너무나 좋아서, 계속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시간이 이대로 멈추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긴 했다. 중위권에서 점점 하락하는 성적을 갖고 있는 나는 그녀에게 피해를 입히기에 적합했다.


“뭐래, 나도 스트레스받고 그래서 나온 건데. 네가 끌고 나온 것도 아니잖아.”


맞는 말이다. 정작 나는 철홍의 말을 거드는 정도의 용기를 냈을 뿐이며, 영화도 그녀가 먼저 보자고 했다. 결국 남의 말에 편승하고 뒤따르는 정도의 용기였다. 그래서 이제는 더 큰 용기를 낼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달라졌으니까.


“그럼 오늘은 신나게 놀고, 내일부터 달리자. 근데 나는 성적 별로니까 은민이 네가 내 공부 좀 도와주면 어때?”


어떻게든 그녀와 더 가까이 있고 싶었고,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으며, 무엇인가를 함께 하고 싶어서 내뱉은 말이었다. 얼마나 좋은 핑계일까. 우리는 학생이고, 함께 하기에 가장 적합하고 이상적인 방법 같았다.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을 것 같았다.


“그래 그럼. 대신 잘 따라와야 돼. 그리고…”


갑작스러운 제안에도 흔쾌히 승낙해 준 그녀의 대답에 놀라움도 잠시, 그녀가 말 끝을 흐렸다. 무슨 말을 할지 예측할 수는 없었다. 순식간에 여러 가지 상상을 하며 정답을 맞히고, 말을 이어가려 시도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결국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게 최선의 선택이었다.


“저녁 뭐 먹지? 이야기하다 보니까 벌써 저녁시간이야.”


순간 약간 허탈감이 느껴졌지만 웃음이 나왔고, 휴대폰으로 시간을 보니 저녁시간이었다. 그녀의 물음이 타당했으나 쉽게 답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언제나 학교에서 제공되는 밥만 먹었고, 집에서는 누군가가 제공해 주는 것을 챙겨 먹었기 때문이다.


밖에서 무엇인가를 먹었던 기억은 아득했고, 그마저도 건강에 좋지 않다며 제약받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래서 어떤 것을 먹어야 할지, 무엇을 함께 먹으면 좋을지 등은 너무나 어려운 문제였다. 어쩌면 모의고사에 출제되는 생소한 영역의, 배우지 않았던 부분의 문제가 출시된다고 해도 이보다는 쉬울 것 같았다. 그렇게 내가 당황해하는 사이 그녀가 말을 이었다.


“뭐야, 선택 장애가 있나 보네. 그럼 내가 정한다? 떡볶이 어때?”


나는 긍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무엇을 먹던 상관없었다. 그녀가 내 앞에 있고, 무엇인가를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했다. 그녀와 함께 있는 그 시간 자체가 소중했고, 행복했고, 즐거웠다. 그렇게 우리는 어느 사이엔가 분식집에 들어가 마주 앉았고, 눈앞에는 음식이 있었다.


나는 그것을 제대로 먹기보다는 그녀가 먹는 모습을 바라보는데 집중했다. 그것을 먹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아름다웠고, 그것을 집기 위해 활용하는 포크를 운용하는 손은 매력적이었다. 그러다 문득 그녀의 입술을 바라보았고, 음식의 양념이 묻은 그 입술이 순간 눈이 부셨다.


“안 먹고 뭘 그렇게 쳐다봐?”


나도 모르게 그녀의 말에 당황했는지 기침이 나왔다. 콜록거렸고, 그녀는 슬쩍 물컵을 내 쪽으로 밀었다. 나는 그것을 들고 벌컥벌컥 마셨고, 당황하며 말을 했다. 아니 내뱉었다.


“아니 그냥, 이뻐서.”


내가 무슨 말을 한 건지 나도 몰랐다. 속으로 생각하던 말이 입을 통해 뛰쳐나왔다. 분명 막을 수 있고, 저지할 수 있고, 조절이 가능했지만 순간 그 모든 것들이 마비된 것처럼 불쑥 튀어나왔다. 이미 그 소리는 그녀에게 닿았을 것이며,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나는 더욱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먹던 모습 그대로 멈칫했고, 순간 시간이 정지한 것 같았다. 아니 차라리 정지했다면, 바깥으로 뛰어나가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그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나의 말에 당황해 순간 멈춰 있을 뿐이었다.


“아 뭐야, 무슨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 사람 민망하게.”


얼굴을 붉힌 그녀는 너무도 귀여웠고, 그런 그녀가 너무나 좋았다. 그래 나는 그녀를 이전부터 좋아하고 있었다. 그래서 제어하지 못한 말들이 튀어나왔고, 고장 난 기계처럼 오르락내리락 마음대로 움직이는 나의 말을 가로막을 수 없었다.


다행히 그녀는 다시 포크 든 손을 움직였고, 금방 앞의 음식들은 사라졌다. 이후 어떻게 계산을 했는지, 어떻게 나왔는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우리는 걷고 있었다.


나란히 걷고 있는 그 거리는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함께 한다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좋은지 처음 알았다. 그런 생각은 그녀의 말 한마디에 커다란 파도를 직격으로 맞은 듯 이리저리 휘청이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 이뻐? 그럼 사귀자고 할 거야?"


그녀의 솔직한 말에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더 이상 숨기고 싶지 않았다. 당당하게 말하고 싶었고, 그녀가 먼저 내밀어 준 손을 뿌리칠 마음은 더더욱 없었다. 쉽지는 않았지만 최대한 담담하고 깔끔하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 모습이 당당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최선의 답이 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응, 우리 사귀자. 오늘부터 1일.”


나의 말이 끝나자 그녀는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본 적 없는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그 모습이 너무나 눈이 부셨고, 조금 더 용기를 내서 그녀의 손을 잡았다. 왼손으로 부여잡은 그녀의 오른손은 놀라울 정도로 따뜻했다. 어쩌면 그 따뜻한 손에 나의 심장박동이, 미칠 듯이 뛰고 있는 그것의 요동이 전달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나는 이제 용기를 내는 사람이고, 그것이 내가 갖게 된 슈퍼히어로의 능력이니까.


우리는 그렇게 손을 잡고 천천히 걸었다. 그러다 문득 그녀가 멈춰 섰다. 하루가 끝나가고 있었다.


“나 그럼 오늘은 이만 들어갈게. 내일 봐. 안녕.”


그녀의 그 말이 너무도 아득하게 느껴졌다.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내일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잡고 있는 손을 놓고 싶지 않았고, 나도 모르게 아까보다 더 세게 잡았다.


“아 뭐야, 놔야 가지. 에잇.”


그 말과 함께 행동한 그녀 때문에 나는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나의 품으로 파고들었고, 나의 양팔과 몸 사이를 가로질러 자신의 팔을 집어넣은 뒤 힘껏 안았다. 그녀의 향기가 지금까지 보다 강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고, 온몸이 굳어버렸다. 그렇게 멈춰있는 사이 그녀는 몸을 뺐고, 내일 보자는 말과 함께 저 멀리 뛰어나갔다.


나는 지금 너무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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