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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작가 Sep 29. 2024

빌라 두 콘데

Vila do conde

  까미노 둘째 날이다. 피곤했던지 자꾸만 침대 속으로 파고드는 유림이를 억지로 일으켜 출발 준비를 서둘렀다. 어제 9시쯤 출발해 보니 너무 금방 뜨거워져서, 오늘은 한 시간 빠르게 출발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11시쯤이면 벌써 뜨거워지기 시작한다는 걸 느끼고, 내일은 7시에 출발하기로 했다. 아침에 일어나는 게 힘든 유림이도 작렬하는 태양을 직접 겪어 보더니, 왜 많은 사람들이 일찍부터 걷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이것이 우리가 까미노를 걷는 동안 의도치 않게 아침형 인간으로 거듭나게 된 이유였다.


포르투갈 해안길은 탁 트인 바다의 황홀한 풍경과 시원한 바람이 장점이다. 하지만, 강렬한 태양을 피할 곳이 전혀 없다는 단점도 있다. 그래서 햇빛을 잘 가려주는 것이, 걷기 좋은 길이 되는 중요한 요인이라는 걸 알았다. 

우린 타는 듯한 햇빛을 온몸으로 맞으며 걸었고 갈증과 통증을 참기 힘들 때쯤, 달달한 아이스라떼 한잔이 그리워졌다. 걷다가 카페가 보이면 바로 들어가기로 약속을 한 후, 30분 정도가 지나자 기다리던 카페가 오아시스처럼 나타났다. 시원한 그늘 밑 야외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아 뻐근한 다리부터 폈다. 카페에서 신발을 벗는 건 예의가 아니라는 글을 본 적이 있는 것 같았지만, 그런 걸 따질 겨를이 없었다. ‘야외니까 괜찮아.’ ‘구석이라 잘 안 보일 거야.’ 우린 온갖 너그러운 이유를 대가며 고통에 울부짖고 있는 발을 신발에서 해방시켜 주었다. 

그때, 직원이 우리 테이블로 메뉴판을 가져다줬다. 그런데 웨이터가 가져다준 메뉴를 아무리 찾아봐도 '카페라떼'라고 쓰인 메뉴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나는 포르투갈어 까막눈이라 이럴 땐 그냥 물어봐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아이스 카페라떼 있어요?” 

    

“네, 있어요.”  

   

“오호! 그럼 두 잔 주문 할게요.”

     

드디어 갈증과 피로를 한방에 날려줄 아이스라떼를 마실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두근두근 설레고 있을 때였다. 직원이 들고 온 커피잔엔 뜨거운 라떼가 담겨있고, 그 옆에 얼음이 반쯤 담겨있는 유리컵이 같이 있었다. 내가 주문한 '아이스 라떼'는 'with ice'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 알고 보니 대부분의 유럽국가에선 뜨거운 커피를 마시기 때문에, 차가운 커피를 먹기 위해서는 특별한 주문이 필요한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뜨거운 커피를 얼음컵에 옮겨 붓고 시원해지기를 조금 기다렸다가 벌컥벌컥 마셨다. 옮겨 붓는 과정에서 아까운 커피를 질질 흘려버리긴 했지만, 시원한 커피가 수혈되니 온몸에 다시 힘이 솟는 기분이었다. 

유림이는 아직 커피를 마셔본 적이 없었다. 어른들의 커피는 너무 쓰고 맛이 없다고 했다. 그런 유림이에게도 힘들게 걸으려면 아이스라떼 한잔이 필요할 듯하여 설탕을 넣어 달달해진 커피를 마셔보게 했다. 

     

“와! 뭐야! 이거 왜 이렇게 맛있어?”

     

그렇게 유림이는 내가 맥주를 마실 때마다 항상 아이스라떼를 마시게 되었다는 사실. 까미노에서 달달구리 커피에 눈을 뜬 딸아이였다. 


아이스라떼가 불러온 처참한 현장




오늘 우리는 빌라 두 콘데(Vila do conde)라는 마을까지 왔다. 우리는 지치고 배가 고팠고, 숙소 체크인 시간까지 아직 여유가 있었다. 때마침 허기진 우리 앞에 '필그림(순례자) 메뉴 8유로'라는 광고판이 세워진 식당이 나타났다.  

    

“유림아! 우리도 순례자가 되었으니 순례자메뉴를 먹어봐야겠지?”    

  

“응. 난 아무거나 먹고 빨리 숙소 들어가서 눕고 싶어.”  

   

더 이상 말시키면 안 될 것 같아 얼른 들어가 빈 테이블에 앉았다. 얼굴에 웃음이 가득한 사장님에게 필그림 메뉴를 주문했고, 쟁반만 한 큰 접시에 밥, 치킨, 샐러드 등이 잔뜩 담긴 한식뷔페(?)식 음식이 나왔다. 배가 터지도록 먹어도 남길 수밖에 없었던 어마어마한 양이었는데, 8유로에 수프와 메인메뉴, 음료까지 전부 포함된 코스라 가성비 최고의 식사였다. 마지막에 크레덴시알에 쎄요까지 야무지게 받고, 시간 맞춰 숙소로 향했다.


가성비 뛰어났던 필그림 메뉴




우리가 묵게 된 숙소는 아주 작은 숙소였다. 작은 가정집을 민박집으로 운영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는데, 여성전용 도미토리 룸(4인실)이 전부인 작은 공간이었다. 여주인은 6살 된 '콘스탄시아'라는 딸과 함께 있었고, 우리가 잘 침대를 배정받으러 들어가 보니 이미 한 명의 여자가 다른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잉? 우리가 숙소 문 열리자마자 들어왔는데, 뭐지?’라고 생각하는 찰나 그녀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안녕하세요. 까미노 걷는 중이에요? 나도 순례자인데 감기에 걸려서 오늘 하루는 걷지 않고 그냥 하루 더 쉬었어요.”     


그녀의 이름은 '유딧'이고 독일인이라고 했다. 밝은 갈색의 긴 머리와 키도 크고 단단한 체격으로 20대의 젊음이 느껴졌다. 혼자 걷고 있다는 그녀는 감기에 걸린 사람답지 않게 에너지가 넘쳐 보였다.

유딧은 콘스탄시아와 이미 친구가 된 듯했다. 동화책도 같이 읽고, 대화도 계속 이어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콘스탄시아는 포르투갈어만 할 수 있었고, 우리와 유딧은 포르투갈어를 전혀 할 줄 몰랐다. 그럼에도 옆에 와서 종알종알 거리는 콘스탄시아에게 다른 언어는 전혀 문제 될 게 없어 보였다. 덕분에 각자 서로 본인들 나라 말을 하는데도 대화가 되는 신기한 경험을 해볼 수 있었다.   

  

오늘도 유림이는 걷는 걸 많이 힘들어했다. 어제와 비슷한 정도로 걸었는데, 어제보다 더 힘들어하는 것 같았다. 저녁을 먹으러 나가자고 해도 싫다고 할 것이 뻔해 보였다. 근처에 저녁을 먹을만한 곳이 있는지 주인아주머니(미안해요. 이름을 까먹었어요.)에게 물어보니, 일정 금액을 받고 자기가 여기서 저녁을 준비해 줄 수도 있다고 했다. 숙소 주변에 별다른 시설이 없었던 것이 생각나 주인아주머니께 저녁식사를 부탁드렸고 이 소식을 유림이에게 전하니 뛸 듯이 기뻐했다. 유딧도 숙소에서 같이 저녁을 먹는다고 했다.

한 시간쯤 지나 저녁 준비가 다 되었다는 소식에 야외테이블이 있는 곳으로 나가보니, 샐러드와 오믈렛, 과일 등으로 건강한 저녁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시원한 바람이 부는 야외테이블에서 우리 둘과 유딧, 그리고 주인아주머니와 콘스탄시아까지 다섯 명이 둘러앉아 저녁식사를 했다.

      

“초이! 어떻게 딸과 함께 순례길을 걸을 생각을 했어요?” 

    

식사 중에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유딧이 물어왔다. 이런 진지한 질문엔 한국말로도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유창하지 못한 영어로 대답을 하려니 난감했다. 

    

“오래전부터 순례길을 걸어보고 싶었고, 딸과 함께 걸으면 더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유림이 여름방학 시기에 맞춰서 오게 되었죠. 당신은요?” 

    

떠듬떠듬 말을 하는 내가 답답하지도 않은지 엄청 집중해서 들어주던 유딧은, 본인도 첫 번째 까미노를 걷는 중이라고 했다. 별다른 말은 길게 하지 못했지만, 유딧도 자신만의 까미노를 걷는 중일 것이다. 나를 들여다볼 수 있는 까미노를.


저녁식사를 마치고 잘 준비를 다 했을 때쯤, 잠옷을 입은 콘스탄시아가 파자마파티를 하자며 방으로 찾아왔다. 콘스탄시아가 종알종알 말하면 그녀의 엄마가 통역을 해주었다.  

   

“파자마파티를 하는데 음악은 없어요?”  

   

“콘스탄시아, 그럼 잘 시간이 지났으니 딱 한곡 만이다.” 

    

당돌한 콘스탄시아의 질문에 난감해하는 주인아주머니를 보고는 유딧이 먼저 흥겨운 음악을 틀어주며 말했다. 그렇게 우리는 모두 거실에 모여 정체 모를 동작의 몸짓을 하며 숨이 차도록 뛰었다. 아이와 함께 아이처럼 춤을 추는 내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그립기도 했다. 유림이가 콘스탄시아 정도의 나이였을 때는 우리도 자주 춤추고 놀았었던 기억이 떠올라서였다.     

유림이는 마지막에 씻느라 댄스파티에 참석하진 못했다. 하지만 나중에 얘기를 듣고도 별로 아쉬워하지 않았다. 나는 잘 추는 춤이 아니더라도 일단 흥겨우면 신나게 몸을 흔든다. 하지만, 유림이는 크면서 본인이 춤을 잘 추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자각한 이후부터 사람들 앞에서 춤을 추고 싶어 하지 않았다. 


나는 나의 딸에게, 반드시 잘하지 않아도 충분히 즐길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 

잘해야만 앞에 나설 수 있는 게 아니라, 내가 원하면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 

약간 푼수 같은 엄마를 좀 창피해하는 딸에게, 남들의 시선보다 중요한 건 너 자신이라는 걸 알려주고 싶다. 나는 분명 그런 날이 올 것이라 믿는다.


포르투갈 해안에는 데크길이 잘 조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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