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해하다

느린 일기 - 내가 얼마나 '나'를 모르는지 알게 되다

by 블랙스톤

2023년 3월 12일 일요일

그냥저냥 화창했던 날


퇴사 7일 차, 아직도 퇴사했다고 자랑해야 할 사람이 많이 남아있다. 만나지 못한 사람, 연락하겠다 마음먹었던 사람들이 잔뜩 남아있지만 단 일주일의 집돌이 생활에 몸이 노곤해져 버렸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던 그 멍 때리기 대회 여학생의 말처럼 회사를 가지 않고 집에서 나가지 않는 삶은 더 이상 스트레스를 줄 직장 상사도, 귀찮은 거래처도, 무작정 져줘야만 했던 고객들과의 만남도 없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조금 행복했다.


공부를 하지 않는데도 책상 위를 정리하고 옷장 속에 옷을 정리하다 내가 마지막으로 구매한 옷이 입사 인터뷰를 위한 면바지와 스웨터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차피 회사에서는 유니폼을 입었다.


아, 이래서 소개팅이나 선을 보러 나가면 다들 표정이 밝지 않았던 거구나.

새삼 그분들에게 미안해졌다. 못생겼으면 옷이라도 잘 챙겨 입었었어야 했는데.


새 옷을 사서 옷장을 좀 채우는 것을 다음 목표로 잡았다.

바닥에 차이는 돌멩이라도 조금 다듬어져 있으면 혹시나 특이 취향이신 분이 집어갈 수도 있으니.


책장을 정리하다가 내가 마지막으로 구매한 책이 1년 전의 소설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시집은 구매한 지 3년이 넘어가고 집 근처 도서관의 회원증은 하도 사용하지 않아 해지가 되어 있었다.

경조사 때만 사용하던 구두는 밑창이 떨어져 있었고 정장은 해져서 버려야 했다.


정리하고, 돌아보고, 새로 결심하는 시간 속에서 내가 얼마나 지금의 '나'를 모르는지 알게 되었다.


젊은 시절 '나'는 남의 시선은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나 혼자의 시간을 중요하게 생각했었다.

책을 통해 지식을 얻는 것을 즐거워하며 무슨 일이든 천천히 돌아보며 진행하는 것을 좋아했었다.


온전히 나에게만 관심을 쏟을 수 있는 이 시간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혼자만의 시간은 예전에도 있었겠지만 그것을 아무 생각 없이 즐길 수 있는 순간은 또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

-아직은 퇴직금이라는 뒷배가 있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회사의 규격에 맞춰져 있던 십 년이 끝났다.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며칠간 집안을 둘러보며 떨어져 있던 '나'의 기억들을 주웠다. 서랍 속에서, 책장에서, 침대 뒤로 넘어간 공책에서도.


회사원 십 년. 나쁘지 않았다. 나름 칭찬도 받았고 지역 내에서 다음 진급대상자로 거론되기도 했다.

다만 그건 구성원이었다. '나'라는 사람보다는 회사에 최적화된 구성원.


아직도 출근시간 전에 눈이 떠지고 옷장 안의 유니폼을 보며 저걸 어떻게 평상시에 입을 수도 있지 않을까? 혹은 언젠가 써먹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지만 그게 미련이란 걸, 혹은 습관이란 걸 잘 안다.

-유니폼은 버리기로 했다. 하지만 뭔지 모를 찜찜함에 아직은 보관 중이다.


나는 조금씩 이 여유로움에 적응하고 있다. 조금씩 '나'를 회복하고 있다는 느낌에 어제보다 오늘이 조금 더 행복해지고 있다.

이러한 행복이 이후에도 더 지속되기를 바라본다.





그래서 혼자 생각했죠. '이 사람은 날이 저물기 전에 죽을 거라는 것도 모르고 1년을 준비하는구나.'
그리고 이제 사람에게 허락되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도 깨달았습니다. 사람에게는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아는 능력을 얻지 못했던 겁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중에서
-지은이 레프 톨스토이, 옮긴이 이순영,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톨스토이 단편선』, 문예출판사, 2015,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중에서





내게 필요한 건 둘째치고 '나' 자신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있으니 당연하게 내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지금의 내가 알 수가 있나.

부디 이 시간이 내가 '나'에 대해 잘 이해하고 알게 되어 '나'와 친해질 수 있는 시간이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