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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보, 달콤한 사탕인가 씁쓸한 덫인가

by 임가영

점심 무렵, 등나무 아래로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든다.

하얀 담배 연기 사이로 오가는 얼굴들에는 심오한 듯하면서도 농담이 묻은 표정이 교차한다.


담배를 피우지 못하는 A는 한 발짝 떨어져 흘려듣는 듯하지만, 신경은 온통 그쪽으로 쏠려 있다.

오늘도 취재 아이템을 찾아 헤매던 그에겐 마감이 가까워질수록 짜증과 조급함이 겹겹이 몰려온다.


“국장한테 또 깨지겠네.”

그 순간, 휴대폰이 울린다.


“좀 조심스럽긴 한데요, 이거 아세요?”

“뭔데요?”


손가락이 춤을 추듯 바쁘게 움직인다.



한때는 ‘제보’라는 이름으로 온갖 정보가 쏟아지던 시절이 있었다.

“너한테만 알려줄게.”

속삭이던 A의 말속에는 경쟁자 B의 치부가 담겨 있었다.


혈기왕성했던 그는 망설임 없이 B의 부정행위와 음주 이력을 기사에 녹여냈다.

결국 B는 징계를 받고 승진에서도 밀려났다.


그런데 1년 뒤, A가 울면서 전화를 걸어왔다.

"우리 집안인 걸 몰랐냐"는 원망이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일이라지만 마음 한켠의 찝찝함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며칠 뒤 알게 된 사실은 충격적이었다.

제보자는 다름 아닌, 내 기사로 곤욕을 치렀던 B의 사촌 동생이었다.

좁은 지역 사회에서 공무원 가족이 많다지만, 일이 이렇게 꼬일 줄은 몰랐다.


처음의 제보는 개인의 영달을 위한 것이었고,

1년 뒤의 제보는 가족의 복수심이 덧입혀진 덫이었다.



렇다면 그는 대중들에게 어떤 기자로 기억될까.


그 일 이후 한동안 슬럼프에 빠졌다.

사건의 진위, 사회적 책임, 팩트와 진실을 떠나 자신이 그저 이용당한 ‘도구’였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공정과 정의 따위는 없었다.

그는 ‘제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작전에 불려 나온 도구였을 뿐이다.


그럼에도 멈출 수 없었다.

쏟아지는 제보는 자신만 알고 있는 달콤한 사탕 같았다.

몇 줄의 기사가 누군가의 지지를 얻기도 했으니까.


칼날 위를 걷는 듯한 긴장감, 대중의 관심은 흥분과 쾌감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어두운 에너지가 조금씩 몸속에 쌓여가는 느낌은 지울 수 없었다.


어느 날, 낯선 메시지가 도착했다.

“네 기사 때문에 내 인생은 망가졌어. 너 애들이 어디 있는지 알지.”


그 순간 그의 심장은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금도 그는 종종 이런 질문을 듣는다.

“저 기억하세요?”


그럴 때면 어색한 웃음으로 대답한다.

“제 일이었는걸요.”


그렇지만 단 한 번도 자신의 일을 후회해 본 적은 없다며, 마음속 파문을 스스로 다독인다.

말에 책임질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치권은 경제가 어렵다면서도 정쟁으로 소란스럽다.

교육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발언 속에도 ‘제보’는 빠지지 않는다.

주장을 뒷받침하거나 정면 돌파를 피해가기 위한 도구처럼 쓰인다.


과연 그들이 말하는 ‘제보’가 진정한 공익 제보일까.

그 속내의 구린 냄새까지도 대중이 곧이곧대로 믿어줄 것이라고 착각하는 건 아닐까.


니체는 『권력에의 의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실은 없고, 해석만 있다.”


완독하지는 못했지만, 그 말은 절절히 다가온다.

보이는 것, 들리는 것, 인지하는 것이 진짜 사실일까?

어쩌면 권력자의 궤변, 인간의 욕망, 혹은 목적을 위한 도구로 재단된 해석일지도 모른다.


즘은 진정한 소통과 타협이 사라진 세상처럼 느껴진다.

내 편이 아니면 적으로 규정되는 현실.


나의 목소리조차 누군가의 녹취록 작물로 쓰일까 두려워, 한마디를 내뱉기 위해 뇌를 풀가동하다 보니 피로감이 몰려온다.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글을 쓰는 것조차 누군가는 부적절하다 말할지 모른다.

그래도 나는 써야 한다.


숨을 쉬어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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