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어제 건조대에 널어 둔 빨래가 생각났다. 우리가 묵은 숙소에는 세탁기가 없었고, 손빨래를 해서 베란다 밖에 있는 건조대에 널 수 있도록 되어있었다. 첫날 숙소에서 빨래를 못 하고 그냥 싸들고 왔기에 어제 숙소에 도착해서는 꼭 빨래를 해야만 했다. 두 명 분의 옷이 이틀 치라 양이 꽤 되었다. 한국에서 손가락 몇 번 움직이면 세탁기와 건조기가 편하게 해 주던 일을, 비누로 하나하나 비벼서 헹구고 짜서 널려니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나마 햇빛도 좋고 바람도 잘 불어서 금방 마르겠구나 싶었는데, 문제는 탈수를 못해 너무 대충 짜서 널었다는 것이다.
저녁까지도 살짝 물기가 있어서 내일 아침에 다 마르면 걷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 잘못이었다. 일어나자마자 바로 옷을 걷으러 나가보니, 새벽이슬을 잔뜩 머금고 축축해진 옷들이 축 쳐진 채 걸려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어젯밤에 걷어 오는 거였는데... 후회한들 돌이킬 수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다음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널어서 말리는 수밖에 없다. 다만 걱정되는 건 젖은 옷들 때문에 가방 무게가 조금 더 무거워진다는 것이다. 우리가 들고 온 작은 배낭은 담을 수 있는 부피가 한정되어 있고, 젖은 옷들은 다른 옷들과 합쳐서 담을 수도 없으니 공간 활용도는 떨어지고 무게도 늘어난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유림이에게 설명하고, 젖은 옷을 두 장의 비닐에 나눠 담아 각각 유림이와 내 배낭에 구겨 넣었다. 젖은 옷을 넣는 바람에 원래 슬리퍼를 넣었던 공간이 없어져서 우리 둘 다 슬리퍼는 가방 바깥쪽 끈에 달랑달랑 매달았다.
오늘은 에스포센데(Esposende)까지 21km 이상 걸어야 하는 날이었다. 잘 걷는 사람들에게는 별거 아닌 거리일 수 있지만, 우리에게는 엄청 긴장이 되는 날이다. 여섯 시 삼십 분에 일어나서 출발 준비를 서둘렀다. 잠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유림이를 다그쳐 깨웠다. 아침식사는 걷다가 중간에 먹기로 하고 콘스탄시아와 유딧에게 작별인사를 한 후 먼저 출발했다.
'빌라 두 콘데'에서 '에스포센데'까지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첫날은 포르투에서 도시를 빠져나오는 길이라 힘들긴 했어도 신호등과 건널목이 있었다. 둘째 날은 빌라 두 콘데까지 해안길이어서 몸은 힘들어도 경치가 너무 좋았다. 그런데 셋째 날인 오늘은 차가 쌩쌩 달리는 길을 걸어야 하는 구간이 많아서 위험했고 경치도 별로라 지루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길은 아닌 것 같아 지도앱을 켜보니, 우리는 까미노 길에서 벗어나 자동차 전용도로를 용감하게 걷고 있었던 것이다.
‘어쩐지, 노란색 화살표가 안 보이더라니.’
난 내 뒤를 따라 묵묵히 걷고 있는 유림이의 눈치를 살핀다.
한참을 걷다가 시간을 보니 오후 한 시가 다 되어갔다. 그래서 에스포센데까지 6km 정도를 남겨둔 작은 마을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검색해 보니 점심식사를 하기 적당해 보이는 식당이 있어 그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는데, 길 건너편에서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바로, 오늘 아침에 작별인사를 했던 유딧이었다. 우린 너무 반가워서 손을 크게 흔들며 인사했다. 분명 오늘 컨디션 때문에 10km 정도만 걸을 생각이라며 우리보다 늦게 출발했는데, 어떻게 여기서 만나게 되었을까?
“유딧! 어떻게 여기에 있어요? 오늘 조금만 걷는다고 했잖아요.”
“그러려고 했는데 또 걷다 보니 더 걸을 수 있겠더라고요. 그래서 걷다 보니 여기까지 왔어요.”
유딧도 오늘 에스포센데 까지 가겠다고 했다. 우린 점심 먹으러 가는 길이라고 하니, 유딧도 점심 먹을 거라 같이 가겠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가 도착한 식당은 빈자리가 없이 사람들이 많았고, 맞은편의 다른 식당도 마찬가지였다.
유딧은 채식주의자였다. 그래서 자기는 어차피 먹을 수 있는 메뉴도 별로 없는 것 같으니, 그냥 근처 카페를 찾아서 간단하게 먹겠다고 했다. 그렇게 유딧과 두 번째 작별인사를 했다. 우린 서로에게 ‘부엔 까미노!’를 외쳐주며 손을 흔들었다.
유딧이 가고 나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우리가 불편해서 일부러 간 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영어가 유창한 편은 아니라 간단한 대화 정도만 가능했고, 유림이는 낯을 가리느라 유딧과 어제부터 거의 말 한마디 하고 있지 않았었다. 그런 우리와 한 방에서 하루 동안 지내는 정도는 괜찮았겠지만, 마주 앉아 식사를 하면서 깊은 대화를 나누지도 못하는 이 상황은 불편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항상 여행을 하다 보면 영어공부 좀 잘해놓을 걸... 하며 아쉬워하다가, 막상 여행 와서 손짓발짓 동원해서 말하면 웬만한 대화가 가능하니 또 절실해지지가 않는 것 같다. 이번 순례길 위에서 한 가지 느낀 건, 사람을 가까이에서 느끼는 여행을 하려면 '오픈마인드'가 가장 중요하고 그다음이 '언어'라는 것이다. 난 지금까지 '오픈마인드'가 충만해서 모든 여행이 행복했었다. 하지만, 이번 유딧과 함께 하면서 깊이 있는 대화를 못 나눈 것은 어쩔 수 없는 언어의 장벽이었다는 생각에 다시 한번 영어공부의 의지를 다져보게 된다.
점심 식사 후 다시 열심히 걸었다. 우리가 숙소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네 시 삼십 분이었다. 오늘 우리는 가장 이른 시간에 출발하고, 가장 늦은 시간에 도착한 날이다. 그만큼 피곤했고 발도 많이 아팠다. 하지만, 오늘 유림이가 너무 씩씩하게 잘 걸어서 놀랬다. 힘들어도 적응을 잘하고 있는 것 같아 감사했다.
숙소 앞에 도착하자 큰 키에 편한 슬리퍼를 신고 있는 직원이 때마침 문 앞에 나와 있었고, 우리를 보고는 환하게 웃으며 응대해 주었다. 한마디 한마디 끝날 때마다 'ok? ok?'를 붙이는 습관이 있는 남자였다.(다국적 순례자들에게 친절하게 설명하는 과정에서 습관이 된 듯하다.)
"방은 2층 오른쪽 끝에 있어요. ok? 아침 식사를 할 수 있는 식당은 1층에 있고요. ok? 세탁은 식당 옆에 있는 세탁실에서 할 수 있어요. ok?"
나도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열정적인 설명에 맞춰 대답을 했다.
체크인이 끝나고 고개를 돌려보니 데스크 옆에 방명록이 있었다. 우리는 한글을 찾아 방명록을 넘겼고, 한국분들이 써놓은 몇 개의 글을 읽으며 가슴 따뜻한 응원의 메시지를 볼 수 있었다.
“유림아, 우리도 방명록에 글 남겨볼까?”
우리 둘 다 각자의 짧은 글을 남기기로 했다. 내가 쓴 글의 제목은 [40대 엄마의 까미노] 이렇게 시작했고, 유림이가 쓴 글의 제목은 [중2 딸의 까미노] 이렇게 시작했다. 나는 딸과 함께 걷고 있는 순례길에서 좋은 추억을 만들고 있으니 모두 힘내시라는 내용이었고, 유림이는 엄마에게 끌려온 순례길을 걷고 있어서 힘들지만 모든 분들 힘내시라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방명록에 우리의 발자취를 남겼다. 우리 뒤에 오시는 분들도 응원의 기운을 받으시기를 바라면서.
우리가 쓴 첫번째 방명록
방에 들어서자마자 젖은 옷들을 꺼내서 창가 쪽에 잘 마르도록 널었다. 젖은 옷들을 짊어지고 걸었음에도 무겁단 말없이 잘 걸어준 유림이에게 새삼 고마웠다. 그리고 오늘 분의 빨래는 숙소에서 2.5유로에 사용할 수 있는 세탁기 덕분에 아주 편하게 세탁할 수 있었다. 역시 기술이 좋긴 좋다. 순례길 위에서는 감사할 일들이 참 많아진다.
에스포센데는 일몰이 아름답다고 소문난 마을이었다. 씻고 나서 잠깐 잠들어버려서 저녁식사가 늦어졌다. 우리는 저녁을 먹으러 해변 쪽에 있는 식당으로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이곳의 일몰을 보려면 9시가 넘어야 했기에 다행이었다. 식당의 야외테이블은 만석이었는데, 운 좋게도 한 테이블이 막 일어났다. 우린 그렇게 일몰을 바로 볼 수 있는 자리의 야외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을 수 있었다.
포르투에 처음 도착 후 비행기에서 내릴 때 날씨가 너무 쌀쌀해서 놀랬었다. 너무 더우면 어쩌나 걱정하며 그래도 혹시 몰라 챙겨 온 얇은 바람막이 한 장씩이 우리 겉옷의 전부였다. 하지만 밤에는 15도까지도 떨어지는 기온에 바람막이 한 장으론 너무 추웠다. 일몰을 보기 좋은 자리에 앉게 된 행운을 포기하고 일어날 수는 없었지만, 밤에 뚝뚝 떨어지는 기온을 이기고 야외테이블에 앉아 있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쌀쌀한 날씨를 이겨낼 수 있을만한 음식과 늦은 저녁식사 덕분에 보게 된 아름다운 일몰에 우린 감사했다.
“엄마, 이걸로는 모자랄 것 같은데, 메뉴 한 개만 더 시켜도 돼?”
유림이가 자꾸 메뉴를 더 주문하자고 했다. 원래 먹는 양이 적은 아이라 금방 배부르다고 하는데, 이번 순례길을 걷기 시작하면서 너무 잘 먹는다. 그래도 다 먹지 못할 만큼의 음식이 있었기에, 이걸 다 먹으면 그때 주문하자고 설득했다. 결국 기존에 먹던 음식들을 다 먹고 추가주문은 하지 않았지만, 너무 잘 먹는 아이가 신기해서 물어봤다.
“유림아, 너 집에서는 많이 못 먹더니 여기 와서는 왜 이렇게 잘 먹어?”
“살려고.”
아, 그 말에 빵 터져버렸다. 걷는 게 힘들긴 했나 보다. 그래도 잘 먹으니 그걸로 됐다. 잘 먹어주는 딸에게 또 감사했다. 감사가 넘치는 우리의 까미노 셋째 날은 아름다운 에스포센데의 노을과 함께 저물었다.
야외테이블에 앉아서 찍은 일몰 사진
새벽에 눈이 떠지긴 했지만 뒹굴 거리며 다시 눈을 감았다. 오늘은 에스포센데에서 하루 더 쉬기로 한 날이라 여유 있게 늦잠을 잘 수 있었기 때문이다. 푹 자고 일어나니 아팠던 발가락도 좀 나아지는 듯했다.
아침식사는 숙소 근처 카페에서 빵과 커피로 간단히 해결했다. 야외테이블에 앉아 뜨거운 햇빛은 피하고, 시원한 바람은 온몸으로 느끼며 커피를 마시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유림이와 함께 일기도 쓰고, 내일의 계획도 세우며 여유를 만끽했다.
그 후 우린 마트로 갔다. 혹시 한국 컵라면이 있을까 찾아봤지만 없어서 포르투갈 컵라면(엄청 맛있었음)과 납작 복숭아와 과자, 맥주 등을 샀다. 돌아오는 길엔 동네 옷가게에 들렀다. 짐을 너무 단출하게 가져와서, 지금처럼 식사하러 다닐 때 입을 수 있는 옷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유림이가 하얗고 가벼워 보이는 원피스를 맘에 들어했다. 입어보니 더 맘에 들어하는 듯했다.
“이 원피스 얼마예요?”
“20유로예요.”
“좀 깎아주세요. 그럼 살게요.”
가격은 무조건 깎고 싶어 하는 게 한국사람 아니던가. 나는 환하게 웃으며 할인을 요구했다.
“아... 그럼... 50센트 할인해 줄게요.”
뭐지? 심하게 당황하며 깎아주겠다고 하는 이 시추에이션은?
뭔가 이상함을 감지하고 보니, 이 가게는 정찰제였다. 원피스에 가격표가 떡 하니 붙어있는데, 난 그걸 못 보고 대뜸 깎아달라고 한 것이다.
유림이는 이런 엄마를 살짝 부끄러워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순례길 걷는 중간마다 그리고 나중에 관광을 할 때까지, 유림이는 이 원피스를 너무 잘 입고 다녔다. 그럼 된 거지. 하하하!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여러 곳을 더 구경했지만, 뭔가를 사지는 않았다. 여기서 사는 것은 어떤 것이든 전부 내 어깨로 짊어질 짐이라고 생각하니 선뜻 살 수가 없어서였다. 한국에서는 너무 쉽게 쇼핑을 하는데, 순례길 위에서는 모든 물건이 다 삶의 무게처럼 느껴진다. 비움의 소중함을 생각해 볼 수 있는 뜻깊은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