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시대, AI

by 소서




AI를 주제로 한 책들이 쏟아져 나온다. 서점에도, 알고리즘에도. 마치 이 흐름을 외면하는 순간 시대에서 낙오될 것처럼, 익히지 않으면 곧바로 무능해질 것처럼 나의 시선을 조급하게 몰아간다. 나는 그 압박을 거부하지 못한다. 혁신은 분명했고, 나는 그것을 비교적 빠르게 체험했다. 동시에 나보다 더 똑똑한 사람들에게 이 도구가 쥐어지는 순간, 나의 쓸모가 얼마나 쉽게 밀려날 수 있는지도 직감했다.


그래서 책을 읽고, 뉴스를 찾아보고, 사용법을 익혔다. 그것은 성장에 대한 열망이라기보다, 뒤처지고 있다는 감각을 들키지 않기 위한 몸짓에 가까웠다.


더 빠르게, 더 많이, 더 잘.


이 주문을 반복하며 나는 변화에 적응했다기보다, 적응하고 있다는 증거를 수집하고 있었다. 숨을 고를 수 있는 순간은 다음 불안이 도착하기 전까지의 유예일 뿐이었다.




이상하게도 질문은 늘 그 틈에서 시작됐다.

내가 어디까지 와 있는지보다, 어떤 방향으로 달려왔는지에 대한 질문이었다.


우리는 인공지능과의 공존이라는 새로운 문법에 매몰되어 정작 더 오래된 숙제인 '인간 사이의 유대'라는 언어를 잊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기계와의 불협화음을 교정하려는 노력만큼, 타인과의 불화를 매듭지으려는 성찰은 더 이상 들리지 않는 적막에 잠기고 있진 않은가.


발전과 성장을 외치며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서로를 앞질러 왔다. 급격한 성장은 늘 통증을 남긴다. 그러나 문제는 그 통증을 돌볼 시간 없이 어른이 되어버렸다는 데 있다. 상처 입은 채로 성장한 어른들은 자신의 아픔을 숨기는 데 익숙해졌고, 타인의 상처를 들추는 데에는 점점 무감각해졌다. 스스로를 치료하기보다, 더 크게 다친 타인을 발견하며 안도하는 방식으로 균형을 맞춘다.


그렇게 상처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풍경이 되었고,

우리는 그 풍경 속에서 서로를 스쳐 지나간다.




세상은 놀라울 만큼 정교해졌지만, 인간은 그만큼 예민해졌다. 고해상도의 세계에 익숙해진 눈은 더 이상 결함을 배경으로 넘기지 못한다는 듯이. 작은 지연에도 분노하고, 사소한 실수에도 책임을 요구한다. 이제 완벽함은 목표가 아니라 기준이 되었다. 그 기준에서 벗어나는 순간, 설명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효율이라는 이름의 규칙은 단순하고, 단호하다. 느린 것은 배려의 대상이 아니라 제거의 대상이 된다. AI 시대를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직업의 목록을 정리하고, 필요한 역량을 나열한다.


더 정교한 프롬프트, 더 빠른 적응력, 더 유연한 태도.


그러나 정작 빠져 있는 질문이 있다.


우리는 이 도구를 통해 무엇을 더 잘하고자 하는가.

경쟁력 있는 개인이 되는 것인가,

아니면 함께 견딜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인가.


내가 두려운 것은 인공지능의 완성도가 아니다. 오히려 그 완성도를 당연한 기준으로 받아들이게 될 인간의 태도다.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세계, 결핍과 허점을 설명해야만 존재를 인정받는 세계. 이미 우리는 타인의 작은 실수가 나의 시간과 공간을 침해한다고 느끼는 데에 익숙해지고 있다. 길 위에서 느리게 걷는 사람에게 불편을 느끼는 나 자신을 발견했을 때, 나는 기술이 아니라 마음의 속도가 먼저 바뀌고 있음을 실감했다.




인공지능은 인간에게 더 정교한 지능을 제공할 것이다. 어쩌면 지능이 더 이상 개인의 자산이 되지 않는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 낮은 지능조차 기술이 보완해 주는 세계에서, 인간은 굳이 성장하지 않아도 되는 존재가 된다.


성장의 필요가 사라질 때,

우리는 무엇으로 스스로를 단련할까.

무엇으로 서로를 이해할까.


계산기가 사칙연산을 대신하고, 세탁기가 손빨래를 밀어냈듯이, 기술은 늘 인간의 수고를 덜어왔다. 그 덕분에 우리는 시간을 얻었다. 그러나 그 시간은 관계로 흘러가지 않았다. 여유는 철저히 개인의 소유가 되었고, 타인의 속도는 그 여유를 위협하는 요소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편리함은 관대함으로 이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불관용을 정교하게 만들었다.


음식이 빨리 나오는 세상이 되어도, 키오스크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는 시간은 용납되지 않는다. 인터넷이라는 가면은 생각을 검열하지 않아도 되는 공간을 만들었고, 혐오와 조롱은 비용 없이 소비된다. 여유가 늘어났음에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방해물을 찾는다.


그리고 그 방해물은 대개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다.




여유는 배려를 키울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여유는 대부분, 혼자만의 권리가 되었다. 사람들은 언제 자신이 방해물이라는 표적이 될지 몰라 조용히 몸을 낮췄고, 따뜻함은 위험한 태도가 되었다. 앞사람의 느린 걸음을 기다리고 싶어도, 그 기다림이 또 다른 누군가의 시간을 침해할까 봐 우리는 스스로를 재촉한다.


그렇게 배려는 선택이 아니라 계산이 되었고,

모두가 눈치를 배우기 시작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더 빠르고 정교한 지능의 기술일까. 어쩌면 지금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사랑의 감각일지도 모른다. 이 감각은 감정이 아니라 태도에 가깝다. 호감, 애정 판단 이전에, 불편함 앞에서도 사랑을 제거하지 않겠다고 선택하는 것.


인공지능은 따뜻함을 대체할 수 없지만, 우리가 따뜻함을 사용할 수 있는 조건은 바꿔 놓는다. 우리가 얻은 시간을 어디에 쓰느냐에 따라.


이토록 편리해진 세상에서, 생겨난 여유의 틈을 누군가를 미워하는 데 사용하는 것은 지나치게 손쉬운 선택이다. 우리는 멈출 수 있고, 속도를 조절할 수 있으며, 넘어졌다면 일어나지 않고 잠시 누워 있을 자유도 있다.


여유란 어쩌면, 계속 달리지 않아도 되는 권리다.

서로에게 머물 자리를 허락하는 일이다.




시대를 결정하는 것은, 기술이 아닌 기술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가 되어야 한다.


AI시대가 아닌,

우리가 어떤 인간으로 남을 것인가를 묻는 우리의 시대.


이 시대의 성취가 효율이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인간으로 남아 있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는지로 가늠되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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