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린 일기 - 그들은 직장으로 향한다
2023년 5월 31일 수요일
살짝 흐리고 습도가 높아 티셔츠 안으로 땀이 흐르는 듯한 날씨
아침 일찍 일어나 씻고 출근 준비를 한다. 출근 준비는 최대한 불을 켜지 않고 잠든 가족들이 깨지 않게 살금살금. 방에서 나올 때에나 씻기 위해 화장실을 갈 때 문소리가 크게 나지 않도록 최대한 천천히 닫고 현관을 나설 때까지 발소리를 죽여본다.
아버지가 새벽에 출근을 하실 때마다 왜 그렇게 살금살금 다니시나 했는데 내가 같은 상황이 되어 보니 어떤 마음으로 그렇게 조심스럽게 다녔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일어나기엔 너무 이르고 그렇다고 다시 잠들기엔 너무 애매한 시간. 나야 새벽에 움직여야 하니 어쩔 수 없다. 하지만 학교를 다녀본 모두가 공감할 아침의 그 달콤한 '십 분만 더!'를 가족에게서 빼앗고 싶지 않았다.
-학교가 아니어도 아침에 '조금 더!'를 외치며 살짝 잠드는 십 분의 달콤함이란!
달콤한 꿈에서 깨어나면 다시 현실을 살아야 하는 건 가족도 같다지만, 굳이 그 잠깐의 달콤함마저도 박탈할 필요는 없으니까.
새벽 시간은 너무 빨라서 잠시만 멍하니 있어도 어느새 저만치 지나가 있다. 시간은 언제나 기다려주지 않기에 자칫하면 첫차는 시간만 태우고 나를 태우지 않고 떠나간다. 그래서 새벽은 언제나 조금 서두르는 시간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성급하게 지나가는 새벽 첫 차에는 매번 거의 같은 얼굴들이 있다.
그 시간을 한 번도 놓치지 않고 항상 같은 칸, 같은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들. 그들은 대부분의 자리가 비어있음에도 항상 같은 자리에 앉아 있다. 이후의 이동까지 생각해 가장 편한 자리에 앉은 것이다. 당신이 새벽에 출근을 하기 시작했는데 자리에 앉아 앞을 보았을 때, 매번 보던 이가 있다면 '내가 누군가에게 그렇게 불편함을 주지는 않았구나.'하고 생각하면 된다.
-이 부분은 물론 극소심한 성격이면서 외향적인 척을 하고 살아가는 내게만 해당되는 부분일 수 있다.
-물론 절대 아는 척은 하지 않는다. 그건 내 심장에 무리가 가는 일이다.
첫차엔 사람보다 아침을 깨우는 찬 공기가 더 많이 타 있는데 시간이 흘러 점점 공기를 밀어내며 타는 사람들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머리가 아직 덜 마른 사람과 눌린 머리 그대로 나온 사람.
술에 취한 사람과 잠에 취한 사람.
밤새 일하고 덕지덕지 매달린 피로에 지친 사람과 무언가를 읽고 외우느라 눈에 힘을 잔뜩 준 사람들.
그들 사이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왠지 가슴이 든든해진다. 이 열차를 채운 대부분은 어떤 식으로든 하루를 부지런히 시작하는 사람들이니까. 이들 사이에 끼어 있으면 누군가가 나를 볼 때 참 부지런한 사람으로 봐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곤 한다. 그러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들 사이에 끼어 출근하고 있다는 것이 아직 내가 삶을 잘 버티고 있다는 증명 같은 거니까.
잠실역에 내려서 확연히 많아진 사람들 사이로 출구를 찾아 걷는데 핸드폰에서 요란한 경고음이 울렸다. 나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핸드폰이 울렸기에 잠시 동안 지하철역 안은 다급하고 신경질적인 그 핸드폰 경고음만으로 가득 찼다. 모두가 걸음을 멈추고 서로를 돌아보거나 급하게 핸드폰을 뽑아 들었다.
대피할 준비를 하라는 경계경보 문자.
보통 지하철로 대피하라고 교육을 받았었는데 지금 지하철이니 출근을 하지 말고 기다려야 하나?
그런 생각은 정말 찰나였다.
멈춰섰던 모든 사람들은 찰나의 내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움직였다. 각자의 직장으로.
누구 하나 뛰는 사람이 없었기에 알 수 있었다. 그들이 직장으로 간다는 걸.
그 사이에서 나도 천천히 걸음을 옮겨 현장으로 향했다.
일하는 내내 딴생각이 들었다. 뭔가를 경고해 주기 위해 경보가 울렸음에도 출근길이기에 모두가 출근을 한다. 내가 출근한 이 현장에는 지각한 이나 출근하다가 돌아간 이가 단 한 명도 없었다.
일상을 무너트리는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경보는 울린다. 만약 경보가 울렸을 때 내가 대피를 위해 지하철에 머물렀고 다시 해제 문자가 와서 지각을 했을 땐 아무런 질책 없이 넘어갈 수 있었을까? 지금의 직업 특성상 별 일 없이 넘어갔을 수 있다. 이 일은 출근 전에 연락하고 출근하지 않으면 그저 일당이 없어지는 것뿐이니까.
쉬는 시간에 전 회사 동료에게 연락하니 경보 문자 때문에 오픈이 늦은 점포는 하나도 없다고 했다. 예전에 내가 있었던 점포들는 오픈 조가 7시 전후에 오는 물건을 받고 장사 준비를 해야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 모든 인원이 경계경보를 듣고도 대피 없이 회사로 직행한 것이다. 모두가 지키지 않은 경보에 따라 대피를 했다면 오히려 일상이 무너졌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여기서 생각을 그만두기로 했다.
경보가 울린 아주 단순한 일이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잘 모르겠으며 깊게 생각하지도 않으려 한다. 뭔가 이상하고 잘못됐다는 생각은 들지만 살면서 그런 걸 한두 번 본 게 아니니까. 지금은 그저 그러려니 하고 넘긴다.
어른이 된 후에 보는 것들은 가끔 그렇다. 분명히 꼬여있는 일이고 풀어야 할 일이지만 내가 할 수 없는 일들, 그런 것들을 확인할 때마다 드는 무력감은 그저 흘려보내야 한다. 가슴에 품어봐야 나만 답답하기만 한 일이기에 생각에서 흘려보내면서도 이 일을 기억해 둔다.
-아주 복잡한 일이라 생각을 하면 끝도 없기에 생각하지 않으려는 것도 있다.
-이 이야깃거리는 단단히 기억해 둔다. 친구들이 모두 공감하고 같이 욕할 수 있는 좋은 이야깃거리 아닌가!
-사회에 뭔가 문제가 생겼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첫 번째 일은 아주 크게 열심히 떠드는 것이다.
오늘의 일을 대충 마무리하고 집으로 가기 위해 환복을 했다. 작업복이 든 가방을 달랑이며 지하철 역으로 걷자니 자연스럽게 아침의 경계경보와 안전문자가 생각난다. 시간이 조금 지나서인지 그 경보에 대해 생각하는 순간 자연스럽게 가족이 생각났다.
가족과 함께 잘 살자고 열심히 돈을 버는 것인데 사이렌이 울리는 순간,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출근은 어떻게 하나?' 였다는 것이 조금 스스로에게 씁쓸했다. 괜히 집으로 돌아올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퇴근하면서 오늘은 맛있는 걸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리 가족이 모두 좋아하는 음식을 떠올리며 전화했다.
엄니! 오늘은 치맥입니다! 그냥 사고 싶었어요! 피자요? 그것도 시킬게요. 아니에요. 세트로 하면 사이드까지 해도 더 싸져요. 괜찮아요. 다 먹고살자고 하는 건데요. 그냥, 오늘은 다 같이 맛나게 먹고 싶네요.
흠집이 있으면 좀 어떤가
식구들은 둥그렇게 모여
뚝뚝 흐르는 단물까지 빨아 먹을 것이다
사내는 겨우 복숭아들을 싣고
페달을 힘껏 밟는다
자전거 바퀴가 탱탱하다
서광일,『뭔가 해명해야 할 것 같은 4번 출구』, 파란, 2017, 「복숭아」중에서
매일 어딘가 멍들고 흠집 난 상태로 집으로 돌아간다. 그래도 자고 일어나 다시 또 출근할 수 있는 건 나를 믿어주는 이들이 있다는 작은 희망, 함께할 이가 있을 것이라는 작은 믿음, 그것뿐이다. 그때까지 나는 나를 보듬으며 하루를 살아간다.
치킨, 피자 빈 박스를 치우고 씻고 누웠다. 한껏 부풀어오른 배를 토닥이며 어찌됐든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고된 하루에 힘들었고 오늘은 불안함과 후회까지 했지만 바로잡을 기회가 있었다. 다행히도 그 기회를 발견한 나는 놓치지 않고 가족과 작은 시간을 보냈다. 그 작은 안도가 나를 기분좋은 잠자리로 인도했다. 오늘도 다행히 나쁘지 않은, 어쩌면 조금 좋은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