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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아내기엔 너무 벅찬 이 나라가.

영화 <한국이 싫어서> Review.

by 썸연 Oct 19. 2024

< 한국이 싫어서 >

 

브런치 글 이미지 1


 영화 <한국이 싫어서>는 모국인 대한민국이 싫어, 방랑을 택한 여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민음사에서 출간한 장강명 작가의 소설 원작을 각색한 영화로, 어느 정도 스토리를 알고 있는 대중들이 제법 있어, 개봉 전부터 적지 않은 주목을 받았다. 누군가는 자극적인 제목으로 2024년 상반기를 장식할 영화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이번 영화는 <한여름의 판타지아>를 연출했었던 장건재 감독이 감독 및 각색했다.

 

브런치 글 이미지 2

 영화의 서사는 한 여자의 삶에서 비롯된 감정들에 밀착하여 전개된다. 한국에 사는 평범한 27살의 여자, 직장인, 그리고 언니, 누군가의 여자친구이자 딸인 ‘계나’ 가 그 주인공이다.  계나는 매일 아침 마을버스와 1호선, 2호선을 타고, 인천에서 강남을 2시간 가량 거쳐 출근 한다. 매서운 바람이 부는 겨울이면, 차가운 공기에 얼어붙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겨우 달려 버스를 타고, 옆 사람들의 부담스러운 채취를 맡으며 지하철을 타고, 겨우 회사에 도착해서는 온종일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유교적 사회 분위기 속에 자연스레 깃들어있는 위계 질서와, 받아야 할 존중은 어김없이 묻어둔 채 자유를 선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 한국에서 계나의 하루다. 나 자신이 아닌 회사의 기계로 존재하는 동안에, 부정의 한 심사에 윗사람들의 지시를 수긍할 수밖에 없었던 동안에도, 끈질기게 발목을 잡는 학벌과, 그녀를 내려다보는 시선에 계나는 점점 지쳐만 간다. 회사에선 점심 식사 메뉴조차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권리는 당연시 입막음 되었고, 계나의 집은 보일러 하나 제대로 들어오지 않아, 오랜 기간 영하권을 웃도는 바깥의 날씨보다 더 시리기 마련이었다. 계나는 추운 한국이 너무나도 싫었다. 집 전세금 자금에 모아둔 돈을 보태라는 부모님의 압박과, 중산층 가정에서 곱게 자란 남자친구 부모님의 따가운 시선, 그리고 그 집에 하루라도 빨리 시집을 보내려는 엄마. 계나는 부모님과 남자친구가 행복을 느낄수록 도리어 본인의 행복은 침식되어 감을 느낀다. 그렇게 계나는 이 나라에서 더 이상의 희망과 미래를 찾을 수 없다고 판단했고, 적당한 수능 영어와 토익 영어 실력만을 가지고, 낯선 땅 뉴질랜드로 이민을 선택한다. 이민자의 신분에서 당연히 안정적인 삶은 불가능했지만, 자유로운 친구들과 함께, 보다 평화로운 삶에 정착한 듯했다. 하지만 그 삶 또한 비극이 없으리라 장담하진 못하기에, 도통 답을 알 수 없어, 깊은 고민에 빠져들게 한 영화였다.


지옥을 떠나 도착한 곳은 과연 천국일까?


 영화 자체로는 한 편으로 일명 ‘한국 혐오’를 조성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던 부분들이 많았다. 비록, 나로서는 충분히 공감할만한 지극히 평범한 한국인들의 속내라고 생각했지만, 장건재 감독 또한 이를 염두에 두었던 건지, 영화 곳곳에는 계나가 한국을 ‘혐오’ 해서 떠난 게 아니라는 걸 알려주는 사인들을 숨겨져 있었다. 뉴질랜드에서의 계나는 그토록 싫어하던 추위에 덜 떨긴 했지만, 매일 웃는 얼굴이었던 것만은 아니었고, 웃음의 밝기가 한국에서보다 눈에 띄게 환하지도 않았다. 다만, 다소 자유로워진 일상과 옷차림. 보여진 건 그뿐이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어느 곳에서도 여행자, 방문자의 신분에선 각국의 하이라이트만을 골라 겪을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지기 때문에, 당연히 당국의 GDP를 위해 열심히 노동하고, 자가 마련 비용을 모으고, 반복되는 일상에 매너리즘을 겪을 확률은 극히 드물다. 다시 말해, 계나는 단지, ‘방문자’였기 때문에, 뉴질랜드의 삶이 어떻게서든 한국보단 좋은 쪽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아마 그래서 뉴질랜드에서 3년을 가까이를 살고 있으면서도, 한국이 다시 가고 싶냐는 어린아이의 질문에 ‘잘 모르겠다.’ 고 답한 건 아닐까. 본인 스스로도 가벼운 권리의 상태에서 누리는 삶은 필연적인 자유를 동반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고, 안정감, 그리고 당연함과는 거리를 둔 채, 이 모든 것이 ‘일시적’이라는 것을 충분히 느꼈을 테니 말이다.

 계나의 동생 미나가, 계나가 떠나기 전, 계나에게 ‘그럼, 한국을 떠나 도착한 그곳이 여기보다 더 나을 것 같아’? 라고 묻는다. 한국이 싫다고 노래를 부르던 나에게도 많은 이들이 건넸던 질문이다. 해외여행이 더 감동적으로 와닿는 이유는, 그 나라가 한국보다 더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더 자유로워서가 아니라, 내가 한국에서 가지고 있었던 대강 1톤 정도의 고민거리들과 중압감이 이곳에선 결코 특별하지 않아서. 그래서 결국, 날 죽일 것만 같았던 고민들이 결국 날 죽이지 못할 고민들 이라는 걸 알게 해줘서. 다른 하늘에서는 이 모든 게 별거 아닌 게 되어서, 결국 내 힘듦이 절대적으로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깨닫게 되어서, 그 속에서 오는 안정감들이 너무 고마웠기 때문이다. 미나와 같은 물음을 던졌던 이들에게 결코 ‘도망’이 아니라고 진심을 무겁게 곁들인 해명을 하고 싶었다. 이곳을 떠난 우리는 천국을 바란 게 아니라, ‘더 이상은 나의 나라, 대한민국을 지옥으로 만들기 싫어서.’ 였을테니까.


“연기가 다 했다”


 계나 역할을 맡은 고아성 배우의 연기는 딱. ‘계나’ 그 자체였다. 부정의하고 잘못된 것들을 알고 나서, 속으로는 이미 1000번쯤은 저항하고, 항의했지만, 결국 한국 사회의 일원으로서 자리를 잃을 수는 없기에 참고 또 참는. 어쩌다가 뱉어버린 솔직한 한 마디에도 본인이 그럴만한 말을 할 자격이 되는지 의심하고 또 의심하는, 도전이 두려웠던, 실패가 무서웠던 한국에서의 계나의 답답함을 정말이지 현실적으로 연기했다고 생각한다. 무엇인가에 결핍되어 있고, 결국 처참하게 지는 삶을 선택하는 인간의 모습을 솔직하게 표현하여 감탄스러웠던 부분이 많았다. 극 중 계나의 모습에선 단 한 번도 따뜻한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의 삶을 지켜볼 때면 마치 들키기 싫은 치부를 들킨 것처럼, 나의 이면을 보는 것처럼 불쾌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 덕에 조금 몰입감을 떨어트렸던 스토리 라인도 금세 다 잡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전반적인 영화의 내용은 현재를 직접 살아내며, 젊은 세대의 한 가운데에 서 있는 나에겐 그리 달갑지만은 않았다. 후반부엔 결국 또, 어딘가로의 여행을 떠나는 계나의 삶이, 억울하게 느껴진 걸 보면, 나 또한 여유에 익숙하지 않은 채, 목적 없는 일은 무모한 것이라는 가르침을 받아서일까. 계나는 안정적인 직장을 다니면서 이민을 결정했지만, 누군가에겐 안정적인 직장이 천국으로의 도약일 수도 있어, 그렇게 되면 인간은 정말 끊임없이 불행한 존재밖에 될 수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상대적인 행복의 가치는 결국 쉽게 불행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이 현실을 받아들이냐, 받아들이지 못하냐의 차이가 될 테니까 말이다. 그렇게 된다면 결국 우리의 여행은 ‘도망’과 ‘회피’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될 것이다. 영화가 끝나고, 극장을 걸어 나오면서 드는 복잡한 기분과 멀미나는 느낌을 잊을 수가 없다. 어쩌면 겨우겨우 이 나라를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는 이들에겐 또다시 양옆이 까마득한 섬에 갇힌 기분을 들게 했을 것이다. 그 어떤 교훈과 해결책을 주지 않은 채, 어딘가로 떠나간 우리 세대의 한 여성의 뒷모습을 보며, 그럼 나는 또다시 이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이 맞을지 깊게 고민하게 만들었을 테니 말이다. 누군가의 죽음을 통해 비극적인 현실을 일깨우면서도, ‘결국 모든 곳은 다 똑같다.’ 를 말하는 모순이, 가뜩이나 어지러운 삶을 더 어지럽게 만들었을 수도 있겠다. 때론 영화는 영화라는 핑계 안에 현실에 없는 기적을, 평화를 보여주면 좋으련만. 지극히 현실적인 영화에선 도통 오늘의 삶을 인정하기가 어렵고, 그 방황을 끝내기도 쉽지 않다. 허무맹랑한 현실만이 또다시 시끄러운 알람으로 나를 깨운 느낌이었다.


노력은 만국 공통,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나가 뉴질랜드에 정착한 지 3년 차 정도 되었을 때, 유학원에서 처음 사귄 친구인 ‘재인’과 대화를 나누던 장면이 가장 인상 깊게 남는다. 아마 이 대화가 계나, 그리고 관람객들의 시선을 극에서 현실로 돌리는 장면이었지 않나 싶다. 이전에 학원에 다분히 지각하거나, 처음 본 이들한테 반말을 쓰는, 다소 자유분방한 재인의 모습을 보고, 계나는 재인을 매일 술과 파티에 빠져 유흥만을 즐기는 아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그 말에 재인은, 당시에 밤새 술을 마시고 지각한 게 아니라, 그때 당시 자기는 남은 돈이 얼마 없는 유학생이었고, 돈을 벌기 위해 빌딩 청소 알바를 하다가, 셔틀버스를 매번 놓쳐, 지각을 할 수밖에 없었던 거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어 이젠 셰프라는 꿈을 찾아, 나아가려고 한다며 말을 덧붙인다. 계나는 재인의 말을 듣고는, 동시에 수만 가지 생각에 빠지게 된다. 어쩌면 계나는 경쟁 사회 속 ‘열심히’라는 타이틀에 물러 터져버렸고, 조금은 덜 노력하는 삶을 살고자 모국을 떠나왔지만, 결국 그 하늘이 어디든, 자신이 꾸려내고 싶은 삶을 위해선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이어야만 하고, 그건 세계 공통적인 법칙임을, 누구나 노력하고 살고 있음을 깨달았던 것 같다. 그렇지만 누군가의 요청으로 인한 의무가 아닌,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그 노력이 결코 무의미하게 느껴지지만은 않을 것이고, 그제서야 자신의 모든 노력이 가치를 가지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이 장면을 보는 많은 관람객들 또한, 본래 있었던 곳을 떠나 정착한 곳에서도 완벽한 평화는 없다는 걸 느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작품에서는 계나를 은유하며, 추위를 싫어하는 남극 펭귄 ‘파블로’의 이야기 등장한다. 추위가 싫어 정처 없이 이곳, 저곳을 떠돌다가 결국 따뜻한 섬나라에 도착한 남극 펭귄 파블로. 운명으로 점지어 진 영토에서 태어나, 그 나라를 사랑하지 못하고, 주어진 삶을 거스르려고 하는 펭귄 파블로는 곧, 한국에서 태어난 계나의 모습이었다. 계나 역시 결국 펭귄 파블로와같은 선택을 하는 듯, 또다시 정처 없는 여정을 떠나게 되는데, 이 부분에선 현실과 타협하지 못하는 계나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동시에, ‘얼마나 살고 싶었으면.’ 하는 생각이 교차하기도 했다. 가만 생각해보면 수많은 펭귄 중에 남극을 싫어해 고향을 떠나는 펭귄은, 파블로 딱 한 마리뿐이다. 이 말인즉슨, 모두가 현실에 적응하고, 또, 스며든다는 것이다. 그런데 결국 가장 이상적인 곳을 찾아 다시 여행을 시작했다는 건, 결국 계나는 한국에서 일말의 행복도 찾을 수 없겠거니 판단했다고 보여진다. ‘난, 춥지 않고, 배고프지 않으면 행복해.’ 라고 말한 계나가 한국이 사계절을 가진 나라라는 사실을 망각해서였을까? ‘한국이 추워서’가 아니라, 따뜻함 속에서도 계나는 늘 떨어야 했기에, 다른 하늘만이 그녀를 녹여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라고 보여진다. 그러나 내가 느끼기에 세상은 그리 쉽게 변하지 않는다. 다만 변화되는 척할 뿐이다. 그렇게 모두의 세상은 그대로이지만, 그럼에도 계나의 세상이 바뀔 수 있다면, 그리하여 그녀가 조금이라도 살만해진다면, 그것이 도망이든, 여행이든 기꺼이 그녀의 선택을 응원하는 바이다.


 ‘계나’의 감정선을 따른 전개

 

 영화는 과거와 현재의 장면이 빈번하게 교차하며, 대체적으로 이야기가 매끄럽게 전개되는 느낌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또한, 원작 소설을 각색한 영화만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같은 책이라도 독자에 따라 꽂힌 부분, 느낀 부분들에 차이가 있는 것처럼 소설의 독자로서 장건재 감독이 ‘한국이 싫어서’를 받아들였던 느낌을 서사로 풀어낸 듯 보였다. 극 중 계나는 차분한 얼굴 속에 감춰진, 어느 하나 안정되지 않은 삶을 불안해하던 찰나였고, 의지를 잃어버린 채 지속되던 시간 속에 살아가고 있던 사람이었다. 다시 말해, 그녀의 삶은 온통 불안함 투성이였을 것이다. 한 번 찾아온 ‘불안’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고, 삶 속에 죽은 듯 살아있다가 또 언제고 다시 나타나, 끔찍한 과거의 순간을 가져오기 마련이다. 아무리 인간은 불안과 공존한다지만, 삶을 압도할 정도의 불안과 살갗을 춥게 얼리는 도시의 차가움은 계나에게 우울과 중첩된 어지러움의 연속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결국 뉴질랜드에서, 보다 평화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듯했지만, 한국화되어 짙게 물든 계나의 속마음은 하루에도 몇 번씩 과거를 회상하게 만들고. 가끔씩 드는 안정감을 뚝뚝 끊이게 만들며, 계나를 계속해서 그늘로 인도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매끄럽지 않은 극의 전개가, 달라진 환경 속에서도 여전하게 가슴 한편에 남아있는 것들이 불쑥불쑥 일상에 찾아와, 계나를 괴롭힐 때, 계나의 머릿속을 장면 전환으로 풀어낸 것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결국, 이 삶의 끝은 죽음?


 영화에서는 계나가 처음 한국을 떠나 영주권 취득을 위해 도움을 받으며 머물렀던 선생님 일가족이 뉴질랜드 지진으로 모두 사망한다. 영주권자 부인과 함께 정착한, 여유롭디 여유로운 뉴질랜드의 삶에서의 예상치 못한 권태로움을 느꼈던 이민자 1세대 남편과, 엄마, 아빠의 고향 한국을 궁금해하는 2세대 이민자 아들. 그들은 결국 피할 수 없는 자연재해에 무방비 상태로 생을 마감하는 캐릭터로 그려진다. 이는 결국, 어느 곳에서나 불행한 일은 존재하며, 각자 주어진 운명을 거스르지 않아야 할 때도 있다는 교훈을 남기고자 하는 감독의 뜻이 담겨있으리라 짐작했다.

 그러나 혹, 계나와 같은 시선, 같은 가치관을 가진 이들이 영화를 보았을 때 이를 극단적인 해석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여지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다. 앞서 말했듯, 단지 도망과 회피의 차원이 아닌, 다른 세상, 다른 하늘 아래에서는 ‘괜찮을 수도 있는’ 나의 존재에 대한 가능성, 일말의 기대감을 깨닫고, 이 나라에서 또다시 숨을 내쉴 수 있었던 이들에게 영화의 결말은 결국, 똑같은 비극적인 절망을 준비해두고, 이를 단편적으로밖에 보여주지 않았다. 결국, 한국 사회에 증오와, 두려움을 바탕으로 자기 연민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 이 세상에 숨 쉴 곳은 결국, 내가 스스로 숨을 쉴 수 있어야만 생기는 것. 그래서 지치지 않고, 한 번의 숨을 더 내쉬어야 할 것을 요구받고 있다고 느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한 국가 안에서 안도감을 느끼며, 적당한 만족을 가지고 사는 것이 그리도 어려운 일일까. 이 땅에서 눈치보지 않고 크게 한 번의 숨을 내쉴 수 있는 평화가 주어지는 것이 그렇게나 이상적인 것일까. 극단적인 죽음의 결말이 한국이 싫어 떠난 이들에게, 정처 없는 삶의 비극을 극대화시킨 것만 같았다.

 영화에서 또 다른 죽음은, 몇 차례 고시를 준비하고 있던 계나의 대학 동기인 ‘경윤’을 통해 투영된다. 시험 낙방 후, 경윤이 생을 마감하고, 계나는 잠시 경윤을 만나는 꿈을 꾼다. 시험만 끝나면 꼭 어딘가로 여행을 가고 싶다는 경윤의 말은 현실보다 더 생생하게 계나의 꿈을 통해 드러났다. 친구들과 언제 지하철을 타다가, ‘노량진에서는 곧 죽음 밖에 앞두고 있지 않은 수산시장의 저 생선들 보다 어쩌면 인간들이 더 불쌍할지도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한여름에도 1호선 노량진역에서 열차가 정차하면, 바깥에서 알 수 없는 스산한 찬기가 열차 안으로 들어온다. 365일 회색빛인 도시. 경윤의 죽음 또한, 수많은 비극을 만들어내는 경쟁 사회 속에서 결국 스스로 끝을 만들어내는 젊은이들이 많은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경윤은 행복하고 싶어서, 죽음을 택했을까? 아니면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아서? 경윤은 아마도, 살고 싶어, 죽음을 택했을 것이다. ‘죽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살기’가 너무 싫었던 거다. 행복을 찾아 길고 긴 여행을 떠난 경윤의 이야기가 더욱 무서운 이유는 꾸며진 이야기가 아닌 현실의 이야기에 더 가깝기 때문일 것이다. 과연 죽음을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젊은이들이 몇이나 될까. 영화에서나마 그가 죽지 않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한동안 생각했다.


“우리 행복하자.”


 영화에서 등장인물들이 흡연하는 장면을 빈번하게 볼 수 있다. 어쩌면 숨을 쉬는 법보다 참는 법을 먼저 가르친 사회에서 그들이 쉴새 없이 피는 담배는 한 번의 한숨이었을까. 더이상 한숨을 내쉬는 것으로만은 분노를 표출할 수 없고, 지친 삶을 이해받을 수 없을 때, 결국 내가 지고 말아야, 세상이 돌아가는 걸 깨닫고는 깊게 푹 내쉬는 한숨 같았다.

 계나와 같은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종종, 아니 하루에도 몇 번을. ‘잘파 세대’ (1990년대 중후반~2020년대 중반에 출생한 세대) 가 한국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입시 및 취업 경쟁 등의 혹독한 경쟁 시스템’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어쩌면 아주 밑바닥인 삶보다 애매한 중간의 삶이 더 불행하다는 것. 작중 계나는 한국인들은 죽을 때까지 일을 한다고 말한다. 우리나라가 그렇다. 제 자리를 타고 태어나, 나만 잘하는 것이 아닌, 내가 잘하면서도 남이 못해야 한 계단 올라갈 수 있다는 상대적 교육 평가 시스템 속에서 교육 받아, 한 시라도 쳇바퀴를 돌리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 같은 불안감에, 쉴새 없이 노력하고, 일한다. 내가 잠시 힘들어서 이 일을 못 하겠다고 하면, 내 자리를 대신 하겠다고 나서는 이들 약 5000명쯤이 뒤에 서 있으니, 지쳐도 도통 지친 티를 낼 수가 없다. ‘땅덩어리는 좁은데, 사람들이 많아서 그래.’ ‘한 번 나라를 뺏긴 적이 있어서 그래.’ 정말이지 이 이유들이 현재 우리의 인간성을 깎아내리고 있는 걸까. 이 영화를 선택한 이유는 ‘내 이야기’가 담겨있을 것 같아서였다. 나 또한 계나처럼 지독한 경쟁 시스템에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 보는 내내 턱턱 숨이 막혔다. 계나와 나의 다른 점이라고 하면, 힘든 상황과 이 나라를 뜨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여기를 벗어나 어딘가로 떠나게 되면, 왜인지 나의 능력이 부족해서 도망치는 사람이 될까봐, 그건 그거대로 내가 너무 불쌍해서. 그리고, 그 조금 힘든 것도 버티지 못해, 쉽게 포기해버리는 모습이 무책임한 보챔 같을까봐, 선뜻 나서기가 무서웠다. 도망치는 데에도 누군가의 인정과 나름의 안주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만큼 불안한 사회에서 악에 받쳐 ‘생존’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겠다. 한국은 지독하게 남의 삶에 관심이 많다. 지독하게 예의 바르고, 또, 지독하리만큼 실패에 박하다. 고등학교 시절, 장차 6번의 모의고사를 치루고 난 후, 떨어지는 낙엽만 봐도 콱 죽어버리고 싶었던 시절, SNS에서 이런 핀란드 이민국 슬로건 문구를 본 적이 있다. ‘이곳에서는 실패해도 괜찮습니다’ 사진을 한참 보고, 열아홉의 난, 한동안 참았던 눈물을 그 자리에서 다 쏟아냈다. 그때의 난, 이 세계에 실패에 관대한 곳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어쩌면 난, 그때 서야 실패는 ‘할 수도 있는 것’이라는 걸 처음 알았을지도 모르겠다.

 <한국이 싫어서> 의 배경은 특별히 날씨가 맑아, 뉴질랜드가 아름다운 섬나라임을 강조하는 장면도, 이 나라가 너무 좋다고 말하는 뉴질랜드 자국민이 등장하는 장면도 없었다. 오히려 날씨가 좋은 날의 배경에서 계나에겐 늘 그늘이 비췄다. 혹은, 단색의 그리 밝지 않은 색상 계열의 옷을 입고 있다거나. 장건재 감독은 다소 칙칙하거나, 고요한 배경을 형성하면서 타지에 대한 맹목적인 동경을 단절하고, 끊임없이 ‘매일이 맑은 나라는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조금 더 성장한 나는 이젠 대한민국이 죽일 듯이 혐오스러울 정도로 그리 최악인 나라는 아니라는 걸 안다. 다만, 행복의 주체를 본인 스스로로 만드는 방법과, 그렇게 할 수 있는 적절한 환경을 잘못 형성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행복을 누리기엔, 그에 너무 벅찬 상대적 책임감을 부여해, 함부로 들뜨지 못하게 만든다. 그래서인지 크고 나선 왜인지 누군가에게 ‘행복해.’란 말을 건네기가 쉽지 않았다. 그 말을 받는 이가 행복에 얼마큼의 책임을 져야하며, 또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야할 지 가늠이 안 갔기 때문이다. 결코, 행복하지 않아도 그건 무너질만한 사유가 되지 않으니, 의무감에 하는 행복 말고, 불안해서 하는 행복 말고, 그냥 우리 그 행복의 책임을 같이 해서, 어제보단 오늘 더, 오늘보단 내일 더, 가벼운 숨을 내쉬자고. 조금 더 불안하지 않은 밤을 보내게 되자고 말하고 싶었다. 그래서 ‘행복해’ 가 아닌 ‘행복하자.’ 영화를 보고 나서의. 나와 같은 누군가에게, 어디에선가 당신을 위한 여행을 하고있는 이 세상의 모든 계나들에게, 행복의 책임을 나누며 절실하고도 가벼운 말을 건넨다. ‘우리 올해는 더 많이 행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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