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살아오면서 삶이 퍽퍽한 어느 날엔 타인의 불행을 보며 나를 위로했고, 조금이나마 풍요로워진 어느 날엔 그나마 잠시라도 그들에게 마음의 동정을 보내며 으스댄 적이 있었다. 적어도 나의 세상살이는 그랬다.
나에겐 일어나지 않을, 나만 아니면 될, 남의 불행 따위에 감정을 나눠줄 여유조차 없이 나름 빡빡하고 건조하게. 특별히 튀거나 모나지 않게 착하다는 평판에 기대어 둥글둥글하게 딱 그만큼만.
그런데, 그 불행이 돌고 돌다 내 가족에게 나에게 오고 만 것이다.
너무 안일하게 우리 가족에겐 오지 않을 거라 자만했던 마음에 벌이라도 내리듯.
언젠가 언니가 암은 그냥 복불복 같은 거라고 말했던 게 생각난다. 평생 술 한 방울 담배 한 개비 안 피우고 나쁜 음식 멀리하고 운동 열심히 했던 사람이 간암, 폐암에 걸리고, 365일 중에 300일 술 마시고 담배 피우는 사람들이 멀쩡한 걸 보면 암이란 건 재수 없으면 누구라도 걸릴 수 있는 뽑기 같은 거라고.
작은 불행조차 나만은 피해 가길 원했는데 못난 심보 때문이었을까 대차게 되빠꾸를 맞은 것 같았다.
추운 겨울이 끝나갈 무렵 언니의 재발치료도 막바지에 다다랐다.
언니는 또다시 어려운 시험을 치러냈고, 이젠 교수님께서 주시는 성적표에 따라 졸업 또는 삼수가 결정될 것이다.
언니가 마지막 방사선치료를 받고 돌아오던 늦은 밤.
한강 다리 위를 수놓은 화려한 불빛들이 우리의 암울한 기분을 더 도드러지게 만들었다.
하필, 흘러나오는 노래도 잔나비라니.
무겁고 서글펐던 차 안의 공기만으로도 충분히 눈시울이 뜨거운데 하필 언니의 한마디가 내 눈을 콕 찌르고 말았다.
"나 이번 결과가 안 좋게 나오면 스위스에 갈 거야."
..............
나는 눈물을 참느라 눈을 깜빡일 수도 대답을 할 수도 없었다.
이미 2년 전 언니가 스위스의 디그니타스라는 존엄사에 대해 알려준 적이 있었다.
회비가 있고, 조건이 까다롭지만 언니에게 만약 끔찍한 부작용이 온다거나 살아있어도 삶의 질을 보장받지 못하고 감당할 수 없는 통증을 겪어야 한다면 언니는 꼭! 반드시 스위스행 비행기를 타겠노라고 말했었다.
그땐, 치료가 시작될 무렵이었기에 앞으로 벌어질 여러 가지 것들을 알 일이 만무했고 언니가 어떤 기적으로라도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에 나는 주저하지 않고 기꺼이 따라가겠다고 동조해 주었었다. 그러나, 2년이 지난 상황은 많은 것들이 달랐다.
그때는 만약에라는 전제가 붙었지만, 2년이 지난 한강다리 위에서의 그때는 만약이라는 전제조건을 붙이기엔 왠지 자신이 없었다. 결과를 들으러 갈 때마다 심하게 막혔던 도로와 신호대기. 조형제를 넣을 때 한 번에 성공하지 못했다거나 ct 중에 기계가 고장 나서 재촬영을 했던 것. 언니가 더 이상 교회를 가지 않은 것. 그러면서 스스로 수십 개의 징크스를 만들고 있던 것.
이런 것들이 쌓여서 뭔가 싸한 느낌. 안 좋게 흘러가는듯한 감정선을 만들어냈다.
강해 보였던 언니가 스스로 조금씩 무너져가고 있는 게 보였다.
내가 어떻게든 정신을 차려야만 했다.
"그래 언니. 만약 결과가 안 좋으면 나랑 같이 스위스 가자. 나도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데 여기저기 다 망가진 채로 언니가 고통스럽게 싸우는 거 볼 자신이 없다. 그런 상황이라면, 내가 언니여도 스위스 간다고 할 것 같아. 그나마 우리는 얼마나 다행이야. 지켜야 할 자식이나 남편이 없으니까 차후에 이런 선택지도 있다는 게 뭔가 힘이 되네."
"그래~~ 당연하지. 태어난 건 내 의지와 상관없었지만, 생을 마감하는 건 자기가 스스로 할 수 있게 해 줘야지. 나는 호스피스도 싫고 요양원도 싫고 우아하게 죽고 싶다고."
"이번에 가망이 없다고 하면 집 팔아서 유럽 가서 신나게 쓰다가 마지막에 스위스에서 예쁜 옷 입고 화장하고 최고로 멋지게 죽을 거야."
"그래~~ 그거야. 정 안되면 그런 방법도 있으니까 이제 쫄지 말고 맘 편히 갖으라고."
"그런데 거기 가서 너무 마음 편하고 환경도 좋고 그래서 기적처럼 암이 싹 사라져 버리면 어쩌냐~하하."
"그러게. 충분히 그럴 수 있지. 병은 다 고쳤는데 정작 재산을 다 탕진해서 거지로 돌아오는 거야. 하하~"
언니와의 대화 중에 울컥하던 마음과 눈물이 어느새 쏙 들어가 버렸다.
언니가 재발된 후 다시 치료를 받게 되면서 우리는 죽음이란 무거운 주제를 놓고 최대한 가볍게 농담하듯 대화를 나누곤 했었다. 그때 주로 나누었던 대화가 바로 라틴어로 존엄을 뜻하는 '디그니타스'이다.
'미 비포 유'라는 영화에서 소개된 스위스의 조력존엄사 지원 전문병원이 바로 디그니타스인데, 말기암 환자처럼 통제불능의 극심한 통증을 겪고 있거나 전신마비 같은 삶의 질을 더 이상 보장받지 못하는 경우 심사를 통해서 스스로 생을 마감할 기회를 주는 곳이 바로 디그니타스 병원이다.
스위스 안락사를 반대하는 단체도 여럿 있고 여러 가지 우려할 만한 문제점이 있다는 것도 나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지극히 개인적으로 조력존엄사라는 제도를 대단히 찬성하는 입장이고 우리나라에도 꼭 입법이 되어서 머나먼 스위스까지 가야 하는 수고를 덜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물론 여러 가지 야기되고 있는 문제점들이 보완되어야 하겠지만.
나는, 인간의 존엄한 생명 어쩌고 저쩌고~, 자살을 방조하는 살인법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존엄사를 반대하고 있는 여러 종교단체나 생명단체에게는 물어보고 싶다.
당신이 만약 온갖 마약성 진통제를 한 움큼 때려먹어도 극심한 통증이 통제가 안 돼서 죽을 것 같은 통증을 죽지 못해 숨이 저절로 끊어지는 순간까지 버텨내야 한다면. 대단한 온갖 의료기술과 죽기 위해 맞는 건지 살기 위해 맞는 건지 모를 항암제도 그나마 더 이상 쓸 것이 없어 죽어 가는 날만 꼽아가다 본인은 물론이고 가족들까지 같이 말라죽어가게 된다면. 당신들은 그 고통을 담대하게 받아낼 자신이 있는지. 차라리 인간 생명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블라블라~ 입만 털고 있을 시간에 누구나가 안락사를 선택할 수 없게끔 탄탄하고 치밀한 심사 조건이나 방어벽을 고민하고 만들어 보는 건 어떨지.
휴~
내가 갑자기 길을 잃고 대노한 이유는 극심한 통증과 힘들게 싸워오던 언니를 제일 가까이에서 지켜봤기 때문이고 그 과정에서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던 현실에 대한 극히 개인적인 넋두리이자 언젠가는 내가 될 수도 있을 그 상황에 대한 고민이기도 해서다.
아무튼 나는, 앞으로 내가 아름답게 죽을 권리를 보장받고 싶다.
죽음이라는 단어가 나에게도 익숙했던 시기가 있었다.
너무너무 힘들어서 죽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던 이십 대의 어느 날, 나는 서점에서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라는 책을 사서 읽고 살기로 결심했던 적이 있다.
죽음에 관한 글을 쓰다가 갑자기 그때의 내용들이 스치듯 생각이나 다시 휘리릭 펼쳐 보았더니 뒷부분에 내가 빨간 펜으로 밑줄을 그어놓은 문장이 펼쳐졌다.
'인간은 죽음의 자각을 통해 더욱 치열한 삶을 살 수 있다'
생뚱맞지만 잠깐 책 소개를 해 보자면,
삶에서 기대했던 거의 모든 것들을 얻어낸 베로니카라는 주인공은 더 이상 자신의 삶이 무의미하다고 결론내고 자살을 시도한다. 그러나 자살에 실패하고 되려 심장손상으로 1주일의 시한부를 선고받게 된다. 베로니카는 자기가 7일 뒤에 죽는다는 죽음을 자각하고 나서야 하루하루를 선물처럼 살아가고 죽기로 결정된 1주일이 지난 다음 날에도 다시 아침에 눈을 뜨자 기적처럼 하루를 더 살게 되었다고 좋아한다. 그녀의 심장은 멀쩡했고 그녀의 주치의가 1주일의 시한부라는 극약을 처방해 준 것이다. 죽음을 자각한 그녀가 더욱 치열하게 다시 삶을 살아가길 바라며.
베로니카에게 처방된 1주일의 시한부라는 약이 오히려 살고자 하는 효과를 낸 것처럼 그날의 언니도 그랬다.
언니가 스위스라는 마지막카드를 장착하고 나서 살고자 하는 용기와 의지가 불타올랐던 것처럼 힘들게 투병하고 있는 환자들에겐 때론 언제 죽을지 모를 공포보다 내 마음속에 내 삶을 스스로 끝낼 수 있는 리모컨을 장착하고 나면 오히려 그것이 든든한 뒷배가 되어 하루하루를 불꽃처럼 살다가 직접 마지막을 정리하고 아름답게 떠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