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박지탄, 그 이어지지 않는 시간
“요즘 녀석들은 근성이 없어. 나 때는 수천 번씩 검을 휘두르고도 밤이면 전술 교본을 외우곤 했었네. 그뿐인가? 요즘 녀석들은 이기적이야. 자신밖에 몰라. 티끌만큼도 자신이 손해 보는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해. 희생과 헌신이 따라야 사람들이 제 뒤를 따르는데 말이야.”
노기사는 허옇게 세어버린 흰 수염을 슬쩍 쓸어 넘긴 후 잔을 들었다. 그리고 그 잔 안의 술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어쩌다 이런 이야기를 시작했을까 하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목에 매달린 펜던트에서 아무런 신호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 마법이나 주술적 힘이 작용했다면 분명 방어마법이 작동하면서 신호를 보내왔을 테니까.
그렇기에 이 술집에 어떻게 들어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은 수십 년 만에 술을 많이 마신 것으로 넘길 수 있었다. 오늘은 그래도 되는 날이었다.
“은퇴 권유를 들었네. 오늘. 나의 영원한 주군에게서.”
사실 노기사는 은퇴하고 싶지 않았다.
신체 능력이 떨어지는 것을 인정하고 일선에서 물러나 지휘관으로서 살아온 날이 더 익숙해졌다. 하지만 노기사는 아직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더 있다고 믿고 있었다.
많은 시행착오와 실수를 겪어가며 만들어낸 이 경험을 다음 세대에 온전하게 건네주고 싶었다. 가진 것이라고는 맨몸뚱이 하나였던 자신이 어떻게 수십만 대군을 이끄는 자리까지 올라올 수 있었는지 그 비결을 건네주고 싶었다.
그들은 자신과 같은 시간 낭비를 하지 않기를 바랐다. 노기사가 버티고 서 있으면 분명 젊은 세대들이 그런 실수를 하지 않도록 알려 줄 수 있으리라.
책으로 써내는 것보다는 피부에 닿도록 생생한 현실을 보여주고 느끼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더 확실한 가르침이 될 거라 믿었다.
그들이 자신이 겪었던 후회를 겪지 않기를 바랐다. 전 세대의 시행착오를 겪지 않는 것이 다음 세대에게 줄 수 있는 이점이라고 생각했다.
노기사는 잔을 들어 술을 입에 머금었다. 더없이 청량한 느낌이 들고 그 끝에 단맛이 감돌았다가 슬쩍 씁쓸한 맛이 감돌았다. 그 변화하는 맛이 인생처럼 느껴져 한 번에 마시지 못하고 조금씩 입에 머금고 음미했다. 인생을 닮은 칵테일 때문인지, 씁쓸하고 텁텁한 끝 맛 때문인지, 처음의 시원하고 단맛을 찾아 칵테일 하나를 더 주문했다.
묵묵히 주문을 받고 천천히 움직이는 마스터를 바라보았다. 머뭇거림 없이 빠르게, 술 한 방울 흘리지 않으면서 조용하게, 그리고 아주 간단하고 쉬워 보이는 모습으로 술을 만드는 마스터가 꼭 자신이 젊은 시절 검을 휘두르던 것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래. 그때는 뭐든지 다 명확하게 보였는데.
“이야기를 들었네. 이제 나는 늙었고 뻔한 소리만 한다더군. 시대가 달라지고 있고 나는 뒤처지고 있다고.”
처음 그런 소문을 들었을 때 노기사는 코웃음을 쳤다. 그들이 낡았다고 말하는 것은 가장 원론적인 것이며 기반이고 기둥이었다.
충성과 신념, 정의와 귀족의 의무, 그 모든 것은 위에 선 자로서 지켜야 할 당연한 법칙이다.
그런 것이 낡았다는 것은 이해할 수도, 이해해서도 안 되는 이야기이다. 그들이 말하는 낡은 것은 귀족의 품위를 만들어 주는 가치이다. 그렇기에 노기사는 국왕의 앞에서 옳다고 생각하는 말을 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오늘 국왕은 노기사를 따로 불러냈다. 국왕은 왕관을 벗은 상태였는데 가끔씩 노기사에게 편안한 모습을 보이곤 했기에 이상한 일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국왕은 물었다. 처음에는 근황을. 이후엔 그의 아들 이야기를. 그리고 새로 태어난 증손주에 대해서도. 마지막으로 가만히 한숨을 내쉬며 국왕이 말했다.
“시대가 변하고 있네. 점점 더 빠르게. 따라가기 벅찰 정도로. 나도 자네도 이제는 나이가 들었군.”
그리고 몇 번이나 망설이다가 나지막이 은퇴하지 않겠는가 하고 물었다. 노기사는 가만히 서서 왕관을 벗은 국왕의 흰머리를 바라보았다. 태양처럼 환한 금발 머리를 가지고 있던 나의 주군. 어느새 하얗게 내린 서리가 노기사의 눈에 가득 고였다가 가슴에 내려앉는다. 노기사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명이라면 받고 부탁이라면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네.”
아직 어린 녀석들이 대부분인데. 아직 딱 마음에 드는 후계자를 찾지도 못한 상태였다. 노기사는 그것이 마음에 걸렸다. 아직은 자신의 역할을 대체할 자가 없었다.
검만 휘두를 줄 안다고 기사가 아니다. 주군에게 충성을 바치며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위에 선 자로서의 무게를 견딜 줄 알아야 한다.
가장 꼭대기에 오를 분에게 올바른 길을 보여드리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물론 그 노력이 올바른 방향이어야 하겠지만.
“은퇴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명확해지는 것들이 있더군. 내게는 이제 시간이 부족해. 이 나이에도 새삼 깨닫게 되네. 알고 있던 것을 실행하지 않고 잊고 지냈다면 그건 아는 게 아니었어. 이제는 옳은 말을 해줄 수 있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더군.”
아직 돌봐줄 힘이 있을 때 뒤로 물러서 줘야 하지 않겠나. 돌아서는 그를 향해 국왕은 아주 작게 말했다. 혼잣말하듯이.
조용한 대전 안에서 늙었다고는 해도 아직 높은 경지를 유지하고 있는 노기사가 듣지 못할 리 없는 목소리였다.
그것은 자신에게 분명하게 전하고 싶은 말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은퇴와는 견줄 수도 없는 파장의 이야기였다.
왕이 물러난다는 것은 아마 선위일 것이다. 정무회의에 태자가 참여한 지는 꽤 되었으며 내정 일부는 직접 운영하고 있기도 했다.
미리 후일을 준비한 현명한 왕, 나의 주군이 선위 직전 권하는 은퇴라니. 평생 뜻을 함께해 왔지만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혹시 자신이 새로운 왕에게 걸림돌이라 생각한 것인가.
노기사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 척 알현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연무장을 찾아 훈련하는 이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답답한 마음에 검이라도 휘두르고 싶어 찾아왔지만 땀을 흘리는 후배 기사들을 바라보는 것도 꽤 마음에 안정을 가져다주었다. 조금씩 자신의 기분에서 빠져나오자 주변의 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자신의 훈련에 매진해도 모자를 이들이 어느새 자신의 시야 안에 들어와 무기를 휘두르고 있었다. 여전히 진심으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지만 가끔씩 자신이 있는 곳을 돌아보는 것이 어지간히 신경이 쓰이는 듯했다.
물론 저 멀리 주변은 돌아보지 않고 훈련만 하는 이들도 보였지만 자신의 눈치를 보는 이들이 훨씬 더 많았다.
노기사는 그런 시선이 이상하지 않았다. 노기사는 공인된 왕국의 첫 번째 기사. 기사들의 스승으로 불리기도 했다. 젊은 기사들은 자신의 성과를 조금이라도 노기사에게 보여주어야 더 영광스러운 역할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기사들이 자신의 눈치를 보고, 한 번이라도 자신의 달성한 경지를 더 멋지게 보이려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갑자기 오늘의 국왕이 생각났다. 사실 노기사는 한 번도 국왕에게 잘 보이려 한 적이 없었다. 그저 자신이 가장 옳다고 생각하는 조언을 했을 뿐이다.
이 역시 아주 당연한 일. 현명한 국왕은 충성스러운 기사의 마음을 당연하게 알아주었다. 옳은 것은 어떤 식으로든 밝혀지고 또 진심은 전해지기 마련이었다.
곧 노기사는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노기사에게는 당연한 일이 젊은 기사들에게는 당연한 일이 아니었다.
어쩌면 현명한 국왕은 이것을 알리기 위해 왕관을 벗고 자신을 불렀는지도 모른다.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하지 않는 저 기사들의 문제지 자신은 항상 옳은 일을 당당하게 해왔지 않은가.
설마 옳은 말을 하는 것이 거슬려 은퇴를 권유하는 것인가?
그 옳은 말들이 새로운 왕을 흔들 거라 느낀 것인가?
노기사는 검집을 꽉 움켜쥐었다. 국왕은 현명했고 작은 일도 헤아려 틀리지 않은 선택을 해왔다. 하지만 이번 일에 대해선 아니었다.
시대가 달라지고 있다고 하여 옳은 것이 틀린 것이 되지는 않는다.
그런 것을 우리는 기본이라고 불러왔다. 기본조차 지키지 못하는 이들을 두고 은퇴를 해야 한다니.
기사는 검과 충성, 그리고 명예로 말한다고 하지만 그런 것들의 가장 중심에는 기사도가 있어야 했다.
‘기사로서 마음가짐’.
기사는 단순히 위에 서는 귀족이 아니라 그 위에 서는 귀족마저도 지키는 방패이며 적을 도륙하는 검이어야 한다.
모두를 지키고 적을 공격하는 방패와 검.
사람이면서도 ‘무기’로서 기능해야 하는 기사는 아주 단단하고 바른 신념이 있어야 한다.
신념이 없거나 어긋난 ‘무기’는 주변 모두를, 심지어 주인까지 다치게 하기 마련이다. 그 단단한 마음도 없이 그저 눈치만 보는 이들에게 무엇을 맡길 수 있으랴.
수십 번이나 전장을 경험하고 소리 없는 암투의 정쟁까지 겪어낸 자신만이 이들에게 올바른 신념과 단단한 정신을 가장 잘 무장시킬 수 있는 적임자인데, 어째서 시간은 이렇게 허무하게 지나가고 중요한 것의 선후마저도 바뀌어 가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세상에는 바뀌지 않는 것들이 있네. 이게 맞는데. 그저 낡았다고만 하니.”
노기사는 마스터가 밀어준 잔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아직도 해야 할 것들이 많고 할 수 있는 것들도 많은데 시간이 모자랐다.
후배들은 단단하게 왕국을 지탱할 수 있을까?
시행착오를 겪을 후배들이 답답하고 그 시간 동안 혼란에 빠질 왕국의 미래가 암담했다. 어쩌면 자신과 국왕이 왕국을 위해 쌓아온 것들마저 흔들릴지 모른다.
은퇴한 후의 노기사가 그 흔들리는 왕국을 지탱할 수 있을까? 노인은 선뜻 잔을 들지 못하고 계속 잔대만 만지작거렸다.
이내 잔을 들면서 역시 아직 왕국에는 자신이 필요하며, 이런 이야기를 할 사람은 자신 뿐이라 느꼈다.
충성스러운 신하는 주군이 옳은 길로 갈 수 있도록 올바른 조언을 해야 한다.
내일 다시 국왕을 만나 아직 우리의 할 일이 남았으며 틀린 선택을 한 국왕에게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강하게 주장해야겠다고 노기사는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