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의 총량

위로 작동 방법

by 소서




눈물의 총량이 있다는 생각은, 내가 울기 시작한 날이 아니라 울지 못하게 된 날에 가까워서 생겼다. 한동안은 어떤 이야기에도 반응하지 않던 내가, 어느 시점부터는 아주 얇은 장면 하나에도 속절없이 무너졌다가, 또 어느 순간부터는 반대로 아무것도 흘러나오지 않는 상태에 이르렀다.


그때 나는 울음을 감정의 과잉으로 부르는 말이 얼마나 편한가를 알았다. 울음은 과잉이 아니라 마지막까지 유지되던 균형의 파열이다. 말이 오기 전에, 이해가 서기 전에, 몸이 먼저 붕괴의 방향을 선택한다.


물은 넘쳐서가 아니라, 새기 시작해서 흐른다.


처음에는 눈물이 거대한 사건의 전유물인 줄 알았다. 비극, 상실, 사랑처럼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만한 이유가 있어야만 울 수 있다고. 하지만 나를 무너뜨린 것은 대개 그럴듯한 이름을 달지 못한 것들이었다. 방심이라는 좁은 틈으로 들어온 미세한 충격들.


멈춰 선 횡단보도 앞의 공백,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스친 누군가의 등, 사건이라 부르기엔 작아서 기억에서 쉽게 빠져나가지만, 작기 때문에 더 오래 누적되는 것들. 견딤은 늘 큰 장면에서가 아니라 일상의 표면에서 진행되고, 그러다 어느 밤 한꺼번에 의미를 요구한다. 그 요구가 무서운 것은, “왜 이렇게까지 했는가”라는 질문이 아니라 “무엇을 그렇게까지 숨겨왔는가”라는 질문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오래 쓰던 컵이 있었다. 금이 간 것을 알고 있었지만 사용에는 큰 문제가 없었고, 손에 익은 물건이라 버려야겠다는 생각이 쉽게 들지 않았다. 금은 신호였지만, 신호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동안엔 결정적이지 못하다. 균열은 깨지기 전까지는 대개 무늬로 분류된다. ‘금’이라는 사실조차 오류로 판정되지 않는 한, 일상은 아무 일 없다는 쪽으로 계속 진행된다.


그러다 한순간에, 모든 것이 깨지고 순식간에 쏟아진다.


깨진 컵을 늘 하던 방식으로 쥐려는 순간, 내 손에 다정하던 형태와 온기는 이미 사라져 있었다. 남은 것은 날카로운 단면뿐이었고, 손바닥에 얕은 통증이 번졌다. 피가 나오자 비로소 금은 사건이 되었고, 감각은 뒤늦게 현실을 따라왔다. 컵이 갑자기 깨진 게 아니었다. 서서히 균열을 알리고 있었는데도, 나는 하루를 버티고 다음 밤을 견디는 쪽을 택했다. 깨어지고 나서야 알아차리는 방식으로.


물은 더는 담기지 못한 채 흘러내렸고, 담아두려던 마음의 고집은 피처럼 손을 적셨다.

손의 피가 눈의 물로 옮겨간다.




사람은 가장 약한 곳부터가 아니라 가장 오래 정상으로 유지해 온 곳부터 무너진다. 약한 곳은 일찍부터 보호받지만, 오래 참아온 곳은 영원히 정상으로 취급된다. 눈물은 그 정상성이 더 이상 유지되지 않는다는 소리 없는 진단서다. 나는 그 진단서를 자주 구겨 숨기면서도 동시에, 그것이 계속 발급된다는 사실로 버텨왔다. 흘러나오면 그래도 어딘가로는 흘러가니, 적어도 고이지는 않을 것이라 믿었다.


그런데도 눈물은 마른다. 마름이 언제나 회복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고갈은 종종 치유처럼 보인다. 더는 흔들리지 않는 것 같고, 더는 무너지지 않는 것 같고, 감정이 정리된 것 같은 얼굴을 한다.


하지만 내게 마름은 정리보다 폐쇄였다.


처음에는 아픔을 씻어내던 물이, 어느새 아픔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의식으로 바뀌고, 그 확인이 반복되면 물은 더 이상 어떤 이동도 수행하지 못하는 투명한 습관으로 남는다.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배출을 잃고 형태를 바꾼다.


흘러내리던 시절의 슬픔이 물이었다면, 마른 시절의 슬픔은 침전물이었다. 고여 있던 것들은 시간이 지나도 정리되지 않고,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서 더 단단해진다.




나는 거울 앞에서 울음을 애써 불러낸 적이 있다. 얼굴의 근육은 오래 쓰지 않은 기능처럼 어색하게 굳어 있었고, 그 어색함이 감정의 부재보다 더 현실적이었다. 슬픔은 분명히 고여 있는데, 그것을 밖으로 내보낼 통로만 닫혀버린 상태. 그 침묵이 울음소리보다 잔인했던 이유는, 울음이 최소한 흐름이라면 침묵은 정체이기 때문이다.


막힌 곳에서는 아무것도 지나가지 못한다.

고이는 것은 스스로 썩는다.


그제야 ‘위로’라는 단어가 내게 무엇이었는지 되묻게 된다. 나는 위로를 받은 적이 있었을까. 건넨 이들은 분명히 있었다. 그들의 온기와 손끝의 조심스러움도 기억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들이 충분했는가가 아니라, 그 온기가 내 안에서 위로라는 기능으로 변환된 적이 있었는가이다.




위로는 단순히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받는 쪽의 내부에서 어떤 작동을 거쳐야만 한다.


들어오는 체온을 의미로 바꾸는 변환,

의미를 오래 머물게 하는 저장,

지나가는 감정을 끝까지 통과시키는 통로.


그 기능들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으면, 위로는 따뜻한 사실로 남을 뿐 실제 작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나는 위로 앞에서 자주 수용이 아니라 해석을 먼저 했다. 누군가의 “괜찮아”를 들으면 그 말을 위로로 붙잡는 동시에, 그 말이 요구하는 ‘정상’의 상태로 복귀하려 했다. 위로와 복귀의 명령은 종종 같은 문장으로 말해지고, 나는 그 둘을 분리하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


‘울지 마’, ‘괜찮아’라는 문장이 상처가 되는 순간이 있다면, 그 문장이 냉정해서가 아니라 내가 그 문장을 규율로 받아들였을 때다. 사회가 사람에게 돌아가라고 말하기 전에, 나는 이미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감정이 올라오면 그것을 살아 있는 흐름으로 두기보다 고장으로 진단하고 수리의 절차로 옮겨버렸다. 그리고 그 진단은 대부분 타인이 아니라 내가 내린 것이었다.


위로의 머묾이 부재했던 것인지, 머묾이 존재했는데도 내가 그것을 머묾으로 인식하지 못했던 것인지 확신할 수 없어졌다. 위로를 받는다는 것은 결국 한 시기 동안 정상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되는 권한을 자신에게 허락하는 일인데, 나는 그 권한을 쉽게 부여하지 못했다. 나는 너무 빨리 제어장치를 되찾았고, 혹은 되찾아야만 한다고 믿었다. 그 서두름이 위로의 기능을 내 안에서 가장 먼저 무력화시켰다.




위로는 말을 잘 고르는 능력이라기보다, 감정이 끝까지 자기 길을 갈 수 있도록 시간을 내어주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행위가 작동하려면, 받는 쪽에도 감정이 지나가는 동안 자신을 고장으로 취급하지 않는 어떤 장치가 필요하다. 나는 그 장치가 부족했던 것인지, 아니면 그것을 마련할 기회 자체가 없었던 것인지 아직 모른다.


그럼에도 한 가지는 선명하다.

내가 위로를 받기 위해서조차 늘 조급하게 정상성을 호출해 왔다는 사실이다.


눈물의 총량이 정해져 있는지는 언제까지나 가설에 가까운 영역이다. 내가 확신할 수 있는 부분은 흘리지 못한 것은 사라지지 않고, 내부에서 형태를 바꿔 계속 존재한다는 점이다. 물이 돌이 되고, 돌이 침전물이 되는 동안, 나는 그것을 고장으로 여기며 더 단단히 봉인했다.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총량을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흘릴 수 없었던 것들의 경로를 추적하는 일이다. 울음이 다시 돌아오든 돌아오지 않든, 중요한 것은 내가 내 안의 고임을 ‘고장’으로 부르지 않는 순간이다. 위로는 그때서야 비로소 가능해진다. 내 안에서 그것이 의미로 변환되지 못했던 구조를, 이제는 더 정확히 바라본다. 그 정확함이, 내가 스스로에게 위로를 허용하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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