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떨떨하다

느린 일기 - 어찌 됐든 더 놀 수 있게 된 건데 희한하게 기쁘지 않았다

by 블랙스톤

2023년 3월 16일 목요일

약간 흐리고 찝찝하게 무더움


며칠 전 계획했던 대로 내일 배움 카드를 신청했다.


마음 같아서는 해외여행이라도 다녀오고 싶었지만 그럴만한 간덩이는 이미 대학을 졸업할 즈음에 쪼그라든 지 오래다.

그래도 나중에 추억할 거리를 위해 국내 여행을 알아보던 중, 한 반년만 쉬면 안 되겠냐는 나의 물음에 어머니가 등짝 스매싱으로 답을 해주셨다.


머리털 다 뽑히기 싫으면 적당히 하라는 엄포에 미뤄두었던 직업훈련을 알아보았다.


무거운 엉덩이로 겨우 마음을 다잡고 카드를 신청하고 훈련받을 시간을 결정했다. 겨우겨우 했는데 고용복지플러스센터에서 연락이 왔다.

회사에서 내주던 4대 보험 중 뭔가가 아직 해지가 안 되어 있으니 근로복지공단에 연락해 보라고.


결론적으론 고용보험은 회사에서 따로 해지 신청을 해야 하는데 그걸 안 했다고 하더라.


급하게 본사에 연락을 넣어 빨리 좀 처리해 달라고는 했지만.

원래 내가 급하다고 남도 급한 일은 아닌지라 퇴근시간이니 내일 신청을 해주겠다고 했다.

-물론 바로 될 리가 없지 무려 일주일을 더 끌었다


덕분에 훈련 시작일을 맞추지 못해 한 달가량 쉬었다가 훈련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런데 사람 마음이란 게 참 간사하다.


더 쉬었으면 하던 마음을 겨우 다잡아 억지로 이번 달에 훈련을 시작하기로 했다. 그런데 어쩔 수 없이 미뤄지게 된 상황이다. 분명히 더 쉬는 시간이 생긴 건데 왜 기분이 좋지 않고 의욕이 팍 꺾이는 건지 모르겠다.

이건 내 의사로 미뤄진 게 아니라서 기분이 나쁜 건지. 어찌 됐든 더 놀 수 있게 된 건데 희한하게 기쁘지 않았다.


어쩌면 아직도 나의 현재가 회사라는 과거에 얽매여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의욕적으로 나서는데 들어오는 태클이 내가 최선을 다해 마무리해 주고 나왔던 곳에서 온 것이라 뒤통수라 느꼈을 지도.

인수인계 다해주고 따로 시간 내서 가이드북까지 만들어주고 나왔는데 나한테 이러기냐.





느린 것은 느려야 한다, 느려져야 한다고 다짐하는 내 마음뿐, 느림, 도무지 느림이 없었습니다. 자유로운 자유*가 없는 것처럼, 정말 느린 느림은 없었습니다.
각주, *윤호병, 『아이콘의 언어』, 문예출판사, 2001
-이문재, 시집『지금 여기가 맨 앞』, 문학동네, 2014,「정말 느린 느림」중에서





과거도 나도 앞으로도 나일 텐데 그럼 이런 것도 다 감수해야 할 텐데. 왜 매번 나는 달라지는지.

정말로 나 다운 나는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지 가끔 궁금해진다.

그냥 지금의 나는 뜻대로 되지 않는 것에서 심통이 난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몇 번이나 시집을 들여다보았다.


기분이 알쏭달쏭한 하루였다

-마흔이 되어도 스스로의 기분도 잘 모르는 폼이 아직도 어른이 되려면 멀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