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신의 친절한 이웃, 센티멘탈 무림인
사내는 길었던 이야기를 끝내고 칵테일을 입안에 머금었다가 천천히 삼켰다. 그리고 한 조각의 안주를 이리저리 살피다 입에 넣고서는 가만히 눈을 감고 그 맛이 주는 느낌들을 충분히 음미했다.
마스터는 그런 그를 보며 미소 지었다. 그리고 새로운 잔을 꺼내어 두고 칵테일을 만들기 시작했다.
에미는 그의 이야기가 마스터의 마음에 들었음을 알았다.
마스터는 가장 아끼는 잔을 꺼낸 후 새로운 칵테일을 만드는 중이었다.
심지어 사내에게 이것저것 묻기까지 했다. 그리고 답하는 사내와 함께 작게 소리 내어 웃기까지 했다.
에미는 다시 한번 사내를 자세히 보았다. 흔한 무림의 중년 사내. 짧은 머리도 칼자국도 그저 그러려니 하게 만드는 무림의 사내.
뭔가 이전의 무림인들과는 다른 점이 있는 걸까? 아무리 꼼꼼히 살펴도 크게 다를 바는 찾지 못한 에미였다.
마지막 안주와 잔을 비워낸 사내는 잠시 눈을 감고서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리곤 이내 눈을 뜨며 말했다.
"도저히 이 맛을 재현(再現)할 수가 없을 것 같소이다.
중원제일의 숙수에게 가 내가 느낀 것들을 모두 말한다 하더라도 똑같이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의심이 되는구려. 허허.
나만 이렇게 맛난 걸 먹고 온 것을 알면 부인이 꽤 샘을 낼 것인데 말이오."
그는 그렇게 말하며 슬쩍 마스터의 눈치를 보았지만 마스터는 여전히 살풋이 웃어 보일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작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휘휘 저은 사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공수(拱手) 인사를 했다.
"감사하오. 정말 잘 먹고 잘 마셨소이다. 천상의 맛이란 이런 것이구나를 느꼈소이다.
혹시라도 이후에 초대(招待)를 주실 것이면 꼭 제 부인과 함께 불러주시기를 고대하겠소이다.
그럼 이만 이 설모(某)는 현생(現生)으로 돌아가겠소이다. 부디 신선(神仙)께서는 잘 계시길 바라오."
인사를 건넨 사내는 호쾌한 걸음걸이로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마스터가 만족하는 이야기를 하고서도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하고 떠나간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떠나가는 사내의 뒷모습을 보면서 마스터는 여전히 작은 미소를 띠고 있을 뿐이었다.
살짝 당황한 에미는 뒤집어진 상태로 자고 있던 쁘니의 흘러내린 뱃살을 양쪽으로 잡고 조몰락거렸다.
따뜻하고 물컹이면서 약간은 단단한 것이 손에 잡히자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곧 깨어난 쁘니의 냥냥펀치를 얼굴로 막은 것은 그저 덤인 일이다.
잠에서 깨어난 쁘니는 보통 하루에 한 번 정도 산책을 나간다.
바에 손님이 오는 날은 바를 닫은 후에 산책을 나가기에 급하게 주방을 정리했다.
주섬주섬 산책을 준비하고 홀로 나오니 문 근처 테이블에 앉아 에미를 기다려야 할 쁘니가 보이지 않았다.
조용히 서서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위쪽에서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마치 대답을 하듯 간격을 두고 한 번씩만 울리는 소리. 마스터와 이야기하고 있는 중인 것 같았다.
갑자기 생긴 여유시간에 잠깐이라도 방에 가서 누워볼까 하는데 금방 계단을 타고 위층에서 마스터가 내려왔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난간을 걸어 내려오는 쁘니도 보였다.
난간 끄트머리에서 쁘니는 에미를 보자마자 냐아아아아오오오옹. 하고 울었는데 뭔가 음흉한 느낌이었다.
뭔가를 꾸미는 자의 음흉한 표정. 뭔가 찜찜해진 에미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 마지막 계단 위에 선 마스터는 에미를 보고 말했다.
오늘은 심부름을 좀 다녀오너라. 에미가 대답하기도 전에 마스터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무림(武林)으로.
“저기, 마스터. 저는 아직 마법도 못하고요. 무술도 못하는데요? 누가 때리면 어떻게 해요. 거긴 이야기만 들어도 무서운 동네잖아요.
눈만 마주쳐도 칼부터 꺼내드는 동네던데. 할렘가도 그 정도는 아니겠어요.
심지어 그 동네는 총알도 피하는 사람들이 수두룩 하잖아요. 총을 쥐여주셔도 위험할 것 같은데요.”
에미는 숨도 쉬지 않고 급하게 말했다. 말을 하면서도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는 것이 느껴졌다.
그 정도로 에미는 무림이 많이 무서웠다.
칼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아무나 하늘도 휙휙 날아다닌다니. 심지어 나라에서 통제도 못하는 동네다. 하긴. 하늘을 날아서 도망 다니는데 잡는 게 가능하기나 하겠냐마는.
그런 에미의 모습이 우스웠는지 쁘니가 슬쩍 입을 가리고 웃었다.
웃느라 눈이 휘어진 쁘니를 에미가 무섭게 노려봤다. 최대한 무서운 표정으로 노려봤지만 쁘니는 어깨까지 들썩이며 웃을 뿐이었다.
“걱정 말거라. 너는 바 Bar ‘이바구’의 주방장이다. 내가 없을 때는 네가 ‘이바구’의 주인이야.
모든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니 아무런 문제없을 게다.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항상 ‘사건’이 일어난 이후의 일이거든.”
그렇게 말하며 마스터는 손을 들어 올렸다. 그 손에는 마스터의 방에 걸려있던 중절모가 있었다.
중절모는 에미에게 건네줄 때, 자연스럽게 리본이 달린 밀짚모자로 변했다.
마스터의 기분에 따라 형태가 바뀌는 그 모자는 예전부터 에미가 탐내던 물건이었다.
사실, 서부의 총잡이 손님이 방문했을 때 마스터가 쓰고 있던 중절모가 저절로 카우보이 모자로 변했던 것이 에미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저걸 쓰고 있으면 머리 안 감았을 때 저절로 가려줄 만한 모자로 바뀔 것만 같았기에.
하지만 평소에 탐내던 모자를 건네준다고 해서 휙휙 하늘을 날아다니는 만큼 사람 목숨도 휙휙 날려대는 무림으로 갔다 온다는 건 무리였다.
분명 그렇게 생각했다. 입을 댓 발 내밀고 모자를 건네받아 머리에 쓰기 전까지는.
모자를 쓰는 순간 에미는 알게 되었다.
원래 알고 있었던 것처럼 어떤 이해나 납득의 과정 없이 그냥, 무림의 그 누구도 자신을 해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마스터가 말한 바 ‘이바구’ 권한이란 것이 무얼 말하는 지도 조금 느꼈다.
갑자기 알게 된 것과 느낀 것을 정리하느라 입을 닫고 있자 어느새 조그마한 방울 목걸이를 걸친 쁘니가 마치 흐흐흐 하는 소리처럼 얕게 웃었다.
그 모습이 얄미워 입을 샐쭉하게 내민 에미는 슬쩍 쁘니의 뱃살을 만지는 척하다가 가슴께를 툭 밀었다.
쁘니는 뱃살을 만지는 에미의 손을 내려치기 위해 한 발을 들었다가 밀려서 난간에서 떨어졌다.
이제는 앞발이 모이지도 않을 정도로 살이 찐 주제에 날렵하게 고양이처럼 착지한 쁘니는 크게 외치며 에미에게 달려들었다.
머리를 때리고 뱃살을 꼬집는 둘을 가만히 바라보던 마스터는 살짝 고개를 저으며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문은 쁘니가 열어줄 테고 감투가 네게 길잡이가 되어 줄게다.
무림이란 세상은 흉흉하지만 그만큼 제멋대로에 자유롭지.
그런 곳을 여행해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게다. 적당히 싸우고 느긋하게 다녀오너라.”
한참이나 푸닥거리를 하던 둘은 쁘니의 발톱에 에미의 머리카락이 걸리면서 싸움을 멈췄다.
에미는 발톱을 세우는 건 반칙이야!라고 외치며 엉거주춤 따라붙는 쁘니를 안아 들고 거울 앞으로 가서 발톱에 끼인 머리카락을 빼냈다.
그리고 엉망이 된 머리와 옷을 정리하는 사이 뻘쭘해진 쁘니가 그루밍을 하다가 은근슬쩍 에미의 어깨에 올라섰다.
에미는 다리를 모으고 까치발로 섰다가 바닥에 탁 소리가 나도록 내려섰다. 그러자 아까보다 챙이 넓어지고 살짝 하늘거리는 리본 밀짚모자가 머리에 씌워졌다.
쁘니의 방울 목걸이에도 손을 대자 분홍색 바탕에 흰색 꽃무늬가 점점이 생겨났다. 그 모양새가 마음에 들었는지 쁘니는 골골대며 에미의 어깨에 꾹꾹이를 시전 해주었다.
쁘니의 손길에 잠시 순간을 만끽한 에미는 천천히 걸어서 문 앞에 섰다.
하늘을 붕붕 날아다니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법조차 강제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
그들이 사는 세상의 위험성이 제거된다고 생각하니 신기한 것들을 볼 생각에 가슴이 설렌다.
제멋대로일 정도로 자유로운 곳. 위험하지만 않다면 그 얼마나 볼 것이 많은 곳인가.
어쩌면 무협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런 자유로움을 동경하는 것이 아닐까.
법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 거침없이 행동하고 자신의 감정에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곳.
물론 강해야 한다는 전제가 따르지만 지금의 에미에게는 문제없는 이야기였다.
리본 밀짚모자를 쓴 그녀는 ‘이바구’의 주방장이며 모든 이야기를 들어주는 시청자이고 또한 그들의 이야기를 읽어줄 독자이니까.
문 앞에서 마음을 다잡는 에미의 빠알갛게 달아오른 뺨을 쁘니가 꼬리로 툭툭 쳤다. 쁘니의 꼬리가 닿은 곳이 시원하게 느껴졌다.
그래. 같이 가는 거지. 마스터의 말대로 우리 재미있는 여행을 다녀오자.
냐아앙.
쁘니의 대답과 함께 문이 열렸다.
언제나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것만 같았던 문 안은, 예쁜 리본 밀짚모자를 썼기 때문인지 한적한 산속 길인 것이 보였다.
심지어 그 위쪽에는 ‘무협의 세계에 방문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하는 글씨가 선명하게 보였다.
그 괴리감에 심호흡을 하며 설레는 마음을 다잡던 시간이 허탈하게 느껴졌다.
에미는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으며 슬쩍 이층 마스터의 방을 바라보았다.
이 모든 것은 길잡이가 되어줄 감투의 힘일 터. 혼자 설레고 설레발치는 에미의 모습을 보며 혼자 웃고 있을 마스터가 보이는 것만 같았다.
심부름에는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았다. 마스터도 말하지 않았는가. 느긋하게 여행하라고.
뭔가를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는 것이라고 에미는 생각했다. 문을 너머에서 불어오는 솔바람의 향이 좋다. 쁘니 역시 작게 울면서 코를 벌름거렸다.
좋아. 가자. 에미는 한 손으로 모자를 짚고 힘차게 한 발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