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바다로 가다

느린 일기 - 내가 쫀다고 해서 세상이 나를 때리지 않을 것도 아니고

by 블랙스톤



2023년 3월 30일 목요일

날씨 따뜻하고 맑음 그리고 차가운 바람이 붐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얼떨결에 태안에 와 있다.

태안 화력발전소 내의 건축 현장에 첫 출근을 했다. 이십 대 초반에 잡부로 몇 번 막노동을 해본 게 다인 나로서는 당연히 모든 것이 낯설고 무서웠다.

29일 저녁 태안의 학암포에 도착해서 짐을 풀고 다음날 새벽에 일어나 한국서부발전 태안발전본부라는 곳에 신분증을 내고 출입을 허가받았다. 생각보다 아침엔 쌀쌀했고 낮에는 더워졌는데 바닷바람이 한 번 불 때는 추위가 느껴지는 요상한 기후였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잠에서 덜 깬 듯한 기분으로 하루를 보냈다.


며칠 전 친하게 지냈던 동생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건설 기초안전교육이란 것을 급하게 수료하라는 연락이었다.

퇴사 이후 만난 술자리에서 기술을 한 번 배워볼까 한다고 이야기했었다. 동생은 이미 현장기술직으로 일하고 있던 상태였고 자리가 날 경우 연락을 줄 테니 기술을 한 번 배워볼 생각이 있냐고 물었다.

이후에 특별한 연락이 없어서 예정대로 학원을 찾아보고 남은 시간에는 어디를 놀러 다닐까 고민하던 터였다.

갑작스러움에 당황스럽기도 하고 잘할 수 있을지 걱정도 됐다. 그렇다고 고마운 기회를 경험해 보지도 않고 날려버릴 순 없기에 바로 안전교육을 수료하고 나흘 치 작업복을 챙겨서 동생의 차에 냅다 동승했더랬다.

가는 내내 머릿속은 꽃밭이었다.


동생에게 일하는 것에 대해 설명을 듣다가 내가 적응하고 난 이후의 이야기까지 하고 나니 금방이라도 기술자가 될 것만 같았다. 이런 기술직은 처음에 기술을 배우기도 힘들뿐더러 가르쳐 주는 사람도 중요한 법인데 아는 사람을 통해 배우게 되었으니 최상이다.

여러모로 동생이 신경 써주었고 옆방의 반장님들이나 사장님도 친절하게 대해주셔서 예감이 좋았다.


취미가 아닌 것을 새로 배우는 것은 거의 십 년 만의 일이었다.

환경의 낯섦과 함께 나를 괴롭히는 것은 새로이 배우는 것들을 외우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매뉴얼이 있는 것도 아니고 기술자가 하는 작업을 어깨너머로 보면서 순서나 방식을 파악해나가야 한다. 오늘의 작업량이 있는데 나에게 보여주겠다고 천천히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하는 방식을 모두 외워서 그대로 따라 해야 한다고 했다.

머리의 꽃밭이 조금 시드는 것이 느껴졌지만 어쩌랴 세상에 쉬운 일이 없다는 것은 아직 철이 들지 않은 나도 안다.

되든 안 되든 최대한 노력하고 부딪혀 봐야지.


하루의 일과는 네시 반경에 끝이 났고 밥을 먹고 나니 다섯 시가 조금 넘은 시간부터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숙소 바로 옆에 있는 해안가를 거닐었다.

하늘은 깨끗하고 파도소리는 마음을 안정시켜 주었다. 무엇보다 사진에 다 담기지 않을 정도로 그림이 예뻤다. 좋은 징조라고 생각했다.


그래. 안되면 뭐 어때. 어차피 지금이 아니면 더 이상 도전해보지도 못할 것 같아서 회사까지 때려치우고 나온 마당에, 내가 쫀다고 해서 세상이 나를 때리지 않을 것도 아니고.


시간은 어차피 흐르는 거니까.


파도 소리를 한참이나 들으며 생각을 정리하고 나니 노을이 예쁘게 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콧물을 흘렸다.

아, 예쁘기는 하지만 아직은 춥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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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바다를 보게 된 날, 나의 편안한 바다가 되기를 소망하고 바라다


숙소가, 사람이, 그리고 일까지 낯설었지만

하늘이, 바다가 너무 예뻐서 가슴이 설렜다.

낯선 일이 끝나고 계속 이런 바다가 보인다면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