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료를 끝낸 암환자들은 3개월 혹은 6개월마다 만나야 되는 교수님과의 면담이 항상 초조하고 긴장됐을 것이다.
언니 또한 그랬다.
한국에 돌아온 뒤 언니는신촌에 있는 대학병원에서 경과에 대한 체크업을 시작했는데, 교수님을 만나러 갈 때마다 얼음장처럼 차가워진 손을 내밀며 만져달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언니 앞에 대기환자가 줄어들수록 초조해진 언니는 "교수님이 안 좋다고 할 것 같아."
"느낌이 안 좋아..."라는 등의 말을 몇 번이나 했었고, 병원 오는동안 신호가 많이 걸린다거나 유난히 차가 막힌다거나 할 때면 언니는 늘 안 좋은 상황에 대입시키곤 했다.
그럴 때면 나는 "왜.. 무서워? 그러게 평소에 내 말 좀 잘듣지~." "그러니까 빵 좀 그만 먹으라고~~."등등의 말을 농담처럼 툭툭 던졌다. 그러나나 역시 긴장되고 무서운 건 매 한 가지였다. 그렇게 별일 아닌 듯 무심하게 말해놓고 내 심장이 어쩌면 언니보다 더 쿵쾅거리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그 불안함을 잠재우기 위해 대기하는 내내 나는 핸드폰으로 성경구절을 읽었고, 말도 안 되는 기도를 벼락치기하듯이 드리곤 했다. 교수님을 만나기 전, 무엇에라도 기대고 의지하고 싶었던 하나의 의식과도 같은 것이었고 언제부터 왠지 안 하면 나쁜 일이 일어날 것 만 같은 징크스가 되어버렸다.
"000님 들어오세요~" 언니와 나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것처럼 잔뜩 긴장한 채 교수님 방으로 들어갔다.
"000 씨 몸은 좀 어때요~~?""그동안 두통은 없었나요.."교수님은 모니터 화면을 응시한 채 손으로는 바쁘게 마우스를 움직이고 있었다.
"네.. 두통도 없고, 미각도 거의 돌아왔어요." "그리고 교수님 저 요즘 골프도 치러 다녀요~."
긴장한 티를 내기 싫어서였을까 언니는 괜한 말까지 덧붙였고, 역시나 교수님은 아무런 반응도 해주지 않으셨다. 한참을 모니터만 응시하던 교수님이 드디어 입을 떼셨다.
"아~~~~~~~~~~~다 괜찮고요~~."
"3개월 뒤에 봅시다"
'YES!!!'
교수님의 그 말 한마디에 언니는 다시 3개월의 삶을 선물 받았다.
"와~~ 감사합니다 교수님~ 정말 너무 감사해요."
이게 과연 교수님께 감사할 일인가 싶으면서도 언제나 감사하다는 말이 자동으로 우리 입에서 동시에 툭툭 튀어나왔다. 그러면서도,
'왜 교수님은 뭐라도 있는 것처럼 저렇게 뜸을 들이다가 우리의 진을 다 빼놓은 다음 결과를 말해주실까' 매번 불만이었다.
하지만, 결론은 '아무렴 어때'
언니는 3개월의 삶을 선물 받을 때마다 그 시간들을 제법 알차게 보냈다.
운동신경 제로인 언니가 골프를 배우기 시작했고, 집에서 TV를 볼 때마다 틈틈이 스텝퍼를 했으며, 1주일에 2~3번씩 PT를 받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말라깽이 었던 언니의 몸에도 조금씩 근육이 붙었고, 운동을 하고 오면 탄탄해진 허벅지를 나에게 자랑하곤 했다.
그리고, 20년 넘게 술을 빼놓고는 재미난 일들이 생겨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언니의 삶에 술이 빠진 자리를 골프라는 신세계가 새롭게 차지했다.
인간관계에서도 스트레스받을 것 같은 지인들과는 거리를 두었고, 밝고 유쾌한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반면, 바뀌지 않았던 나쁜 습관도 있었다.
쌀을 극도로 싫어했던 언니는 아침은 꼭 빵을 고집했다. 나는 그것 때문에 언니와 자주 언쟁을 벌였는데, 부작용으로 생긴 입마름 때문에 밥알이 목에서 안 넘아간다는 이유를 대며 한식을 거부하면서 초밥에 붙어 나오는 샤리는 아주 잘 먹었기 때문이었다.
보통 암환자들이 제일 먼저 개선하려고 노력하는 식습관과는 다소 거리가 멀었던 언니의 식단을 나는 어떻게든 설득해서 바꿔보려 했지만, 빵이 주식인 서양인들을 빗대면서까지 언니의 고집을 합리화시키는데 또 듣다 보면 아예 틀린 말도 아니어서 더 이상 언니의 논리를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무엇보다 제일 큰 문제는 한 모금씩 마시던 맥주가 어느 날부터 한 잔이 되어갔고 끝끝내 그것을, 언니의 고집을 막지 못했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때부터 언니의 몸은 조금씩 암에 걸렸을 때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었는지 모른다.
나는, 언니와 함께 한지 거의 7개월 만에 언니 곁을 떠나 드디어 나의 생활권으로 돌아왔다.
언니와 아빠가 아프면서 정리했던 샵을 다시 새롭게 오픈했고 생각보다빠르게 본래의 위치를 찾아갔다.
이젠 아침마다 빵을 먹지 않아도 되었고, 언니의 스케줄대로 움직이는 수행비서를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되었다. 내가 언니를 떠나 지내던 곳은 막냇동생이 사는 동네였다. 우리는 세 자매인데 각자 성격이나 취향이 제각각이고 추구하는 삶 또한 많이 달랐다. 중간에 끼인 나는 언니와도 제일 가까웠고, 동생과도 제일 가까웠다. 아니 어찌 보면 힘들 때 언니가 나를 찾듯, 나도 힘들 땐 동생을 더 많이 찾았으니 오히려 언니가 아프기 전까진 동생과 좀 더 친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
내가 언니 이야기를 들어주고 맞춰줬듯이 동생이 나에겐 그런 존재였다. 동생과 시간을 보내면서 '아~~ 이래서 언니가 나한테 기댔던 거구나~~'라고 느껴지는 편안함이 있었다.
아무래도 일을 시작하고 언니와도 떨어져 지내다 보니 자연스레 언니와의 사이가 예전보단 조금 소원해지기 시작했고, 수시로 서울에 놀러 오라고 졸라대는 언니에게도 더 이상 나는 응해주지 않았다.
나는 그동안 언니 곁에 있으면서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 같았던 그 호사스러운 생활이 전혀 그립지가 않았다. 그렇게 각자의 생활로 돌아간 지 어느덧 1년이 넘어가고, 언니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점점 나의 관심에서 흐릿해져 가고 있던 때, 언니의 정기검진이 돌아왔다.
언니를 태우고 병원으로 향하던 그날은 유독 차가 밀렸고, 언니는 그날따라 신경질이 날 정도로 까칠했다.
혼자 지내면서 술도 점점 많이 마시고 관리도 잘하지 못한걸 뒤늦게 후회하면서 이번엔 결과가 정말 좋지 않을 것 같다고 투덜거렸다. 언니가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고 지내던걸 알았던 나는 그 투덜거림을 다독여줄 마음이 전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짜증이 났던 것 같다. 그날은 나조차도 마음이 예전과 많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000 씨~~ 몸은 좀 어때요..." 교수님은 여전히 모니터를 보고 계셨다.
"아~~ 괜찮아요.. 크게 이상한 건 없는 것 같은데.. " 언니의 대답이 그날따라 자신 없게 들렸다.
그리고,
교수님의 침묵은 생각보다 더 길게 이어졌다.
예전보다 다른 분위기의 침묵이 나의 심장을 더 세게 요동치게 했다.
"음~~~~~~~코 뒤에 뭐가 살짝 보이는데~~"
"아무래도 재발된 것 같네.."
쿵!!!
나는 차마 언니를 보지 못했다.
눈물도 나지 않았다.
그날의 모든 것들은 이 말을 듣기 위한 복선이었던 것 같았다.
언니도 울지 않았다.
교수님께 항암을 바로 시작해야 한다는 말과 밖에서 간호사와 치료 스케줄을 잡으라는 말을 듣고 우리는 진료실을 나왔다.
받아들이기 힘들었고 믿기지도 않았다. 우리는 영상 판독이 잘못되었기를 바라면서 다른 병원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병원을 나온 우리는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서로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날만은 언니가 불쌍하거나 가엷지 않았다. 힘든 치료를 받고 좋아졌음에도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 다시 재발된 언니가 오히려 밉고 원망스러웠다.
'언니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나는 또 언니 곁을 지켜야 하는 건가..
재발은 완치가 없다던데..
언니가 다시 암과 싸울 수는 있을까..
그럼 나는 또 샵을 정리해야하나..
앞으로 경제적인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하지..
아~~~~ 내가 그렇게 기도했는데.. 역시 하나님은 안 계시는구나..'
두 번은 못할 거라고 누누이 얘기했던 언니의 지난 투병생활을 다시 해야 한다니.
당연히 언니에 대한 걱정이 앞섰지만, 그 뒤로 내가 해야 할 앞으로의 것들에 대한 걱정도 크게 다가왔던 것 같다.
잠시나마 암환자가 아니었던 언니의 시간은 그렇게 끝이 났고, 짧았던 나의 자유도 끝이 났다.
상해에서 돌아온 뒤 다시 찾은 1년 8개월 정도의 행복은 그날로 산산조각이 났고 완전관해를 꿈꾸던 언니의 희망도 저 멀리 도망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