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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터진마돈나 Jun 03. 2023

열 개의 반지 주인.

내가 떠난다면 제일 소중한 사람들에게 선물하고 싶어.

상해의 병원은 생각보다 크고 깨끗하고 조용했다. 언니 혼자 사용하게 된 2인실에는 문 밖으로 보이는 대형 하트 조경이 제일 먼저 눈에 띄었고 외국인환자를 배려해서인지 그날부터 병실에는 줄곧 언니와 나 둘 뿐이었다.



우리는 병실을 배정받은 후에 통역을 해주시는 분과 다학제 진료에 참석했다.

모든 의료진들 앞에서 언니가 자신을 소개했고 우리 또한 담당 교수와 여러 교수님들을 소개받았다.

병원장 같아 보였던 노교수는 이곳을 오기까지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지금처럼 아름다운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게 주겠다고 말해주었다.

나는 그 말 한마디에 한국에서 불안해하며 맘 고생했던 것들이 억울했을 정도로 안심이 되었그 이후의 치료들도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문제는 밤이었다.


좀처럼 눈물을 보이지 않았언니는 꾹꾹 눌러왔던 감정이 올라왔는지 어둠 속에서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20년 넘게 고수해 오던 긴 머리카락을 자르던 날에도 생각보다 너무 잘 어울린다며 셀카용 인스턴트 미소로 수십 장의 셀카를 찍던 그녀였다.

자기는 머리통 위가 콘에어처럼 볼록 솟아있어서 항암으로 머리카락이 다 빠져 골룸이 될지언정 마지막 한올이 남아있을 때까지 절대 빡빡이로 밀지 않겠다던 씩씩한 언니.

오히려 그런 언니를 보며 내 눈물이 언니를 애잔한 암환자로 만들어 버릴까 봐 뒤에서 몰래 울었었는데..


말도 안 통하고 음식도 맞지 않는 먼 타국에서 환자복을 입고 누워있자니 애써 외면했던 본인의 처지가 현타로 강하게 온 것 같았다.


나에게 들키지 않으려 조용히 흐느끼던 울음은 어느새 주체하지 못할 정도의 설움으로 번져갔다.

그런 언니 곁에서 나는 일부러 어떤 위로의 말도 건네지 않았다.

그 어떤 말도 언니의 복잡한 심경과 두려움을 걷어내주지 못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언니는 한참을 그렇게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서럽게 울더니,

갑자기 손가락을 꼽아가며 지인들 이름을 하나 둘 나열하기 시작한다.

"혜자, 숙자, 영자, 미숙이.."

 나도 아는 이름들을 주욱 대더니 "아니 아니야.. 얘는 좀 그래.. 혜영아 얘를 넣을까 까?"

"엥? 무슨 소리야. 누구를 어디다 넣고 어디다 빼야 되는데..?"


언니는 언제 울었냐는 듯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내가 죽는다면, 제일 소중하게 생각되는 사람 열명에게 내가 갖고 싶어서 찍어놨던 까르띠에 반지를 선물하고 싶어."  하면서 핸드폰에서 사진을 보여준다. "이것 좀 봐봐. 이쁘지?"

풋. 웃음 밖에 달리 할 말이 없다.

그렇게 서럽게 울다가 갑자기? 갑자기 까르띠에?

그 와중에 모델까지 콕 집어서 나에게 보여주는 언니가 꽤나 귀여웠다.

 

아파도 참 언니답게 아프다 싶은.

어떻게 지금 상황에 저런 생각을 하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비련의 여주인공이었던 언니는 손가락을 았다 폈다 하고 고개까지 갸우뚱해 가며 스스로 판 고민에 빠졌다.

열명 중에 애매한 몇 명을 두고 그 친구를  빼자니 서운해할 것 같고 열명에 포함시키기엔 조금 부족하고..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다가 갑자기 신경질을 버럭 낸다.

"아니 내가 죽는 마당에 왜 마지막 갈 때까지 누가 서운해할까 봐 눈치를 봐야 ?"

나는 언니가 왜 그 친구를 놓고 고민하는지 알고 있었다. 언니는 살면서 주변 사람들 챙기는 거에 누구보다 열심이었고 진심이었다. 어떨 땐 가족인 나보다 더 그 아일 챙기는 것 같아 서운한 맘도 들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어느 날  진심을 다해 대했던 그 아이가 뒤에서는 자신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험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때 언니가 받았던 충격과 상실감을 지켜봤던 나로서는 그 아이를 놓고 고민하는 언니가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그냥 빼버려. 그 사람을 두고 고민한 것 자체가 땡이야."

그러자 언니는 내가 이 말을 해주길 기다린 사람처럼 "그렇지? 너 말이 맞네." 하며 금세 밝아진 표정으로

"김혜영 네가 1번이야" 하며 웃는다.

나는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며 적당한 리액션을 취해 보였다.

 "앗싸 아~ 까르띠에~"


그렇게 첫 번째 반지의 주인공이 된 나도 따라 웃었고 상해에서의 긴장됐던 입원 첫날은 반지 해프닝과 함께 저물어갔다.


쌔근쌔근 자는 것도 예뻤던 언니를 보면서

언니가 그 아이를 두고 고민했던 것은 서운해할 그 아이 때문이 아니라  오랜 시간 그 아이와 함께 했던 언니의 추억이 서운해할까 봐 그랬던 게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뜬금없는 생각만으로도 금세 자신을 추스르던 씩씩했던 나의 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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