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린 일기 - 내가 그대로 사라져 버려도 아무도 모를 거야
2023년 3월 25일 토요일
아침에 살짝 비가 왔지만 이내 화창해짐
정말 오래간만에 대학교 동창을 만났다. 용케도 연락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던 누나였는데 내가 바쁘다는 핑계로 퇴사를 하고 나서야 약속을 잡았다. 누나는 고맙게도 흔쾌히 시간을 내주었다.
약속 장소는 남한산성. 평소 산은 아래에서 풍경으로 바라보며 막걸리를 마시는 거라 굳게 믿어왔다. 다만 누나의 귀중한 휴식일이기에 내 취향은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스무 살, 대학 생활은 낯섦의 연속이었다.
교복이 아닌 옷을 입고 등교를 하는 것은 초등학교 이후 처음이었다. 당연히 블루클럽에서 머리를 단정하게 버섯 모양으로 깎고 몸보다 조금 크고 검은색 계열의 옷과 형광색 잠바를 입었다.
-그땐 그게 제일 이쁘고 멋있는 건 줄 알았지.
예쁘게 화장을 한 여자들과 멋있게 머리를 만진 남자들 사이에서 버섯돌이가 된 나는 점심때 라면을 사러 매점에 갔다가 스무 살 버섯돌이를 신기하게 본 누나들에게 얼떨결에 휩쓸렸다.
그렇게 대학교 교실 한쪽 구석에서 나의 스물이 시작되었다.
이제 나는 마흔이 되어 퇴사한 백수가 되었고 직장 다니는 것을 괴로워하는 누나를 만나 상사 욕을 하며 신나게 수다를 떨었다.
여전히 누나는 약간 나른하면서도 밝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고 풀잎의 색이나 나무 사이로 비치는 햇살을 잠시 멈춰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었다.
퇴사 이후 만난 사람들 중에 유일하게 그동안 고생했다고 조금 더 쉬라고 말해주었고 십 년의 시간 동안 일해온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라고 칭찬해 주었다.
마지막으로 칭찬을 받은 것이 언제였는지 잘 기억도 나지 않았다. 아마도 학창 시절 혹은 대학 졸업 즈음이겠지.
어른이 되면서 칭찬에 무덤덤해진 줄 알았는데 그저 제대로 된 칭찬을 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세 시간 정도의 산책을 끝내고 내려오는 길에 누나와 다음을 기약하면서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가버렸다고 이야기했다. 누나는 이제 나이가 들어버린 우리를 이야기했지만 나는 오늘의 시간이 너무 빨리 흘러간 것이 슬펐을 뿐이었다.
여전히 누나에게는 배울 점이 많았고 새로운 것을 많이 생각하게 해 주었다.
스스로는 세상에 찌들었다고 말하지만 아직 스무 살 버섯돌이를 구제해 주었던 그 천진함이 언뜻언뜻 지친 모습 사이로 찬연하게 남아있었다.
그래서 누나에게 고맙다고 이야기했다.
힘들다면서도 매일 노력하는 누나에게 나도 칭찬을 꼭 해주고 싶었다.
누나는 웃어주었고 좋은 사람과 하는 등산은 아마도 조금 좋아졌을지 모르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내가, 이 넓은 세상에서 아무한테도 사랑받지 못하고, 아무도 말을 걸어주지 않고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그런 존재가 되어버렸다는 것을 알게 돼. 내가 그대로 사라져 버려도 아무도 모를 거야. 그건 마치 두꺼운 철상자에 갇혀서, 깊은 바닷속에 가라앉은 것 같은 기분이야.
-출처 무라카미 하루키, 『밤의 거미원숭이』, 문학사상, 2008,
「한밤중의 기적에 대하여, 혹은 이야기의 효용에 대하여」 중에서
텅 빈 집 안에서 가끔 내가 점점 작아지다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있다. 그때마다 한밤중의 기적이 누구에게나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만다.
이 기적 같은 짧은 이야기를 내게 소개해준 것도 누나였다. 새벽이 되어 온통 주변이 밤에 잠긴 듯 먹먹해져 올 때면 마지막 숨과 같이 이 소설의 문구들이 떠오르곤 했다. 그러면 나는 천천히, 아주 조금씩 숨을 내쉬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