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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터진마돈나 Aug 14. 2023

나를 호스피스병동으로 보내지 말아 줘.

걱정 마. 언니를 혼자 외롭게 두진 않을 테니..

"아.. 이제는 ㅇㅇㅇ님에게 쓸 수 있는 항암제가 없네요.."



우리는 교수님으로부터 언니가 받을 수 있는 치료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혹시 몰라 임상대기자 명단에 올려놓긴 했지만 그 또한 가능성이 희박하고 임상이 된다 하더라도 큰 기대를 할 수 없는 상황인 듯했다.

머리까지 밀어가며 받았던 마지막 항암제는 결국 언니의 암을 죽이지 못하고 골반에서 시작된 작은 암세포는 어느새 간, 폐, 비장, 다발성 뼈, 그리고 원발부위까지 언니의 온몸을 지배해 버렸다.

이후의 치료계획도 없이 교수님은 가정의학과에 협진을 넣어주셨고 언니는 더 강하고 독한 펜타닐계의 마약성진통제만을 한 보따리 받아 돌아왔다.




진통제에만 의존한 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언니의 촛불이 꺼지기를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우리는 일본에 있는 지인을 통해 면역치료 관련한 병원을 예약하고 2주마다 NK세포를 맞으러 일본행 비행기에 올랐다. 한국에 있는 에이전시를 통하지 않고 원어민 수준의 일본어를 구사하는 지인이 매번 동행하며 통역을 해주었기에 비교적 저렴한 비용으로 치료를 받을 수 있었지만, 하루가 다르게 나빠지는 컨디션과 통증으로 인해 언니는 급기야 공항에서 휠체어서비스를 받기 시작했고 4회를 끝으로 그마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NK세포 치료에도 전혀 효과를 보지 못한 언니에게 나는 마지막으로 다른 병원에서 그전에 썼던 항암제를 한 번만 더 시도해 보자고 설득했다. 나의 욕심으로 언니를 더 힘들게만 하는 건 아닐지 많이 고심했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무엇이라도 시도를 해봐야 기적이라도 일어나지 않을까 생각했다.

다행히 언니도 치료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었고 그렇게 다시 한번 항암제를 투약받게 되었다.


그리고 며칠뒤 언니는 응급실로 실려갔다.


심한 저혈압과 저혈당으로 인해 승압제를 써야 했고 그 이후 정신이 조금 돌아오자 영문도 모른 채 목에 중심정맥관이란 삽입술을 거의 쌩으로 받게 되었다.

아프다고 울부짖는 언니를 향해 움직이면 안 된다고 의사가 큰소리를 치며 언니를 제압했다.

"혜영아~~ 혜영아~~~~ 혜영아~~~~" 목놓아 계속 내 이름만 부르는 언니를 문틈으로 지켜보던 나는 거의 패닉상태가 되어 지나가는 선생님들마다 붙잡고 우리 언니 잘못되는 거 아니냐고 제발 저 방에 좀 들어가 봐 달라며 매달렸다.

의사가 언니의 목에 무언가를 쑤셔 넣고 있는 것 같았고 목에선 피가 솟구쳐 나왔다.

난생처음 보는 끔찍한 장면에 나는 저러다 우리 언니 죽는 거 아니냐고 난동을 피웠다.

그렇게 지옥 같은 시간이 30분쯤 흘렀을까 방에서 나온 젊은 의사 선생님이 잘 끝났다며 놀란 나를 안심시켰지만 나는 그 젊은 의사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의사는 난처해하며 환자의 혈압이 많이 낮아서 마취를 아주 약하게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많이 아팠을 거라고 둘러대며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또 모든 것이 내 탓 같았다.



그 뒤로 한 번의 항암을 더 받은 뒤 언니는 모든 치료를 거부했다.

아니 어쩌면 거부할 수밖에 없는 몸상태가 되었다는 게 더 정확할 것 같다.

스위스에서 아름답게 죽고 싶다던 언니의 바람도, 5월에 윔블던을 보러 가겠다며 비행기 일등석에 대기예약을 걸어놓은 것도 모두 다 부질없어져 버린 듯했다.

나는 멀게만 느껴졌던 언니의 죽음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음을 변해버린 언니의 몸을 통해 느꼈고, 더 이상은 어떤 말로도 언니의 상태를 희망적이게 포장할 자신이 없었다.

언니의 얼굴을 마주할 자신도, 어떤 말을 건네야 할지도 모른 채 두려움이 밀려왔다. 모든 것들이 너무 버겁고 무서웠다. 언니 옆에 내가 있듯, 나도 의지할 수 있는 누군가가 지금 내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하지만, 언니는 자신의 모습을 나 아닌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어 하지 않았다.


척추와 골반 전체로 전이된 뼈 통증은 나날이 심해져 갔고 25로 시작했던 펜타닐 패치 용량은 75까지 늘어났다. 패치로도 통증이 잡히지 않을 때에는 돌발성 통증치료를 위한 앱스트랄 설하정이란 아주 강력한 진통제를 추가로 복용하였는데 이 진통제는 통증이 바로 잡히는 대신 그만큼 약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고, 심지어 약효과가 떨어질 때쯤이면 금단현상으로 인해 언니를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드라마에서나 봐 왔던 암환자들의 고통을 바로 눈앞에서 언니가 더욱 리얼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자고 일어나면 언니의 베개는 귀에서 나온 진물과 피로 얼룩져 있었고, 하루에도 몇 번씩 코에서 넘어온 핏덩어리를 입으로 뱉어내야 했다. 그동안 언니가 다니던 동네 이비인후과 원장님조차 시한폭탄 같은 언니의 귀와 코를 더 이상 진료하기 꺼려하시는 게 느껴졌다.

동네 주치의마저 없어진 언니는, 이젠 어디로 가야 할지 누구를 찾아야 할지 미로에 갇힌 듯했다.

그때부터 나만 바라보는 언니에게 나는 언니의 엄마이고 남편이고 의사였다.

나에게만 의지하는 언니를 위해 나는 언니의 전담 마사지사가 되었고, 요양간호사가 되었고, 친구가 되어주었다.




언니의 소화기능이 약해지면서 먹는 것이 10분의 1로 줄어들었고, 일어서는 것, 걷는 것이 힘들어지더니 급기야 의자에 앉아 있는 것조차 많이 버거워했다. 나는 의료용 걸음보조기구와 휠체어를 주문했고 언니는 침대에서 일어날 때에도 나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갈비뼈가 그대로 드러난 채 복수로 가득 차 배만 볼록 나온 언니의 모습은 마치 기아로 허덕이는 난민과도 같아 보였다. 힘겹게 걸을 때마다 언니의 앙상한 다리는 휘청거렸고 의자에 앉을 때나 일어설 때마다 나는 언니를 안아주어야만 했다. 화장실 양변기가 낮아서 언니가 양변기에 앉을 때엔 두 손으로 언니의 엉덩이를 받아주었고, 언니가 볼일을 끝낼 때까지 밖에서 기다려주었다.

언니는 점점 아이가 되어갔고, 언니와 나의 카톡 대화창은 언니의 호출문자로 가득 찼다.


언니가 침대에 누워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부터 혈액순환을 위해 아침마다 일어나면 언니의 발과 다리, 등을 마사지해 주는 걸로 나의 일과가 시작되었다. 수시로 언니 방을 드나들면서 손과 발을 주무르고 저녁 7시가 되면 언니를 위해 구매한 마사지 침대에 눕혀 림프마사지와 핫 스톤으로 전신을 풀어주었다.

언니가 나에게 제일 미안해하면서도 하루 중에 제일 기다리고 좋아하는 시간이었다.

1시간 정도 언니의 온몸을 마사지해주고 나면 언니는 저녁 진통제와 수면제를 먹고 잠자리에 들었다.

언니의 "잘 자 혜영아~고마워" 이 말과 동시에 나의 하루일과도 끝이 났고 그제야 비로소 나는 맥주 한 캔을 시원하게 마실 수 있었다.

나의 노력이 무색할 정도로 점점 나빠져만 가는 언니의 몸상태를 지켜보는 것이 너무 괴로웠다.

자려고 눈을 감으면 나도 모르게 코 끝이 시큰거려 왔다. 혹여나 언니 방에 들릴까 베개에 얼굴을 묻고 서럽게 울고 또 울었다.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하다가도, 뼈가 훤히 드러난 언니의 등을 쓸어내리다가도 눈물이 났다. 설거지를 하다가, TV를 보다가도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은 예고도 없이 불쑥불쑥 올라와 나를 힘들게 했다.






긴 병에 장사 없다고 했던가. 슬픔과 고독과 괴로움은 매일매일 자동적으로 경신되어 갔고, 24시간 언니 곁에서 떠날 수가 없었던 나의 생활과 자유는 그렇게 하루하루 언니를 위한 시간에 묻어갔다.

불과 한두 달 전만 해도 힘들긴 했지만, 긴 머리 가발을 쓰고 소녀소녀한 치마를 입고 지인들을 초대해 집에서 담소를 나누었는데 이제는 가발은커녕 옷을 입는 것조차 버거워했다.

언니는 그 이후로 어느 누구도 집으로 초대하지 않았다.


언니의 얼굴에선 희망이 없어진 환자의 상실감이 느껴졌다.


부모님과 동생은 나를 위해 하루에 몇 시간만이라도 간병인을 쓰는 것이 어떻겠냐고 말했지만, 언니가 내켜하지 않는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나는 그 조차도 쉽지가 않았다.


"나는 절대로 요양원이나 호스피스로 안 갈 거야. 나는 꼭 집에서 죽고 싶어. 그러니까 내가 나중에 많이 아파도 절대 나를 호스피스 병동으로는 보내지 말아 줘."


언니에게 요양원이나 호스피스는 생의 마지막을 외롭고 쓸쓸하고 초라하게 마무리하는 곳이라고 정립되어 있는 듯했다. 내 집, 내 침대에서 가족들과 친구들에 둘러싸여 일일이 눈을 맞추고 사랑한다 속삭여주는 그들의 품 안에서 안락하고 평온하게 가고 싶은 언니의 바람은 외국영화에서나 가능하다는 것을 언니는 진짜 몰랐을까.

이상에 가까울 만큼 휴먼 가득하게 세상을 등지고픈 언니를 나는 차마 간병인에게 넘겨줄 수가 없었고,

그렇게 나는 언니라는 굴레에 스스로 갇혀버렸다.

언니가 떠나버리거나, 기적처럼 회복되지 않는다면 나는 영영 언니를 벗어나지 못할 거란 그때의 푸념이 지금의 나를 이토록 힘들게 할지도 모른 채, 원망과 가여움과 책임감을 품고 매일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왜 나 혼자 이 무거운 짐을 다 지고 가야 하나 순간순간 억울하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아니면 누구도 언니를 나만큼 케어할 수 없다는 것 또한 잘 알았다.

지금 와 생각해 보니, 미안했을 언니의 마음과 그럼에도 나를 놓아주지 못하고 붙잡아야만 했던 절실했던 언니의 마음은 또 얼마나 비참했을까 생각이 들어 나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진다.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나는 언니 옆에서 하루종일 수다를 떨고 같이 잠을 자고 언니를 절대 어둠 속에 혼자 두지 말아야지.

그 순간이 찰나가 될지도 모르는 바보처럼 언니를 비참하게 만들지 말아야지.


휴지를 옆에 끼고 한 글자 한 글자 써 내려가면서 그렇게 어제도 오늘도 나는 너무 늦은 다짐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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