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었다. 미루고 미루던 불주사를 맞아야 할 시간이 온 것이다.
5개월 전에 암세포를 가리키던 세 개의 까만 점은 이게 언니의 PET-CT 사진이 맞나 싶을 정도로 언니의 온몸을 새까맣게 가두어버렸다.
"아.. 결국 항암을 해야 되는 순간이 왔네요. 더 이상 미루거나 항암을 안 하면 6개월 정도 시간이 남아있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아요.. 그래도 이번에 쓸 항암제가 비인두암에는 비교적 잘 듣고 많이 힘들지도 않은 약이니까 이걸로 좀 줄여 놓고 또 시간을 한번 벌어봅시다."
그렇게 언니의 항암은 다시 시작되었고, 비교적 잘 듣는다던 항암제에 언니의 암덩이들은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2개월마다 PET-CT를 찍었고 항암제를 '젬시타빈'에서 '키트루다'라는 면역 항암제로 바꾸었지만, 그것 역시 언니의 암을 이기지 못하고 나가떨어져 버렸다.
그렇게 해서 결국 언니는, 돌고 돌아 온몸으로 거부했던 '도세탁셀'이란 항암제를 투약받게 되었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이 항암제는 언니가 제일 처음 썼던 항암제였고 거부반응이 크게 와서 투약받자마자 중단했던 약이기도 했다.
이 약으로 말할 것 같으면 온몸에 털이란 털은 모조리 빠지기 때문에 필히 가발을 준비해야 한다고 여교수가 말했던 암환자들 사이에서 악명 높은 바로 그 약 되시겠다.
언니는 거부반응이 있었던 히스토리 덕분에 입원치료를 받게 되었고 거부반응에 대한 약물과 항암제 용량을 조절하면서 투약받아서인지 다행히 첫 항암을 무사히 마쳤다.
역시나 약물이 올라오는 3일 차부터 언니는 심한 근육통과 함께 극심한 고통에 며칠을 시달려야 했고, 항암을 할 때마다 겪어내야 하는 그 마의구간 동안만은 언니 못지않게 큰 스트레스를 받는 나 역시 긴장의 연속이었다. 그 기간 동안 언니가 먹고 싶다고 말하면 하루에도 몇 번이나 시장에 달려가 재료를 구해 만들었다. 그렇게 몇 시간 동안 정성을 다해 만들어서 머리맡에 놓아주면 한 입 먹거나 그마저도 못 먹고 상을 내 가는 날이 비일비재했고 그 바람에 말라가는 언니와 달리 내 뱃속에 남은 음식을 짬 시키던 나는 갈수록 토실토실 살이 올랐다. 누가 보면 투병하는 언니 옆에서 세상 얼굴 좋아 보인다는 오해를 받기 딱 좋게 말이다.
그동안 언니의 항암 루틴은 항암시작 3일 후부터 꼬박 4일을 심하게 아프고 1주일이 지나면서 조금씩 컨디션이 올라오는 것이었는데, 항암 차수가 쌓이다 보니 회복기에도 컨디션이 제대로 올라오지 않아 조금씩 조금씩 언니의 몸과 정신은 메말라갔다.
'도세탁셀'이란 항암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언니의 머리카락이 숭덩숭덩 빠지기 시작했다.
드라이기 바람만 스쳐도 가을 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지고 속에 머리카락은 빠져서 아예 한데 엉켜버렸는지 빗으면 머리카락이 한 뭉텅이의 털실로 만들어져 나왔다.
"혜영아~~~" 하고 불러서 뛰어가보니, 머리를 말리던 언니가 놀란 토끼 눈을 한채 나를 바라보며 세면대를 가리켰다. 새하얀 세면대 위에는 검은 머리카락이 수북이 쌓여있었고, 샤워실의 배수구도 그만큼의 머리카락으로 가득 덮여있었다.
'놀라지 말아야지.. 언니 앞에서 놀란 표정 짓지 말아야지..' 마음먹었지만, 공포스럽기까지 했던 그 장면은 사실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4년 전 첫 항암을 했을 때도 머리카락이 빠지긴 했었지만 그때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빠르고 공격적이게 탈모가 진행되고 있었다.
"언니.. 어떡해..."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고작 이것뿐이라니. 위로에 익숙하지 않은 내가 참 부끄러웠다.
언니는 놀라는 나를 보며 연신 빗질을 하면서 한 움큼씩 빠져나오는 머리카락을 손안에 쥐고 "와~~ 진짜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싹 다 빠진다는 말이 정말이었네.." 라며 손에 든 머리카락을 전리품처럼 나에게 흔들어 보였다.
결국 그날 오후, 1cm를 다듬어도 청담동 헤어숍을 다니던 언니는 아파트 1층에 있는 동네미용실에서 삭발을 했다. 잘려나가는 언니의 머리카락을 보며 나는 또 바보처럼 울음보가 터져버렸지만, 머리 손질을 받던 손님들이 거울로 흘긋흘긋 언니를 훔쳐보는 게 영 마음에 걸려 애써 씩씩한 척 언니에게 말을 걸었다.
"언니~완전 우리 동네 힙스터됐네~ 무서워서 말도 못 붙이겠어"
"그치~ 무슨 암환자가 힙합 하는 쎈 언니처럼 보이냐"
"그런데 삭발하고 보니까 언니 얼굴 진~짜 잘생겼다. 머리통도 이렇게 작은데 그것도 모르고 그동안 얼큰이라 놀렸네~~"
"그러게.. 싹 밀어버리니까 내 얼굴 왤케 작아 보이냐~ 아휴~ 이제 머리카락 빠지는 거 안 봐도 돼서 속이 다 시원하네"
"한 가닥 남아있을 때까지 머리카락 안 밀 거라고 그러더니 결국은 이렇게 됐구먼 그래. 그래도 여전히 예뻐서 좀 놀랍긴 하다. 다행이기도 하고."
'아제아제바라아제'에서 강수연 배우처럼 민머리로 밀어버릴 줄 알았던 언니는 마지막 자존심이라며 몇 cm일지 모를 아주 작은 머리카락의 흔적을 남기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몇 cm의 자존심이 완전히 사라지기까지는 단 며칠이 걸리지 않았다.
나는 반짝반짝 빛이 나는 하얀 민머리의 언니를 보며 집안에 AI가 있는 것 같다고 놀려댔고, 오히려 완전 민머리가 되니까 순둥이처럼 너무너무 귀엽다는 위로의 말도 잊지 않고 해 주었다.
결국 이렇게 삭발을 하게 될 줄 그때 알았더라면 항암을 할 때마다 고작 이 하찮은 머리카락 때문에 주저하거나 포기하거나 미루면서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을까?
내가 물었을 때, 언니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 나는 다시 그 상황으로 돌아간다 해도 그랬을 거야. 그때 항암을 안 한 대신 몇 달 동안 예쁘게 잘 지냈잖아. 다 일장일단이 있는 거야. 그때 항암을 했다고 해서 지금보다 결과가 좋았을 거란 보장도 없고, 계속 항암만 하면서 아무것도 못하고 머리카락도 없는 환자로만 계속 생활했을 수도 있으니까."
나는 그런 마인드의 언니가 참 멋졌다. 그리고 고마웠다.
언니가 선택하지 않았던 그 길에 대한 미련과 후회보다는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에서 언니 자신을 잃지 않고 스스로 만들어간 결과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여자.
"나는 내 이름처럼 더 이상 아름다울 수 없다는 게 죽기보다 싫었나 봐. 나이 들어 시들기 전에 예쁜 꽃잎으로 스스로 떨어져 버리는 거지. 악착같이 붙어 있다가 아름다움도 다 잃고 시들어 말라죽기 전에 말이야"
머리카락이 떨어지는 것이 두려워 항암을 미룬 결정도,
그로 인해 얻은 시간 안에서 많은 이들과 즐겁고 아름답게 보낸 시간들도,
다시 겪게 된 고통의 시간들도,
그날 삭발을 결심했던 언니의 쓰리던 마음도.
언니는 누구의 탓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처음 4기 암 판정을 받았을 때, 교수님에게 암이 한 10기까지 있는 거냐고 물어보던 그 순진하고 어리바리했었을 때 보다 한층 더 노련해지고 의지력 있는 말기암 환자가 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