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감이 항암제다
호들갑 의사의 진단으로 잠시 소동을 부리며 서울에 다녀왔다. 암일지도 모른다는 은근한 협박(?)이 풍파를 몰고 와서 대범한 척하려는 나를 가만 두지 않았던 것이다.
순전히 이기적인 결정으로 오십 다 된 나이에 유학이라는 모험을 감행한 지 3년째일 때다. 낡은 두뇌와 체력으로 이 뒤늦은 결심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쏟아붓는 시간에 비해 성과는 미미하고 스트레스만 늘어가고 있던 즈음이다. 해마다 체크하던 건강문제도 당연히 뒷전이었다. 그러기를 한 삼 년 하고 보니 나보다도 식구들이 더 지청구를 대기 시작했고, 결국 나는 종합검진을 받게 되었다. 그 결과 유방촬영에서 정상으로 보이지 않는 세포가 관찰된다는 의사의 소견이 나왔다. ‘정상으로 보이지 않는 세포’는 집안에서 태풍의 눈이 되었다. 나의 태도가 시큰둥했기 때문이다. 의사와 간호사는 나의 암 전력을 문제 삼으면서 속히 정밀검진받기를 주문했다.
그러나 팔구 년 전, 갑상선암 진단을 받았을 때 나는 이미 그 낱낱의 절망을 경험했다. 수술 후 몸이 회복되어 가면서는 오히려 좀 침착했어야 했다는 아쉬움도 있던 터라, 처음에 정밀검사가 필요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내게는 진실로 어떤 동요도 일지 않았다. 설령 암이라고 해도 일상의 리듬을 깨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정밀검진을 받는다는 것은 아이를 데리고 유학 중인 내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당장 한국에 다녀오려면 그 비싼 비행기 삯은 둘째 치고, 학교 다니는 아이 돌볼 사람을 구해야 하는데 쉽지 않은 일이고, 나 역시 학기 중이었으므로 학교와 이민국에 여러 가지 허가를 받아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뭣보다도 내 맘이 호들갑스러운 지경에 이르지 않았으므로 막 재미가 붙은 수업을 포기하면서까지 비행기를 탈 생각은 없었다.
두 달이 지났다. 병원에서 검사를 강권하는 메일이 재차 왔다. 며칠이 지나도 내가 반응이 없자 간호사가 전화까지 해 주었다(국제전화를!). 식구들은 안달이 났다. 급기야 모두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사소한 일로도 고성이 오가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는 수 없다. 절차를 밟고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병원행 비행기였다.
나는 서울에 도착하기 무섭게 병원으로 갔고 초음파 재검진을 받았다. 그런데 의사 서너 분이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사진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다며, 왜 내가 급히 검사를 받아야 했는지 의아해했다. 나 역시 거봐라, 하는 심정이 되었다. 담당의사는 6개월 후에 다시 보자고만 했다. 정밀 검사까지는 가지도 않았다. 푸하하 웃음이 터졌다. 병원을 나서자마자 친구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갑작스러운 나의 출현에 친구들이 반갑게 나와 주었고, 순식간에 명동에 중학교 동창들이 모였다. 오랜만에 만난 아줌마들은 수다로 밤을 새웠고, 나는 그날 그 시간에 무한한 감사를 느꼈다. 공부는 한 학기 늦게 마치면 되는 일이고, 아이를 맡기면서 또 비싼 항공료로 날린 돈이야 더 아껴 쓰면 될 일이었다.
과잉진료라고 펄펄 뛰는 친구도 있고 책임감 없고 가벼운 의사라고 힐난하는 친구도 있었지만, 나는 내게 휴식을 준 그의 가벼움에 감사를 보낸다. 그의 가벼움에는 직업적 예민함이 한몫했을 테고, 정말로 암이었다면 느긋하게 방치해 둔 것보다 백 번 나은 결정이었을 테니 말이다. 울고 싶은 때에 뺨 맞은 격으로, 그동안 지쳐 있던 나는 한 학기를 참으로 잘 놀고먹으며 지냈다. 이런 빈둥거림이 그의 처방이었던 모양이다. 호들갑 의사가 내린 호들갑 소견 덕분에 모처럼 내게 주어진 휴가로 집안엔 활기가 넘쳤다. 여행을 계획하고 친구를 초대하고… , 이 행복감이 항암제다. 이 행복을 항체로 6개월 후에도 나는 무사할 것이다. (2014년도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