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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터진마돈나 Jun 13. 2023

빠이짜이찌엔 상하이~

이제 우리도 봄을 맞으러 떠납니다.

대륙의 칼바람을 가르며 병원과 호텔을 오가던 발길에 눈물이 서려 들기 시작할 무렵 언니의 치료도 마무리되어 갔다.

암 판정 후 써 내려간 다섯 달간의 드라마가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리게 될지는 며칠 후 알게 될 mri결과에 달려 있었다.

나는 그때부터 없었던 믿음까지 강제 소환해 가며 매 순간 기도했다.

언니가 흘린 눈물과 내가 삼킨 눈물을 하나님이 제발 가엾게 여겨 주길 바라며.

언니 병만 낫게 해 주신다면 평생 주님의 자녀로 살겠다고 거짓말도 했다.


사실 언니에겐 싹 다 없어졌을 거라고 큰소리를 쳤지만,  마음은 부정과 긍정이 어느 한쪽의 치우침도 없이 반반이었다.

오히려 오만가지 생각들로 피가 마르던 나와 달리 단순한 성격의 언니가 무념무상처럼 편해 보였다.




내가 탕비실에서 언니에게 줄 호박죽을 만들고 있었던 그날은 언니의 마지막 방사선 치료가 있던 날이었다.


약탕기에서 끓여진 죽을 그릇에 담아낸 뒤 설거지를 하고 있던 그때, 우리의 통역을 담당했던 심팀장이 헐레벌떡 뛰어들어왔다.

"누나 누나~~  방금 mri결과 나왔대요. 교수님한테 빨리 가보세요."

설거지를 하던 나는 세제가 묻은 손을 씻어낼 새도 없이 바지에 대충 닦으며 탕비실에서 뛰어나왔다.

~쪽 복도 끝에서 치료실로 내려갔언니가 나에게 뛰어오는 게 보였다.


가까워질수록 울고 있는 것처럼 보이던  언니의 얼굴이 선명해져 왔다.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 뭔가가 잘못되었구나..' 그 짧았던 순간에 명확한 주체도 없이 원망과 분노가 일었다.

언니에 대한 걱정이나 안타까움보다 앞섰던 그 분노는, 내가 언니를 위해 희생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언니의 완쾌로 치유받게 되길 원했던 보상에 대한 분노였던 것 같다.

그렇게 이기적인 생각들로 가득 찼던 나와 마주한 언니는 별안간 나에게 와락 안겨왔다.


혜영아~~ 나 암이 사라졌대. 나 암이 거의 다 사라졌대 혜영아~~


 말과 함께 화사한 햇살을 받으며 나에게 달려들어오는 언니의 모습은 슬로 모션을 걸어 놓은 것처럼 지금도 아주 선명하게 기억난다. 마치 뽀샤시한 필터를 끼운 청춘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부둥켜안고 아이처럼 뛰면서 함께 울었다.


그리고 소란스러운 복도로 어느새 몰려든 언니의 동기들은 박수를 치며 자기 일 마냥 좋아해 주었다.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축하의 말이 뻔했을 중국말도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그렇게 한참 동안 복도에서 축하를 받던 나는 언니의 손을 잡고 교수님이 계신 곳으로 달려갔다.

내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언니의 주치의는 동그랗고 까만 뿔테를 쓴 여교수였다.

한국의 여느 교수님들처럼 무뚝뚝하고 권위적으로 보이던 그녀는 우리를 보자 처음으로 웃어주었다.

교수님의 책상 모니터 화면에는 언니의 mri영상이 여러 개 띄어져 있었다.

교수님은 우리에게 mri영상을 비교해 주면서 여기에 있었던 암이 이쪽 사진에는 거의 없어졌다고 했다. 

희미하게 보이는 것들은 암이 있었던 흔적인데 앞으로 몇 달 동안은 방사선이 암을 태우는 일을 계속하기 때문에 이 정도면 암은 사라졌다고 봐도 된다고 하셨다.

심팀장의 통역을 듣고 나서 나는 언니의 뇌사진들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하지만 결국 틀린 그림 찾기에는 실패했다.

내 눈에는 여러 장의 사진이 거의 다 비슷비슷해 보이기만 했다.

눈이 뻑뻑해져 올 만큼 집중해서 보던 시야에 나의 다음 액션을 기대하고 있는 듯한 교수님의 얼굴이 조금씩 들어왔다. 자신의 치료성과를 당연한 결과인 양 덤덤히 설명하던 교수님의 턱이 조금씩 치켜 올라가고 있는 것도 그제야 눈치챌 수 있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치의 감탄과 존경을 담아서  "~~~." 하며 교수님을 향해 엄지를 연신 추켜올렸다.

그러자 교수님은 애써 별거 아니라는 듯 수줍게 미소 지었다.




한동안 나는, 기쁜 소식이 모래성처럼 부서져 버릴까 봐 입밖에 내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언니에게도 당분간은 입방정 떨지 말고 한국에 돌아가서도 경거망동하지 말자고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주의를 주었다.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돌이켜보면 그날이 내 인생에서 제일 드라마틱하고 행복했던 날이었던 것 같다.


우리는 다음 날 5층 병동의 간호사 선생님들과 외국인 방장을 잃은 남겨진 동기들의 축하 속에 병실을 떠났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혼자만의 축배를 들었다.

힘든 치료를 씩씩하게 잘 견뎌준 언니가 너무 대견했고, 언니의 온갖 짜증과 변덕을 잘 견뎌준 나도 너무 대견스러웠다.

그동안의 긴장이 풀려서일까 몇 캔 마시지도 않았는데 금세 취기가 올라왔다.

오래간만에 느껴보는 편안함이었다. 슬슬 눈이 감겨왔다.

그리고 이미 아득해져 가는 8주간의 중국 생활이 꿈을 꾸는 것처럼 몽글몽글 스쳐 지나갔다.




호텔방 안에서 커피포트에 미역국을 끓이다 호텔을 홀라당 태워먹고 평생 메이드로 살아갈 뻔했던 일.

매일 도시락통에 언니의 아침을 함께 담아주던 조식당의 친절한 직원들.

언니가 나보다 더 똑똑하다고 말한 메리어트의 로봇.

오일 마사지를 받으러 갔다가 너무 더러워서 울며 뛰쳐나왔던 일.

중국에서 먹은 한국집 자장면.

늦은 밤 병실에서 몰래 구워 먹었던 마른오징어와 맥주.

서럽고 힘들어서 집에 가고 싶었던 많은 순간.

그리고,

두 달 가까이 모은 한 박스가 넘는 호텔 어메니티와 본의 아니게 얻게 된 본보이 플래티넘 등급.

마치 한 편의 성장 드라마를 꿈꾸다 잠에서 깨어난 것같이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을 품에 안은채 벚꽃이 만개한 우리나라로 돌아왔다.


힘든 여정의 시작이었던 겨울은 지나가드디어 언니 몸에도 새 싹이 트는 봄이 찾아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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