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가 치료받았던 중국 상해 중입자센터는 모든 암환자가 엄격한 규칙과 병원의 통제하에 입원 치료를 받게 되는 곳이었다.
국가가 직접 개입해서 자국의 선진 의료기술을 알리려는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중입자 치료가 크게의미 없다고 판단되는 환자는 의료 기록만으로도 탈락되는 곳이라고 전해 들었다.
우리가 입원하고 있는 동안 병원 정문에는중국 각지에서 치료를 받기 위해 올라온 많은 환자들과 그들을 태우고 온 관광버스로 자주 북적거리곤 했다. 그들은 병원에서 채혈을 비롯한 여러 가지 검사들을 받은 뒤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언니가 그랬듯이 병원으로부터 연락이 올 때까지 떨면서 기다렸을 것이다. 마치 합격 여부를 기다리는 초조한 수험생들처럼.
지금 와 생각해 보면 아픈 것도 서러운데 내 돈 내고 치료를 받고 싶어도 병원의 합격통지를 받아야 한다는 게 그들에겐 얼마나 잔인하고 서러운 일이었을까 싶다.
지금은 그때 언니가 받았던 치료를 우리나라에서도 꿈의 암치료라는 대대적인 홍보와 함께 어느 메이저 병원에서 준비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그때 우리에게 중입자 치료에 대해 부정적으로 이야기했던 교수님은현재 중입자 센터장이 되어 홍보 기사에 자주 등장하고 있다. 그 기사를 보면서.. '아.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구나' 이런 기분이 들었던 건 그때 무시받았던 기분 탓이려니.
사실, 언니가 한국의 의료보험 혜택도 포기하고 암 진단금을 몽땅 털어 모두가 만류했던 중국에서의 치료가 가능했던 것은 미혼이었던 언니와 나에게, 딸린 식구가 없어서이기도 했고 마침 운영하던 가게를 정리해야 했던 내 조건이 맞아서이기도 했다.
물론 그 시작이 4년 넘게 까지 길어질 거라고 그때의 나는 생각하지못했었지만 말이다.
상해에서의 입원 생활은 단조로웠고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로웠다.
언니가 입원했던 5층 병동은 모두가 언니와 같은 비인두암 환자였기 때문에 많은 것들을 공유하고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병원 생활은, 아침 6시 간호사의 채혈로 시작되었다.
문제는, 방사선 치료가 중심이었기 때문에 간호사들의 주사 실력이 아주 형편없다는 것이었다. 중국에 비하면 우리나라 간호사 분들은 신의 경지에 올랐다고 표현해도 과하지 않을 정도로 수준 차이가 극명했다.
채혈을 하거나 정맥주사를 놔야 하는 날이면 나는 차마 보지 못하고 병실 밖으로 나가 제발 저 간호사가 한 번에 주사를 꽂을 수 있게 해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했다.
그 기도는 하느님이 랜덤으로 들어주셨는지, 간호사분들은 몇 번씩이나 혈관을 터트리며 잘못 놓기 일쑤였고 그럴 때면 통증을 꽤나 잘 참는 언니도 온갖 짜증을 쏟아냈다.
그래서 중국에 있는 동안 확실하게 배운 단어가 있는데 바로 "텅"이라는 표현이다.
"아파." " 아프다." "아파죽겠다." "아파디지겠다고 이것들아~~."
말하자면 이런 것들의 총 집합체라고나 할까.
그래서 모든 날의 컨디션은 그날 배정되어 들어온 간호사의 주사 실력으로 결정되었다.
그렇게 한바탕 주사 소동이 지나가고 나면 편하게 휴식을 취하다가 방사선 치료만 받으면 하루 일정이 마무리되었다.
방사선 치료를 시작한 며칠 뒤부터 복시가 왔던 언니의 왼쪽 눈이 정상으로 돌아왔고 진통제를 먹어야만 했던 두통도 신기하게 사라졌다.
아주 좋은 신호들이었다.
선생님께서는 치료 횟수가 늘어갈수록 몇 가지의 부작용들이 있을 수도 있다고 했지만, 선생님이 말한 부작용은 한국에서 들었던 것들에 비하면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을 만한 수준의 것들이었다.
그래도 언제든 발생할 수 있는 부작용을 최대한 예방하기 위해 선생님께서 알려준 몇 가지의 운동들을 언니는 매일 열심히 따라 했다.
그런데 사실 그 운동법이라는 게 지금 생각해도 너무 웃기고 어설프기 짝이 없다.
턱 근육이 굳어져서 입이 안 벌어지는 걸 방지하기 위해 요구르트를 입에 물고 있는 운동이었는데,
로봇 팔로 몸 안을 수술하는 시대에 요구르트를 사용한 입 운동이라니..
하물며 간호사 언니가 직접 요구르트병을 가져와 입에 물고 시범을 보여주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진지하고 진심이던지 언니와 나는 웃음을 참느라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처음에는 그 모습이 너무 우스꽝스러워 하는 시늉만 내던 언니는 며칠 후 내가 돌아볼 때마다 요구르트를 입안 가득 물고 있었다.
'아.. 입이 굳는 건 언니도 무서운가 보군 훗.'
비인두암 환자들만 모여 있는 5층 병동에서는 식사 시간이 끝날 때마다요구르트 병을 입안 가득 문 환자들이 복도를 나란히 한 줄로 걷고 있었는데 어느새 그들사이에 언니도 자연스레 합류하게 되었다.
그렇게 환자인 언니와 보호자인 나는 매일 세 번씩 복도 끝에서 끝을 걸었고 마주 걸어오는 중국 환자들과 눈인사를 건네며 금세친해져 갔다.
그들 중엔 가끔 언니를 힐끔힐끔 이 아니라 아예 넋을 놓고 쳐다보는 남자들도 몇 있었고, 언니와 동갑인 여자분과 18살 소년, 15살 소녀도 있었다.
나중엔 그들 모두와 친해져서 병실에 놀러도 다녔고, 치료 중에 누군가가 힘든 시기에 접어들면"짜요"를 외쳐주면서 같은 처지에 있던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해 주었다.
어느 날,
17살 소년의 어머니는 언니가 음식을 삼키기 어려워지면 갈아서 먹이라고 당신의 아들에게 먹이던 똑같은 곡물을 선물로 주셨다. 그리고 그 며칠 뒤엔 언니의 동갑내기 친구가 퇴원하면서 언니의 완쾌를 미리 축하한다며 작은 선물과 함께 카드를 주고 눈물의 작별인사를 하고 떠났다.
특히 나는 여러 동기들 중에서 언니를 제일 좋아하고 많이 따랐던 소녀가 기억에 남는데 그녀의 영어 이름은 스텔라였고 15살의 귀엽고 똑똑한 아이였다. 아! 스카이캐슬을 아주 재밌게 보고 있다고도 했다.
우리랑 복도에서 요구르트 운동을 하다 마주치면 발그레진 얼굴로 수줍게 웃어 보이던 그 아이는 언니의 행동과 말투 손짓조차 너무 아름다워서 몇 번이고 몰래 훔쳐볼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했다.
그러면서 옆에 멀뚱히 서있던 내가 신경 쓰였는지 "언니도 참 예뻐요"라고 해주었다.
가정교육 잘 받은 배려심 깊은 아이 스텔라.
언니는, 암병동이 아닌 시트콤의 한 세트장 같았던 그곳에서 언어는 다르지만 같은 병으로 싸우고 있던 그들에게 위로를 받고 용기를 얻으며 병원생활에 적응해 갔고, 언니와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퇴원하기 전 언니 병실에 들려 사진을 찍고 짜요를 외쳐주며 떠났다. 그 빈자리는 곧 새로운 신입으로 채워졌고 신입으로 들어왔던 언니는 어느새 병원 생활에 제일 익숙해진 고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