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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메리 Dec 28. 2023

정신과 진료 6번째-평온하다.

또다른 동반자-우울증

매주마다 가던 병원을 처음으로 2주만에 갔다.
지난 2주 동안 회사에서 짜증이 자주 나길래 벌써 약에 내성이 생겼는 줄 알고 걱정했다.

내 맘대로 약 안 먹고 건너뛰는 날이 많은게 문제였나?

아니면 회사에서 하필 그 기간에 사건사고가 많이 생겨서 그런걸까?
병원에 가면서 이런 생각은 했지만 내 속마음을 솔직하게 이야기 해야겠다는 생각은 안 들었다.


나는 아직도 의사를 경계하고 있다.
바쁜 의사가 내 이야길 들어줄 시간도 없을 것 같고, 약을 먹은 이후로 감정이 예전처럼 널뛰지 않기 때문에 굳이 문제를 들출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지난 번과 다르게 병원이 한가했다.

대기시간 없이 바로 진료를 보게 되었다.

정신과도 사람이 몰리는 날과 한가한 날이 있는 건가?


의사는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고 물었고 나는 그냥 괜찮았다고 짧게 답했다.
그 대답이 만족스럽지 않았는지, 어떤 기분이었는지 표현해달라고 했다.
그 순간 떠오른 단어는 '평온'이었다.
그런 단어가 떠올랐다는 게 스스로 의외여서 살짝 망설이다가 더듬대며 "평..온..했어요." 라고 했다.


평온?

내 인생이 평온한 적이 있었나?
왜 그 단어가 떠올랐지?
너무 거창한, 나에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 같은데...

근데 평온하지 않다고 말하기엔 평온한 게 맞는 거 같았다.

그래.

이 정도면 평온하지.

엄청. 

이 다음엔 회사는 어떠냐고 물었고 여전히 짜증나긴 하지만 그냥 다니고 있다고 했다.

그랬더니 의사는 처음엔 회사에서 욱하고 그런다고 했는데 그런 점은 어떠냐고 구체적으로 물어봤다.

내가 욱한다고 말했었나?

내가 느낀 감정은 욱하는 거랑 조금 다른 것 같은데...

그렇다고 크게 다른 건 아니니 그냥 짜증이 오래 안간다고 말했다.


회사란 게 뭐 다 좋을 순 없는 거니까 짜증이 난다고 하더라도 이 정도면 엄청 잘 다니고 있는 거 같다.

짜증의 빈도는 회사에서 어떤 일이 있는가에 따라 달라지는 거라고 생각하면, 짜증난 감정을 어떻게 처리하는지가 문제인데 요즘은 금방 기분이 회복되어 크게 괴롭지 않았다.
혼자서 독서, 명상, 운동, 상담 등으로 온갖 노력을 해도 안 되던 거였는데, 약 하나로 너무 쉽게 해결됐다.

약간 허무하기까지 하다.

그래도 내가 원하는 상태로 하루를 보낼 수 있다는 게 좋다.

일과 사생활을 분리할 수 있게 된 상태.


의사는 다음으로 집에서의 생활을 확인했다.

나는 당연히 단답형으로 "좋아요."라고 했다.
진짜로 좋다라는 말 말고는 표현할 게 없다.
이래서 톨스토이가 행복한 가정은 다 비슷하다고 했던가. 

그러고는 다른 어떤 변화같은 게 있냐고 물어봤는데 당장 생각나는 게 없어서 그냥 비슷하다고 대답했다.
그러다 생각을 꼽씹어 보고 나서야 변화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첫날 검사에서 인지 능력이 엄청 낮게 나올 정도로 스스로도 집중력과 기억력이 감퇴했다고 느꼈었는데, 그 때는 그냥 나이때문 이려니 했다.


그런데 지금은 감정이 안정되어서인지 책이 엄청 잘 읽힌다.

책에 써있는 단어와 글자를 소화시키는 게 너무 어려워 몇번이고 되읽으며 겨우겨우 읽었는데, 이제는 훨씬 쉽게 읽힌다.

한번만 읽으면 이해가 된다.

너무 좋다.

또 딸과 메모리게임을 할 때 심각하게 기억을 못했는데, 다시 원래 실력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딸이 더이상 나랑 게임을 안하려 한다. ㅎ

모든 면에서 인지 능력이 올라왔다.

이제는 이직을 위한 공부에 집중할 수 있으려나?


의사가 마지막으로 혹시 불편한 점이 있냐고 물어봤는데, 없다고 하려다가 잠이 여전히 많이 온다고 했다.

그러면 약을 다른 걸로 바꿔보는게 어떠냐고 했다.

약마다 효능은 비슷하지만 나와 잘 맞는 약이 있을거라고.

하지만 나는 잠이 많이 오는게 딱히 힘들진 않아서 괜찮다고 했다.

원래 잠을 잘 못자서 항상 힘들었는데 지금은 낮에 아무리 많이 자도 저녁에도 잘 수 있어서 좋다고 했다.

교대근무를 하기 때문에 규칙적인 수면 그런 건 기대할 수 없으니까.


의사는 오늘에서야 내가 교대근무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내가 얘기를 안했었나보다.

질문에만 대답하고 다른 건 불필요하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 같다.

마음을 열어야 하는데 잘 안 열린다.

2주 후에 다시 예약을 잡았다.


그 때까지 계속 평온하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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