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무엇보다도 네 마음을 지켜라"
출장을 가는 차 안이었다. 정무수석과 함께 이동 중이었는데 전화기 너머로 수화음 소리가 들린다. 요즘 전화기 성능이 좋은 것도 문제라면 문제다. 듣고 싶지 않은 얘기까지 너무 잘 들린다. 어쩌면 내 얘기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나와 관련된 사건이 '혐의 없음'이 나왔는데 기사를 쓰기 전 먼저 알려주는 전화인 듯하다. 그리고 잠시 뒤 1~2분도 채 안돼서 기사가 올라왔다. <'000 도의원 무혐의 처분됐다' 전 교육감 상가 조문객 명단 작성의혹 도교육청 비서관 고소건> 네 문장으로 이뤄진 단신 기사, 사건 개요 정도를 적은 드라이한 기사다. 이날 이후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경찰로부터 어떠한 통보서를 받지 못했는데 기사가 먼저 나온 건 유감이다. 아직도 우체국 등기는 오지 않았다. 출장 중 행사가 계속 이어져 회의장 안에 있는데 전화벨이 끊임없이 울린다. 팩트 체크를 하는 기자들의 전화는 그럭저럭 괜찮았는데 지인의 전화를 받고선 밥이 잘 넘어가지 않았다. "어차피 '혐의 없음' 나왔으니까 나랑 친하다고 하고 먼저 가서 인사해. 잘 지내자며 사과도 하고. 지역 사회잖아. 안 그래?"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그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말을 얼버무리고 성급히 전화를 끊었다.
모 의원 SNS에 글이 올라온 건 지난해 8월이었다. 충북교육청 A보좌관과 B비서관이 전 교육감 상가 조문한 교육청 직원 명단을 비밀리에 작성에 교육감에게 정식으로 보고를 하였다는 제보를 받았다며 제보가 사실이라면 사찰이고 '블랙리스트'이며, 매우 심각한 인권 침해라는 글이 주 내용이었다. 전혀 사실무근이지만 경찰은 7개월 만에 기사를 통해 사건 결과를 알게 했다. 뉴시스 보도에 따르면 경찰은 0 의원의 혐의를 입증할 만한 구체적인 내용이나 사찰 명단의 실체가 없다는 점을 들어 사건을 종결처리했다. 사찰 명단의 실체가 없는데 SNS에 어떤 근거로 적었는지... 조사는 누구누구 했는지, 왜 7개월이나 걸렸는지... 등등 궁금증이 밀려왔다. 월요일에 전화를 해보기로 했다.
7개월이란 시간 동안 매일 아침 출근하는 차 안에서 기도를 했다. "하나님 제가 하루도 빠지지 않고 거듭 같은 내용에 대해 기도드리는 건 그만큼 억울하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혹여나 상대방이 의원 신분이기에 '혐의 없음'이 나오더라도 타격감이 없게 하소서. 담대하게 받아들이고 더 큰 세상을 바라보게 하소서." 이렇게 기도했었었다. 내 기도를 들어주신 건지 아닌 건지 타지에서 알게 된 소식은 생각만큼 충격적이지도 화가 나지도 않았다. 다만 기분이 유쾌하지 않은 건 사실이었다. 이 기도 말고 또 하나 매일 했던 기도가 있다. 친정 엄마 손을 잡고 함께 교회를 나가고 싶다는 소원이었다. 아빠 반대로 엄마를 모시고 교회에 나갈 엄두도 내지 못했었는데, 어느 날 "아빠 나 엄마랑 교회 함께 가도 돼?" 했는데 너무나 무심하게 "그러든가" 하시는 게 아닌가? 새신자 소개를 위해 엄마 손을 잡고 함께 강단 앞에 나갔는데 쏟아져 나오는 눈물을 어찌하지 못해 몇 번이고 눈물을 훔쳤다. 겉으로 보기엔 활발하고 강단 있는 성격인 것 같지만 내 마음 저 안쪽에 웅크리고 있는 내 안의 우울과 매사에 예민한 성정이 쌓이고 쌓여 풀 때가 없었는데 내 모든 걸 다 받아주신 분이 하나님이었다. 며칠이 지나 괜찮은 줄 알았는데, 겉으론 웃고 있는데도 그날부터 편두통이 사라지지 않는다. 새벽에 나와 두통약을 먹고 잤는데 다음날이면 한쪽 머리가 콕콕 찌르는 듯이 아프다.
b가 쉬는 일요일. 부모산에 함께 가자고 깨우는데 더 자야 할 것 같다고 하고 몇 시간을 더 잤다. 보통은 금요일 밤이나 토요일 새벽에 일어나 책을 읽고 일요일 밤에 초치기 마감을 하는데 내겐 잠이 더 필요했다. 늦잠을 자고 엄마와 b와 함께 예배를 드리고 왔다. 책 보다 더 귀한 성경과 목사님 말씀.
잠언 4장 23절 그 무엇보다도 너는 네 마음을 지켜라. 그 마음이 바로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마음을 두드리는 목사님 말씀에 또 눈물이 났다. "엄마 손수건 안 가지고 왔어?" 초록색 손수건을 내미는 엄마의 손에 주름이 보인다. 세월의 흔적이다. 수묵화처럼 번진 손수건의 눈물자국은 더욱 선명해졌다. 최근 몇 달간 온 나라가, 아니 온 세계가 영화에나 있을 법한 일들로 가득하다. 어떤 이에게는 희망이자 승리이고, 어떤 이에게는 절규이자 탄식이다. 긴박하게 쏟아져 나오는 뉴스들로 세상이 어지럽다. 어제는 거짓이었던 것이 오늘은 진실로 둔갑하는 세상이다. 그렇지만 믿는다. 진실은 시간이 흐른 후에라도 언젠가는 통한다는 걸. 이럴 때일수록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중심이 필요하다. 예배 후 집에 혼자 계신 아버지를 모시고 상당산성을 걸었다.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린다. 생태 습지에 객~개륵~개륵 우렁차게 울어대는 개구리를 신기한 듯 바라보는 꼬마, 손을 꼭 잡고 비탈길을 꼭 붙어 걷는 연인들, 옆을 잠시 스치기만 했는데도 막걸리와 신김치 냄새가 폴폴 올라오는 나이 지긋하신 할아버지, 응달에 아직 녹지 않은 길을 뒤뚱뒤뚱 걸어가는 아주머니, 언덕배기에서 내려다본 습지 풍경을 바라보며 두부지짐 먹을 생각을 하니 내 마음이 한결 가볍다.
모든 장소에는 생각이 깃들어있다. 남의 차 안에서 귓등으로 들은 사건 결과, 매일 출근길 나만의 생각 보고를 심어주는 내 차 안. 성스럽고 은혜가 가득 찬 예배당, 그리고 오늘 가족과 함께 걸었던 봄날의 산성길. 그리고 매주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거실의 식탁. 이 모든 장소가 내 마음을 지키기 위한 소중한 공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