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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터진마돈나 Sep 02. 2023

음식을 못하는 것이 자랑입니다만.

이 세상엔 자랑할 거리가 너~무 많아.

어휴~나는 우리 집에서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살았잖아~
그래서 할 줄 아는 게 한~ 개도 없어.
너는 음식 잘해서 너무 좋겠다.

우 씨,

그동안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어떻게 살았대? 말이야 방구야?

아주 귀~~ 한분 나셨네 나셨어.




그녀가 내뱉은 그때의 말투와 나를 향해 내려 깔은 눈의 각도를 나는 아주 생생히 기억한다.

그날 내가 베푼 호의는 그녀를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자란 공주님으로 만들었고, 나는 부뚜막에서 가족들의 밥상을 차려내는 가여운 소공녀 세라로 만들어 버렸다.

내가 볼 땐 나와 비교해서 대단히 귀하게 자란 것 같지도 않은 듯한데 그녀의 "나는~~"이라는 말이 미묘하게 거슬리고 기분이 나빴다.

그럼 '나는?' 나는 손에 물이 마를 날이 없어 보였나?

나보다 특별히 잘난 것도 없었던 그녀였기에 나의 자격지심인가? 의심하기에도 자존심이 상했다.

단지, 반 강제로 엮인 여성사회에서의 서열이 나보다 높았기 때문에 말로 되받아 쳐주지 못한 그때의 한풀이를 이제야 시원하게 해보고자 한다.

나는 사실 고분고분하거나 착한사람과에 속하는 편은 아니었다. 말로 상대방의 오장육부를 베베 꼬이게 만들 수 있는 악마적 재능도 있었고, 분한 일을 당하면 얼음샤워라도 해야 직성이 풀릴 정도로 자기애도 강한 사람이다. 아니 이었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너그러워도 지고 싸움닭에서 병아리로 전락하기도 했지만, 내 가슴속 깊은 곳엔 잔다르크 같은 전투력이 휴화산처럼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공원에 피크닉을 가기로 한 어느 날이었다. 나는 우리 언니에게 내어줄 때처럼 고래가 춤추듯이 즐거운 마음으로 김밥을 말았다. 공원에 도착해 보니 그늘이 있는 명당자리는 부지런한 연인들과 가족들 외국인들로 이미 만석이었다. 우리는 할 수 없이 야구장의 외야석쯤 되는 곳에 자리를 잡았고 나는 모두가 출출해질 즈음 짠~하고 도시락을 펼쳤다.


"야! 요즘 누가 피크닉 올 때 김밥을 싸와~촌스럽게. 그냥 배달시키면 될걸. 너도  참~ 유난스럽다"


나는 전혀 예상치 못한 그녀의 공격으로 시골에서 갓 상경한 촌시런 영심이가 되어버렸다.

처음엔 농담인 줄 알았다. 기분 더럽게 나쁜 농담쯤으로 받아넘기려고 했다.

그러나 맛있게 먹는 일행들과 달리 내가 싸간 김밥에 손도 대지 않고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는 그녀를 보고서야 내 뒤통수를 후려치는 진담임을 깨달았다. 웬만하면 준비해 온 사람 성의를 봐서 한 개쯤 집어 먹을 법도 한데.


그녀는 그렇게 찬물을 들이붓고 마치 혼자 뉴욕의 센트럴 파크에라도 와 있는 듯 이어폰을 낀 채 누워버렸다. 듣고 있던 노래가 팝송이었는지 뽕짝이었는지 알 길은 없었지만 혼자 그렇게 한참을 누워있던 그녀 때문에 김밥을 집으러 가던 내 손가락은 괜스레 움츠러들었다,

결국 가족들과 맛있게 먹으려고 준비한 김밥은 유난스러운걸 무척이나 싫어하던 그녀 덕에 졸지에 천덕꾸러기 김밥으로 전락해 버렸다.




"~~ 난 음식 잘 못하잖아~"

"나는 집에서 손 하나 까딱 안 해~"

"나는 우리 신랑이 알아서 다해준다니까~"


종종 그녀가 내게 했던 말처럼, 질세라 앞다투어 말하는 여자들의 이런 대화가 나는 가끔 궁금했다.

과연 음식을 못해서 안 하는 건지, 그냥 하기가 싫어서 안 하는 건지.

집에서 왜 멀쩡한 손을 까딱도 안 하고 있는지.

유치원생도 아니고 왜 신랑이 알아서 해줄 때까지 바라만 보고 있는지.

  

이게 과연 자랑을 하는 건지 자신의 모지람을 고백하는 건지.

나는 그 모호함이 궁금했다.

할 줄 모르는 건 궁금해서 배우려고 하거나 부끄러워서 감추고 싶어 하는 게 인간의 심리 아닐까?

그런데 왜 유독 주방일에 관련된 부분은 부족함을 자랑하듯이 말하는 여자들이 많을까?

드라마에서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란 여주인공이 몸을 비비 꼬며 "히잉~~ 라면은 어떻게 끓이는 거여요~~"라고 말하는 모습이 예뻐 보였나?

음식을 못한다고 하면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귀히 자란 것 같은 공주님처럼 보인다고 생각하는 걸까?

개인적으로, 음식을 못한다는 것이 결코 흉이 되거나 부끄러운 일이 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단지, 자식이나 남편 그리고 부모님에게 따뜻한 음식을 내어주지 못하는 것을 자랑할 만큼 큰소리를 내며 떠벌릴 만한가 가 몹시 의문스럽긴 하다.


"너는 음식 잘해서 좋겠다. 나는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요리 잘하는 사람들 보면 너무 부럽더라"라고 누군가가 말한다면, 나는 그 사람이 말하는 톤만 들어봐도 그 말이 자랑인지 부러움인지 그 말속에 숨은 의미를 대번에 파악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마 나처럼 그런 말속에 숨은 의미를 진주 찾듯 기가 막히게 파헤치는 여자들이 꽤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러니,

여자들 앞에서 혹여 음식 못한다고 자랑일랑 하고 싶거든 가급적 톤에 유념하는 것이 들키지 않고 자연스럽게 넘어갈 수 있는 꿀 Tip 중 하나라고 감히 말해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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