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브리얼 제빈의 <내일 또 내일 또 내일>을 읽고
잔잔한 호수 위의 오리처럼 겉으론 평온해 보이지만 물 밑에선 끊임없이 발 구르듯 여러 가지 현안이 복잡하고 엃혀 다이내믹한 게 나의 바깥일이라면, 비교적 평온한 분위기로 내게 안정감을 주는 공간이 바로 나의 집이다. 나의 빈자리를 채워주는 친정부모님과 자상하고 착한 b덕분이지만 가끔 집에서도 자두 엄마처럼('안녕 자두야'! 우리 애들이 어릴 때 즐겨보던 만화 속 극성맞은 주인공 엄마) 용광로처럼 펄펄 끓을 때가 있다. 바로 아들이 헤드셋을 끼고 미친 듯이 자판과 마우스를 넘나들며 다다다 다닥 행위 예술을 할 때다.
"그만 좀 해라. 앞으로 15분!"
"내가 알아서 할게. 중간에 나가면 페널티 있어. 이거 한 판만."
정확히 중 1 때부터 게임이 인생의 전부라도 된냥 게임 스케줄에 맞춰 하루를 보내는 아들의 뒷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끓어오르는 나의 피를 진정시키느라 애쓰는 나를 발견한다. 모든 게 네모난 블록으로 이뤄진 공간을 넘나들며 집도 꾸미고 사냥 등을 하는 '마인크래프트'를 할 때만 해도 '음... 창의적인 게임이군. 나름 두뇌 계발에도 좋겠어'하며 게임 캐릭터로 된 레고 블록을 사주기도 했지만, (내가 보기엔) 닥치는 대로 쏘기만 하는 것 같은 슈팅 게임 '발로란트'에 열광하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나면 솔직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나마 고무적인 것은 초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내성적이던 아들이 게임을 통해 친구들과 교류하며 우정을 쌓는 모습이랄까?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으로 "엄마 친구들이랑 PC방 다녀올게" 하며 환하게 웃는 아들의 표정을 보고 나면 '그래 네가 행복하면 됐지. 한참 공부할 때 뒤늦게 게임에 불붙는 것보다 차라리 지금 실컷 해라' 스스로를 달래며 책이나 보자 하던 참이었다. 마음이 동하는 책이 집에 없을 땐, 독서플랫폼 M의 서재를 기웃거리는데 그중 내 눈에 딱 들어온 게 바로 <내일 또 내일 또 내일>이었다. '우리를 절망에서 구원하는 건, 기꺼이 놀고자 하는 의지- 이 책을 플레이하시겠습니까?' 40주 이상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이자 영미권에서만 백만 부 이상 팔린 책이라고 해서 '아 이거다 싶었다' 허나 통상 토요일 새벽부터 아이들이 늦잠을 자고 일어나는 오전까지면 보통 책의 고지가 보인다. 그런데 개브리얼 제빈의 장편소설은 전자책 p958 분량이어서 토요일 반나절을 책을 끼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감인 일요일 저녁 상갓집에 다녀오기 직전까지도 책을 다 읽지 못해 허덕이며 읽은 책이다. 그래서 사실 좀 지쳤다. 꼭 진짜 게임 플레이어가 돼 게임 다음 판을 깨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조리는 그 마음처럼 마감 시간까지 다 읽을 수 있을까? 그런 짜릿함과 짜증이 공존했던 책.
시간이 좀 넉넉히 있었다면 좀 더 음미하며 재미를 느꼈을 텐데... 초중반까지 게임에 중독된 것처럼 시간 가는 줄 몰랐던 주인공 세이디와 샘, 마크스의 젊은 청춘 날의 스케치는 후반으로 갈수록 동력을 잃어 갔다.
아마도 게임에 대한 나의 무지 때문에 더 그럴지도 모른다.
나의 인생 게임 경험을 돌이켜보면 어릴 적 외갓집에 가면 친척 오빠들과 갔던 시골 오락실에서의 '보글보글'과 '1945', '스트리터 파이터'를 1기라 치면, 국민학교 2~3학년 무렵(?)쯤 너무 재밌어서 엄마와 새벽까지 티브이에 연결해놓고 했었던 가정용 '슈퍼마리오'가 2기쯤이라 해두자. 그리고 대학 시절로 훌쩍 건너뛰어 지금의 신랑과 함께 했던 '카트라이더' 정도이니 게임 개발자들의 고뇌와 철학(사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게임에 철학이 담겨있는지 정말 상상도 못 했다) 프로그래밍 과정 등이 리얼하게 펼쳐지니, 사실 게임 용어를 따라가기도 숨에 차고 벅찼다. 하지만 교통사고가 난 뒤로 오랫동안 병원에서 지내며 그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았던 샘이 암에 걸린 언니와 함께 병원에서 보내는 세이지와 병실 휴게실에서 게임을 하며 마음을 여는 장면, 도입부는 정말 감동적이었다. 현실이 아닌 가상의 게임을 통해 서로를 알아가는 두 아이. 영원할 것 만 같았던 그 둘의 우정도 사소한 오해로 금이 가지만 대학생이 된 후 우연히 거리에서 재회를 하게 된다.
게임이 관심사인 그 둘은 게임 개발에 착수하고, 샘의 룸메이트인 마크스까지 합세해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그 후 영미권 젊은 청춘 남녀의 이해할 수 없지만(대마초와 파티 부분) 자유로운 사랑과 이별, 일에 대한 집념과 성공, 실패 스토리는 탄탄하게 짜인 구성과 주인공들의 관점을 넘나드는 드라마틱한 서사, 작가의 재치 있는 표현까지 더해져 책을 집어던질 수 없었다. 나랑 맞지 않는 책인 것 같은데도 자꾸만 궁금하고 궁금해 끝까지 완주한 책. 내가 만약 아들 정도만이라도 게임에 대한 열정이 있었다면 훨씬 더 재미있게 읽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게임에 문외한이라면, 나보다 연배가 좀 있다면, 어쩌면 책을 읽다가 중간에 덮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래도 끝까지 꾸역꾸역 이 책을 완독 한 것은 게임에 열광하는 아들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 영미권 젊은이들의 문화와 사랑을 엿보기 위해, 게임으로 풀어낸 작가의 프로페셔널에 감동했기 때문이다.
게임이 뭐겠어? 마크스가 말했다. "내일 또 내일 또 내일이잖아. 무한한 부활과 무한의 구원의 가능성. 계속 플레이하다 보면 언젠가는 이길 수 있다는 개념. 그 어떤 죽음도 영원하지 않아. 왜냐하면 그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으니까.
개브리얼 제빈의 <내일 또 내일 또 내일> ebook p548
게임 오프가 돼도 다시 리셋할 수 있는 세상, 현실에선 불가능한 일도 가능하게 하는 세상. 어쩌면 게임 속 잔인한 스토리가 버젓이 현실에서 나타나는 미쳐가는 세상. 가장 중요한 건 이 책을 읽고 가상의 아바타와 아이템에 현질(게임 아이템을 카드로 결제해 유료화하는 것)을 외치는 남매를 많이 이해하게 됐다는 거다.
하지만 평소에도 버라이어티 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내겐 이런 류의 책보다는 서정적인 휴먼스토리, 마음의 안정제가 더 필요하다는 걸 절실히 깨닫게 된 한 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