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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터진마돈나 Aug 10. 2023

길고도 짧았던 우리들의 마지막 휴가.

언니는 환자를 기다려주지 않았던 혈종과 교수님을 떠나 새로운 주치의를 만났다.

항암을 하지 않겠다던 언니를 겨우 돌려세웠던 터라 나는 새로운 교수님과의 첫 면담이 여간 긴장되지 않을 수 없었다. 교수님께서도 암에 걸렸던 적이 있었다고 들었기에 누구보다 환자의 마음을 잘 헤아려주시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덧없이 해보면서.

교수님은 언니가 겪고 있는 지금의 부작용들과 될 수 있으면 항암을 하고 싶지 않다는 언니의 말을 듣고 충분히 이해한다고 말씀해 주셨다.

언제가 되든 항암을 하긴 해야 하지만, 다시 하게 된다면 어쩔 수 없이 귀의 상태는 지금보다 훨씬 더 나빠지긴 할 거라고. 하지만, 환자분이 생각하는 삶의 질도 무시할 순 없으니 몇 달 정도는 하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 두루두루 다 해보고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상황이 되면 그때 다시 시작해 보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해 주셨다. 딱 언니가 듣고 싶어 했던 정답을 얘기해 주신 것이다.

언니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불주사가 무서워서 도망 다니던 초등학생 때처럼, 걸릴까 봐 조마조마해하던 마음을 내어주고 몇 달의 귀한 휴가를 기어코 얻어낸 것이다. 그 달콤한 휴가의 끝에는 불주사가 여전히 기다리고 있음을 알면서도 말이다.




아직도 암이 버젓이 있다는데 아무런 치료도 안 받고 놀기에는 언니도 맘이 편치 않았는지 어느 날 나에게 '펜벤다졸'이라는 구충제에 대해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어느 개그맨이 복용하고 나서 유튜브와 기사에 도배가 되었던 바로 그 구충제였다.

"그런 거 함부로 복용하면 안 돼. 미쳤나 봐 이 여자가~"

"아니야~~ 내가 엄청 많이 알아봤는데 복용법만 지키면 크게 문제 되지 않는대. 괜히 욕심부려서 복용량만 늘리지 않으면 부작용도 없고 항암제보다 훨씬 안전하다고 했단 말이야."

"누가.. 누가 그러는데?"

"그거 먹고 암 고친 사람들이 그랬어~~"


1년 전만 해도 구충제 복용하는 암환자들을 이해하지 못했던 언니는 어느새 그들의 절박한 마음과 닮아 있었다.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고 싶어 하는 언니의 마음을 내가 모를 리 없었지만 그렇게 간절한 마음이면 차라리 항암을 미루지 않고 시작하는 게 어떨까 싶은 마음이 들었다가도, 항암을 하면 귀가 안 들릴 수도 있다는 언니의 불안함 또한 모르는 게 아니었기에 교수님께는 비밀로 하기로 하고 언니의 구충제 복용을 허락했다.

결국, 언니는 휴가기간 내내 미국에서 직구한 '펜벤다졸'이라는 구충제를 복용했고 나는 어쩔 수 없이 언니의 복용법을 다이어리에 기록해 가며 관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나는 암환자의 자연치유와 면역치료에 좋은 음식과 건강식품, 운동법에 관련된 정보와 언니 암에 관련된 온갖 종류의 항암제, 임상에 대한 정보들을 찾고 또 찾았다어떤 때는 언니가 교수님보다 내 말을 더 신뢰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나는 그렇게 점점 암에 관하여 척척박사가 되어갔다.







손 발이 찬 언니는 거의 매일 반신욕과 족욕을 했고, 그동안 먹기 싫다고 몸서리를 치며 거부했던 엄마표 흑마늘과 생강차도 매일같이 먹고 마셨다.

하지만 끝내 아침식단만은 바꾸지 않았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아침은 꼭 호텔조식처럼 먹어야 하는 언니를 위해 통밀빵과 오믈렛, 팬케이크, 프렌치토스트, 구운 야채와 견과류를 넣은 요플레, 계절과일과 샐러드를 매일같이 내어주었고,  언니는 항상 내가 해주는 브런치가 어느 호텔보다 훌륭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끈질긴 나의 회유와 협박과 노력 끝에 드디어 언니가 집밥을 먹기 시작했다.

하필이면 내가 해준 많은 음식 중에 손이 많이 가는 샤브샤브와 김밥을 너무너무 좋아해서 나를 힘들게 하긴 했지만, 김밥장사를 해도 성공할 거라는 언니의 말에 나는 고래라도 된 듯 춤추듯이 김밥을 말고 또 말았다.



그렇게 잘 먹고, 골프 라운딩도 나가고, 지인들과 생일파티도 하고, 가족여행도 다녀오면서 귀하게 얻은 휴가를 알차고 의미 있게 보내던 중 어느 날 언니가 단 둘만의 미국여행을 제안했다.

언니가 건강했을 때에도 매년 한 번씩 해외여행을 다녀오곤 했었는데 사실, 언니가 아프고부터 함께 한 여행은 그동안의 여행과 많은 것들에서 차이가 났다.

이동할 때마다 언니의 모든 짐들은 당연히 나의 몫이었고, 먹는 것, 가고 싶은 곳, 언니가 복용하는 약, 마약성 진통제, 일어나는 시간부터 잠들 때까지 시시각각 변하는 언니의 모든 감정들까지 개인비서처럼 일일이 관리해주어야 했기에 피곤하고 부담되는 것이 사실이었다.

해서, 나는 언니와의 여행. 그것도 해외여행을 그다지 반가워하지 않았다.

물론 나의 이런 마음을 주변 지인들이나 언니조차도 까맣게 몰랐을 테지만 말이다.

그런데 가까운 동남아도 아니고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미국이라니.. 상상만 해도 내 앞에 펼쳐질 고생길이 훤하게 그려졌다.


"미국? 그래~가자 까짓 거. 어떻게 얻은 휴가인데 어딘들 못 가겠어."


사실, 나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언니가 '그냥 해 본 말이겠지. 저러다 말겠지. 휴가니까 어디라도 가고 싶은 맘에 한 번 던져본 거겠지.'라고 생각했다. 아니 거의 확신했다. 저러다 말 거라고.




2022년 1월 12일.

나는 샌프란시스코행 아시아나 비즈니스석에 앉아 성공한 커리어우먼처럼 도도하게 샴페인을 마셨다.

힘들게 모아 온 아시아나 마일리지를 죽기 전에 전부 다 쓰고야 말겠다는 언니의 굳은 의지가 결국 나를 미국행 비즈니스석에 앉히고야 만 것이다.

나는 미국땅을 밟은 뒤 벌어질 일련의 사건들은 까맣게 모른 채 천사 같은 승무원 언니가 따라주는 샴페인과 와인을 뽕을 뽑을 심산으로 마시고 또 마셔댔다.

얼큰하게 취기가 올라 잠이 들었는지 언니가 깨우는 소리에 눈을 떠보니 비행기가 랜딩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 미국.'

'내가 미국에 오다니.'

설렘과 두려움을 안은채 입국심사가 까다롭기로 악명 높은 샌프란시스코 이미그레이션 대열에 언니와 나란히 섰다. 우리는 가족으로 함께 입국심사를 받게 되었고, 제일 인상 좋아 보이는 심사관에 당첨되어 나는 내심 마음이 놓였다. 40대 정도의 흑인 심사관은 생글생글 웃으며 우리를 반겨주었고, 언니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면서 너네 트윈스냐고 신기한 듯 물어왔다.

아주 기본적인 질문만 하고 분위기도 나쁘지 않았기에 나는 ' 뭐야~미국 입국심사도 별거 아니네.'라고 안심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인상 좋던 분이 실~실 웃으면서 자기를 따라오라며 세컨더리룸으로 우리를 데려가는 게 아닌가.

말로만 듣던 세컨더리룸으로 내가 끌려오다니.

그곳의 공기는 너무나 차가웠고 우리와 같은 비행기의 옆좌석에 앉아 있었던 한국인 가족들마저도 이미 끌려와 있었다. 들어오자마자 핸드폰 사용이 제한되었고 언니와 나는 따로 분리되어 2차 조사를 받게 되었다.

너 돈 얼마 갖고 왔니, 하는 일은 뭐야, 여긴 왜 왔어, 어디서 묵을 건데.. 등등 여러 가지의 질문들이 던져졌고 나는 준비해 온 숙소 바우처 서류를 내보였다. 그리고 운영하던 샵의 인스타계정을 보여주면서 되지도 않는 콩글리쉬와 불쌍한 표정으로 심사관에게 제발 나를 여기서 안전하게 나가게 해 달라는 무언의 눈빛을 보냈다.

그렇게 한참 동안 나의 인스타 계정을 뒤적이던 심사관은 마치 큰 인심이라도 쓰듯 나를 위아래로 힐긋거리며 여권에 도장을 찍어주었고 나는 그렇게 간신히 입국허가를 받아냈다. 그리고 당연히 언니도 함께 나가는 줄 알았던 나는 조사받고 있던 언니 방을 기웃거렸다. 그러자 무섭게 생긴 경찰이 나에게 다가와 너는 당장 이 방에서 나가라며 눈썹을 치켜세웠다. 얼핏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음을 감지한 나는 경찰을 붙잡고 흐느끼며 언니의 상황을 설명했다.

"쉬 헤즈 캔서어~~~ "

"쉬 케임 라스트 트립~~흑흑~"

"마이 시스터 헤브투 테잌 메디스은~~~ 이 병신들아~~"라고 경찰관이 제대로 알아들었을지 모를 영어를 쥐어짜 내면서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낯선 땅에서 말도 잘 통하지 않는 미국경찰에게 언니의 상태를 설명하자니 갑자기 설움이 북받쳐 올라왔다.

그러자 무섭게 생긴 경찰관이 "너네 언니가 환자라고?" 물으며, 알겠으니 일단 너는 이곳에서 나가서 기다리라며 나를 밖으로 내보냈다.

그렇게 밖으로 내쫓긴 나는 빙빙 돌아가고 있는 텅 빈 수화물 레일 앞에 덩그러니 놓인 언니와 나의 캐리어를 붙잡고 세컨더리룸을 바라보며 길 잃은 아이처럼 서럽게 울고 또 울었다.

지나가는 한국인에게 도움이라도 청해볼까 싶어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코로나시국이라 그 큰 공항 안에는 마약탐지견을 데리고 돌아다니는 경찰과 공항관계자들뿐이었다.




한참을 혼자 덩그러니 서서 무엇을 해야 할지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넋을 잃어가고 있을 때, 저쪽 끝에서 언니처럼 보이는 키 크고 마른 사람이 나에게 걸어오고 있는 것 같았다.

처음엔 내가 헛것을 보았나 싶었을 정도로 희미했던 형체가 가까워 올수록 생글생글 웃으며 다가오는 사람이 언니가 확실함을 깨닫고 나는 마치 이산가족을 상봉하듯 울며 뛰어갔다.

"언니~~~~ 엉엉엉~~~"

"괜찮아? 어떻게 된 거야~어떻게 나왔어?"

 타들어가던 내 속을 알리 없던 언니가 웃으며,

"네가 나 암환자라고 했어? 크크"

"어떤 경찰이 들어와서 너 동생이 너 암환자라고 하면서 엄청 울었다고. 너 환자인 거 왜 얘기 안 했냐고 하길래 그제야 내가 의료진단서 보여줬더니 미안하다고 동생이랑 좋은 시간 보내고 무사히 잘 돌아가라고 하던데?"

"너 엄청 울었다며~~ 하하~~"

"그래~~ 이 바보야~ 난 너 잘못되는 줄 알고 우리 언니 마지막여행 온 거라고, 아파서 지금 당장 약도 먹어야 된다고 했는데 나보고 너는 당장 밖으로 나가라고 해서 쫓겨났단 말이야~~ 그러게 처음부터 진단서를 보여주지 왜 안 그랬어."

언니는 혹시 몰라 교수님께 부탁해서 받은 영문진단서를 가지고 있었다.


"나 귀가 잘 안 들리잖아.. 가뜩이나 안 들리는데 긴장해서 무슨 말하는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는 거야. 그래서 통역관 불러달라 하고 기다리고 있었거든. 한참 있다가 전화로 통역관 연결돼서 얘기하고 있는데 그 경찰이 들어와서 다짜고짜 너 암환자야?  너 이게 마지막여행이라며? 뭐 대충 이렇게 된 거야."


"김혜영 너 어떻게 그 순간에 그렇게 말을 잘했어?  이 여자 아주 똑똑이네 똑똑이야~~"


그때부터 영문과를 나왔어도 영어 실력이 형편없었던 언니는 가뜩이나 귀까지 기능을 잃어 미국 여행 내내 나의 옆구리를 찔러댔다.




나의 막무가내 콩글리쉬로 우리의 미국여행은 그렇게 극적이면서 소란스럽게 시작되었고, 드라마틱했던 20일간의 여행은 샌프란을 시작으로 LA와 라스베거스를 거쳐 다시 돌아온 LA에서 여정을 마무리했다.

                 전해서 베가스 가는 길.

그 유명하다는 핑크스 핫도그집                                                         SLS Hotel

                            Half Moon Bay Golf Links


샌프란에서 스탠퍼드대학도 가보고 큰 동호대교 같았던 금문교도 건너보고 소살리토섬에서 사진도 찍고, LA에서는 언니의 오랜 친구들을 만나 좋은 간을 보냈다. 아, 그리고 언니가 그토록 하고 싶었던 미국에서의 라운딩도 3번이나 다녀왔다. 그리고 문제의 베가스에서는 음...

언니가 마약성진통제로 버텨내던 시간들이 많았던 것, 유난스러웠던 입국과 베가스에서의 악몽을 빼면 우리의 미국여행은 너무나 즐겁고 행복한 시간들이었다.




그렇게 미국여행을 다녀온 뒤, 우리는 4달 뒤 또다시 베트남 하노이로 떠났고 그것이 진짜 언니와의 마지막 여행이었다.

하노이에서는 언니의 대학친구가 아픈 언니를 배려해 모든 일정을 어레인지해 주었고 내가 박캐디라고 별명 붙여준 동생 덕분에 여행기간 내내 의전에 가까운 황송한 대접을 받았다.


5개월의 알찬 휴가는 꿀맛 같은 낮잠을 잔 것 같이 순식간에 지나갔고, 그 달달했던 휴가의 대가로 언니의 몸 상태는 급격하게 나빠져갔다.


그리고 15개월 뒤, 미국 소살리토에서 내가 찍어주었던 언니의 사진은 언니가 직접 고른 영정사진이 되어 나의 품 안에 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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