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렸을 적부터 어려움을 겪거나 불행과 맞닥뜨릴 때면, '이건 꿈이고 연극이야. 막이 내리거나 아침이 되면 다시 제자리를 찾거나 모든 것들이 해결되어 있겠지'라고 현실을 부정하고 회피했었다. 물론 어떠한 일도 해결되지 않을 자기 암시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그때처럼 언니의 암도 잠에서 깨고 나면 사라질 악몽에 지나지 않는 거라 여러 날 생각했었는데 정작 언니의 암이 사라졌다고 했을 때는 행운 따위와는 거리가 멀었던 지난 세월 탓에 드라마 같은 행운이 내 것 같지 않아 언니의 회복을 남몰래 불안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어찌 됐든 언니는 2년이 채 안되어 암이 재발되었고, 결국 불안함과 공존하던 행운도 일장춘몽처럼 깨져버렸다. 그리고 하필이면 그 시기에 코로나라는 세계적 재앙이 함께 터져버렸다.
중국을 갈 수 없게 된 언니는 할 수 없이 2년 전 만나 뵀던 교수님을 다시 찾았다.
그 교수님은, 부작용에 대해 잔인할 정도로 사실적이게 말씀해 주셔서 언니를 울리고 중국행을 결심하게 했던 장본인이면서 비인두암 방사선과 명의이시기도 했다. 다시 찾은 교수님은 언니를 기억하는 것 같았다.
나라면, 자기를 스킵하고 중국에 가서 치료를 받고 온 환자인 것도 별로일 텐데 하필 재발까지 되어서 2년 전보다 훨씬 안 좋은 케이스로 돌아온 환자라니. 내가 생각해도 반가울 리가 만무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교수님이 마지막 희망이었고 언니를 받아주지 않더라도 원망은커녕 바짓가랑이라도 잡아야 할 형편이었다. 미운털이 잔뜩 박혀있을 거라 지레 짐작하고 잔뜩 쫄아있던 언니에게 교수님은 2년 전보다 부작용에 대해 더더 자세히 설명하셨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믿고 치료를 받아보겠다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씀해 주셨다. 그때 교수님의 그 말 한마디가 언니와 내게 얼마나 큰 안도감을 주었는지 모른다.
"네! 저 교수님이 하라는 대로 열심히 치료받을게요.."
언니는 이미 순종적인 환자 모드로 돌아와 있었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희망에 찬 말들만 줄줄이 쏟아냈다.
중국에선 먹고 싶은 것도 못 먹어서 엄청 힘들었는데 이젠 언니가 먹고 싶다는 건 뭐든 다 구해줄 수 있어.
입원 안 해도 되고 편하게 언니방 침대에 누워서 버퍼링 걱정 없이 보고 싶은 영화나 드라마 다 볼 수 있지.
친구들도 언제든 만날 수 있고, 언니가 좋아하는 반신욕 마사지 매일 하면서 치료받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 지난번처럼 몇 달만 치료받고 나면 다시 예전처럼 쌩쌩해질 거니까 걱정하지 마.
어차피 지금은 추워서 골프도 못 치고 코로나 때문에 해외도 못 나가잖아.
돈 많은 부자들도 결국 집구석에만 있어야 되는데 언니가 치료받는 동안 아무것도 못한다고 한들 억울할 것도 없네 뭐.
많은 것들이 정체되어 있었던 그 시기가 오히려 언니의 투병에는 위안이 되었다.
나만 힘든 게 아니라는 생각이 때론 나를 버티게 해주는 힘이 되기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다음날부터 나는 언니의 몸보신을 위해 장금이가 되었고, 언니는 치료와 회복을 위한 의료기기들을 하나둘씩 방안에 들여놓기 시작했다. 모션베드와 침대식탁, 족욕기, 세라젬, 온열기, 안마기, 온장고.. 그렇게 언니의 방은 아주 잘 갖춰진 vip병실로 바뀌었다.
언니는 본인이 처해진 상황에 적당히 타협한 듯 보였고, 나는 이번에도 언니가 잘 이겨내주길 바랐다. 하지만 중국에서처럼 순조롭고 씩씩하게 헤쳐나가 주길 바랐던 나의 바람은 생각보다 너무 빨리 무너졌다.
항암과 방사선 치료가 시작되자마자 말로만 듣던 부작용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우리는 알고는 있었지만 설마설마했던 예상치 못한 상황에 혼란스러워졌다. 제일 먼저 시작된 부작용으로 귀에 이명이 생겼는데, 언니의 표현을 빌리자면 귓속에 귀뚜라미 몇백 마리가 살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귀에서 하루종일 울어대는 통에 암통증 때문이 아닌 정신병에 걸려 죽을 것 같다고 했다. 이명이 생기면서 청력 손실도 시작되었고 하루가 다르게 언니의 귀 상태는 망가져갔다. 언니의 신경이 예민하고 날카로워진 것 역시 당연했다. 치료 회차가 늘어갈수록 귀 때문에 일상생활이 힘들어진 언니 방에선 백색소음이라 불리는 asmr소리가 수시로 삐져나왔다.
어느 날은 귀뚜라미 우는소리, 어느 날은 타닥타닥 모닥불소리, 어느 날은 거세게 퍼부어대는 소나기 소리.
새까맣게 타들어가던 내 맘을 알리 없던 언니는 실낱같은 희망도 품지 않았던 걸까. 새어 나오는 불빛 한 점도 허용 안 한 컴컴한 공간 안에 "솨~~~ 솨~~ 솨~~" 거칠게 퍼부어대는 소나기 소리만이 방안을 가득 메웠고, 그 소리에 익숙해질 즈음 빗소리에 묻혀 있던 언니의 흐느끼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언니는 그렇게 며칠을 빗소리에만 의지한 채 침대에 누워 괴로움을 토해내고 있었다.
언니가 너무 가엷다고 생각했던 날의 시작이었다.
언니의 귀가 고요함을 잃고부터 언니는 한동안 아침식탁에서도 헤드폰을 썼고, 어쩔 수 없이 우리의 대화도 점점 사라져 갔다. 힘들어하는 언니를 혼자 둘 수 없었던 나는 다시 가게를 정리하고 언니 집으로 들어왔다. 내 핸드폰 캘린더엔 언니의 병원스케줄과 언니와 관련된 여러 일정들로 빼곡하게 채워졌고, 어느 날 정신 차리고 보니 나는 N극과 S극처럼 언니라는 자석에 덜커덕 붙어있었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니체가 말했다던데 언니는 기특하게도 이명을 망각해 버리는 요령을 스스로 터득했다. 한게임에서 고스톱을 칠 때, 골프 라운딩을 나갔을 때(공이 너무 안 맞아서 화가 나면 이명도 안 들린다고 함), 지인들과수다를 떨 때, 미치게 재밌는 미드나 영드, 중드를 볼 때(한국드라마도 자막은 필수).
요령과 망각이 만나 대단한 시너지를 이루었고 침대에서 혼자 울던 언니는 단순하고 자기중심적인걸 좋아하는 성향처럼 본인이 만들어낸 퍼즐에 귀뚜라미 소리마저 잘 끼워 넣고 있었다.
문제는, 이명이랑 조금 친해졌더니 중이염이 시도 때도 없이 생겨나서 결국 고막에 튜브를 삽입했고 그 뒤부터는 고막에 수시로 물이 차서 언니의 귀는 몇 날 며칠을 물속에 잠겨있어야만 했다.
양쪽귀에서 귀뚜라미가 울어대고 한쪽귀는 잘 안 들리고 한쪽귀는 물속에 잠겨 있고.
나라면, 나라면 어땠을까. 언니가 힘들어할 때마다 많은 순간 생각해 보았다. 나라면, 절대로 언니만큼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의 언니보다 몇십 배 짜증을 내고 있었겠지.
언니는 망각의 동물이면서 적응의 귀재이기도 했다. 언니가 주기적으로 다니던 이비인후과에서 물을 빼고 왕따시만 한 귀지를 빼낸 날이면, 기분이 좋아져서 나에게 달달한 소갈비를 사주었다.
그때도 지금도 언니를 생각하면 '참 아이같이 순수하게 투병생활을 했구나' 이런 생각이 든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절대 언니보다 잘 헤쳐나갈 자신도 용기도 없다. 그래서 종종 언니에게 했던 말이
"나는 언니처럼 암과 싸우지 못할 거야. 나는 피 뽑는 것도 너무 싫고 항암 할 자신도 없어."
"내 귀에 이명이 생긴다면 나는 그냥 미쳐돌아버리지 않을까?"
언니가 답했다.
"응. 맞어. 내가 생각해도 너는 못 견딜 꺼야. 그러니까 절대로 절대로 암에 걸리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