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도산검림의 미식가(8)

- 그대가 도저히 놓을 수 없는 그 단 한 가지

by 블랙스톤

서두르지 않음에도 일이 알아서 풀려갈 때가 있소.

그럴 땐 직감하게 되지. 이 방향이 틀리지 않았구나 하고. 그녀와 함께 한 이후의 내가 그러했소.

우리를 위해 조금 더 여유를 갖고 더 좋은 선택을 찾아보는 것. 선택한 매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것.

사건에 휘둘리지 않으면 시련은 좋은 경험이 되더구려.


무림맹으로 가는 길에 사도련의 인물 몇을 만나게 되었소.

미행하는 기색이기에 가볍게 몸을 놀려 그들을 따돌렸소. 그리곤 다시 맛집을 찾아 나섰지.

미행을 따돌린 이가 다시 돌아와 음식점에 앉아 있는 것을 예상하진 못했는지 한참이나 후에 다시 미행을 하기 시작하더군.

그녀는 이런 모습이 우스웠는지 그들에게 음식을 시켜주기도 했소.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얼굴이 벌게 지긴 했지만 우리가 알 바는 아니니 맛있는 음식을 충분히 음미하고 그들을 따돌리고 다시 길을 나섰소.


하루쯤 지났을까? 숲 안에 사도련의 인물들이 매복하는 것이 느껴졌소.

그녀에게 알리니 위협이 되느냐고 되묻더군.

나는 빙그레 웃으며 답해주었네. 지금 내게 위협이 되는 것은 그녀가 느낄 허기(虛飢)뿐이라고.

그녀는 소리 내어 웃더니 ‘난 당신을 위해 허기를 참을 수 있으니 당신에게 위협이 되는 것은 천하(天下)에 없겠네요?’하고 말하더군.

나도 크게 웃어 보였소. 한마디를 하더라도 참 예쁘게 말할 줄 아는 여인이었지.

어찌 이런 복이 내게 왔을까 새삼 세상이 고마워졌소.


숲 안에는 예전에 보았던 백발의 노인과 그 제자로 추측했던 허여멀건한 놈이 있었소.

노인은 그보다 살짝 떨어지는 경지로 보이는 다른 노인 셋과 함께 서 있었고 허여멀건한 제자는 숲을 포위한 인원을 지휘하는 듯하더군.

그녀에게 상처를 입혔던 백발노인을 다시 만나면 화가 날 줄 알았건만 그렇지 않았소.

그녀를 돌아보니 그녀도 그저 살풋 웃어 보일 뿐 큰 반응을 보이진 않았소이다.

한쪽 소매가 휑한 것이 그때 잘라낸 팔에 의수(義手)는 달지 않은 듯 보였지.

노인은 여전히 검해(劍解)! 검해! 하며 헛소리를 하고 있었는데 거기에 더해서 네놈들이 음모(陰謀)를 꾸몄구나! 네놈들이 원흉(元兇)이구나! 하는 헛소리를 보태서 하고 있었네.

미친 노인네는 어느새 조화경에 한 발을 걸친 상태더군.

미친 상태에서도 계속 무공의 경지를 높여가니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소.


친한 사이도 아닌데 구구절절 뭔 말을 그리 하려 하던지.

지금까지의 사연을 제 입으로 설명하고 앞으로 뭘 할 건지를 설명하려 하더군.

네놈들의 음모에 빠져 고생했으니 우리도 복수를 준비했다나? 마지막 승부 때에 다 뒤집어 주겠다더군.

확실히 그녀의 말대로 흑막(黑幕)이 있긴 한 것 같았지만 아무렴 어떠랴.

막은 길을 트고 다음 마을에 가서 그녀에게 맛있는 음식을 먹게 해줘야 한다는 사명감에 내 가슴은 불타올랐소.

사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행복해하는 그녀의 귀여운 모습을 보고 싶다는 게 진실한 내 마음이긴 했소.


오른손을 들어 손날로 가볍게 내리그었소.

내 의지에 따라 내기(內氣)는 손잡이가 되고 외기(外氣)는 도신(刀身)이 되어 그들과 부딪혔소.

굳이 그들을 베고 싶지 않았기에 그들이 이룬 공(功)을 흔들고 무너트렸소.

그들이 저항하기 위해 운용하는 기가 외부로 발산될 때마다 내 의지에 따라 다시 그들의 내부로 돌아가 흔드는 무게추가 되었소.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넘어트리는 격이었기에 나는 큰 힘을 들일 필요도 없었지.

그들의 저항을 물리치고 그녀의 손을 잡고 떠나려는데 미친 늙은이가 말하더군.


이건 검해가 아니야. 검해 따위가 아니야! 뭐지? 뭐야. 내 건데, 내 내공인데. 왜 내 마음대로 안되는 거야? 왜 그래? 왜 그런 건데? 알고 싶다, 나도 알고 싶다! 알려줘!


달려드는 노인의 내공을 더욱 흔들어 가볍게 제압했네. 그리고 노인을 바라보았지.

나와는 방향은 다르지만 순수하게 미쳐있더군.

무(武)에 미쳐 있는 것이 무서운 것일까 혹은 미친 대상이 무(武)이기에 무서운 것일까.

그것은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이제는 그게 무섭다거나 섬뜩하지 않았네. 그저 애처롭고 안타까워 보였네.

그래, 불쌍해 보였소. 그런 모습을 보고 나니 더욱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져버렸소.

저 치에게는 혼몽(昏懜)과 미몽(迷夢) 속에서 언제까지나 내가 보여준 것을 갈구(渴求)하는 것이 가장 큰 벌인 것 같다고 생각했소.

죽음은 저 미몽에서 노인을 꺼내는 일이라, 굳이 살생을 하고 싶지 않아 진 내 마음과 같은 결론이기도 했고.

내공이 흔들려 잘 움직이지도 못하는 노인이 바닥을 기며 내게 다가오든 말든 나는 그녀와 함께 무림맹을 향해 계속 걸었소.


무림맹은 여전히 많은 사람이 거주했고 또 정신없이 바빴소.

맹주는 딸이 살아서 돌아왔다는 소식에 모든 일을 제쳐두고 뛰어나왔지.

나를 보는 눈길은 그리 곱지 않았지만 어쩔 수 있나.

허락도 받지 않고 딸부터 데려간 도둑놈이 사위랍시고 인사를 왔는데 좋게 봐줄 장인이 어디 있겠소.

반가운 마음에 맞잡은 그녀의 손을 한참이나 놓지 못하다가 맹주가 떠나갔소.

업무 중이니 저녁 이후에 보자고 하더구려. 그녀도 오래간만에 만난 아버지가 반가운지 살짝 눈물을 글썽이더군.

숙소를 배정받고 잠시 쉬며 그녀는 내게 말했소.

사도련조차 우리가 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아버지는 아무것도 몰랐던 것처럼 말한다고.

그녀가 뭔가를 신경 쓰며 고민할 때는 미간에 주름이 잡히곤 했소. 나는 그녀의 미간을 슬쩍 문질러 펴주면서 말했소.


세상 모든 일에는 사정이 있으니 아버님에게도 이유가 있겠거니 합시다.

나를 잠시 쳐다보던 그녀는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더군.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 사이가 좋았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굳이 선택을 해야 한다면 난 내 곁에 당신을 택할 거예요.

당신이 나를 좋아하는 만큼 나도 당신을 좋아해요.

그러니까 나를 위해서 당신이 싫어하는 것들을 선택할 필요는 없어요.

당신이 괴로워하는 것을 보는 건 내게도 괴로운 일이니까.”


나는 말없이 그녀의 손을 꼭 잡아주고 살짝 안아서 토닥여주었소.

그리고 생각했소. 사랑이란 것이 참 사람을 애닳게 한다고.

둘만 생각할 때는 어떤 걱정도 없던 우리였소.

무림맹에 다녀가는 이 짧은 외유(外遊) 동안 도대체 그녀에게는 얼마나 많은 번민(煩悶)이 찾아오는 건지.


나는 주변을 둘러보지 못하는 사람이라 결정을 하고 나면 그대로 밀고 나가는 경향이 강하오.

하여 그녀라는 축복을 선택하면서 모든 것에서 눈을 돌려 그녀만을 바라보았소.

그녀는 주변을 모두 아우르는 사람이오.

남은 시간을 나와 공유하는 것을 선택한 그녀는 내게 자신이 보고 있는 것들을 보여주기 위해 애썼소.

내가 그녀를 따라 주변을 돌아보며 나누는 대화들은 우리를 행복하게 했소.

서로를 닮아가는 모습으로 정말 ‘우리’가 되어 가고 있다는 걸 느끼게 했으니까.

그랬기에 지금의 내가 그녀의 주변을 돌아보고 실망할까 봐서 겁이 나는 거요.

나를 사랑하기에 불안하고 안타까워지고 쓸쓸해지는 거요.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지.


“나는 당신을 통해 세상을 돌아보오. 그리고 당신을 통해 맛을 느끼지. 또 당신을 통해 무를 이루었소.

결국 당신이 나를 온전하게 만드오. 내게 단 하나는 오직 당신뿐이오.”


내 토닥임에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여전히 무언가를 망설이고 있었소.

나는 재촉하지 않았지. 무언지 알 것도 같았지만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소.

꼭 필요한 일이라면 그녀가 내게 말해줄 것이고 이 정도로 망설이는 것이라면 내가 기분 상할 그 무언가일 것이라서 굳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소.

지난 내 삶을 지탱했던 도(刀)를 그녀의 검(劍)과 함께 버렸을 때 나는 지난 삶도 함께 놓았소.

그녀만 바라보기로 했기에 다른 것은 돌아볼 의미가 없었소. 그걸 알아봐 주길 바라며 그녀의 손을 꼭 잡았소.

내게 미소를 보이는 그녀의 입가가 살짝 떨렸다오. 나는 그게 조금 슬펐소.


약간 늦은 저녁은 가족과의 재회가 있었소. 맹주는 딸의 근황을 궁금해했고 어머니는 나란 사람을 궁금해했소.

가문을 이끌어나갈 후계자인 남동생은 의젓하게 앉아서 나의 성취를 확인하고자 했으며 조금 더 어린 동생들은 자신들이 배운 것을 나도 알고 있는지를 궁금해하더구려.

무림의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았소.

아팠다는 그녀의 말에 가족은 걱정했으며 그로 인해 나와 긴 요양을 했다는 이야기에는 내게 감사와 위로의 말을 해주었소.

그 과정에서 둘만의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다는 말에 맹주는 분노했고 어머니는 이해해 주었으며 동생들은 궁금해했소.

무림맹주라는 직책을 빼고 나면 평범한 가족이었지.

아버지가 가진 사회적 직책이 높은 덕에 아이들의 교육에 관심이 많은 평범한 가정.

식사가 끝나고 가벼운 술자리가 이어졌다네.

그녀는 술을 마시지 않았소이다. 그리고 말했소.

이제 우리는 셋이 될 것이며 아버지와 어머니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될 것이라고.

크게 놀랐던 가족은 모두 기뻐하였소. 그녀는 안도하며 내 손을 잡았소.

그 손에는 살짝 땀이 어려 있었기에 나도 그녀의 손을 꼭 잡아주었소.


마지막 승부를 내는 날까지 무림맹에 머물렀소.

그녀는 가족과 지속적으로 만나며 과거에 못다 한 이야기를 했고 나는 그런 그녀를 기다리다가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함께 움직였소.

가끔 다가온 맹주는 자식들에게 가장 큰 집을 물려줄 계획이라고 말하곤 했소.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는 맹주가 그런 이야기를 할 때마다 불안해했소.

그녀가 불안해하기에 나는 그녀에게 아버지가 걱정된다면 걱정 말라고 하였소.

아버지의 계획이 어떤지 모르나 내가 돕는다면 큰 문제는 없을 거라고. 그녀는 망설이다 웃었소.

그리고 말했지. 언제나 당신은 내 편이니까 나도 언제나 당신의 곁에 있을 거예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언제나 내편이 되어준다니 얼마나 기쁜 일이오. 나는 한참이나 웃었소.


마지막 승부는 무림대회(武林大會)로 치러졌소.

너른 벌판에 무림맹과 사도련이 만든 행사장으로 많은 사람들이 구경하기 위해 찾아왔고 그들은 저마다의 승리를 점치고 있었소.

조화경의 고수들이 맞부딪힐 예정이기에 무대 없이 넓은 공터에서 싸움이 이루어졌소.

각기 다섯의 고수를 냈는데 무림맹은 알려진 세 명의 조화경 고수와 새로운 조화경 고수 하나 그리고 거의 근접한 고수 하나를 냈소.

사도련에서는 알려진 두 명의 조화경 고수와 새로운 조화경 고수가 둘이나 튀어나왔소.

결국 경지로는 결과를 예상하여 우위를 가릴 수가 없었지.


첫 번째, 두 번째 승부의 승리는 사도련에서 가져갔소. 세 번째, 네 번째 승부의 승리는 무림맹에서 가져갔지.

특히 세 번째 승부는 압권이었소. 무림맹 측에서 알려지지 않았던 조화경의 고수가 나섰는데 그는 무림맹주의 수족으로 알려진 이였소.

처음 내가 밝혀냈던 정파의 원수, 바로 그였소.

애초에 절정의 무인이라 알려졌던 그는 완숙한 조화경의 무위를 뽐내며 상대를 압도했소.

네 번째로 나설 무림맹주의 의제에 못지않은 무위였지. 그 승부를 보는 모든 이들은 알게 되었소.

무림맹에 네 명의 조화경 무인이 있는데 그중 셋이 맹주 본인과 그 주변인이라는 것을.

심지어 그들은 먼저 나선 조화경 무인보다 수준이 높아 보였소.

이로써 무림맹이 이 승부를 이기게 되면 맹주는 무림맹의 강함을 만방에 떨치고, 그 무림맹에서 가장 강한 세력을 이끄는 것이 자신임을 크게 알리는 셈이었소.


마지막 승부는 다음날로 넘어갔소.

무림맹주와 사도련주는 자신의 무위에 자신이 있는 건지 서로 승리를 장담했소.

그녀가 뭔가를 고민하는 듯하기에 내가 슬쩍 물었소. 누가 이길지 알고 싶느냐고.

그녀는 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태연한 당신 모습을 보니 아버지가 이기겠네요. 하고 말하더군.

나는 그저 웃고 말았소. 그녀의 말이 옳았으니까.


다음날 구경꾼들은 더 많아졌소.

하루 만에 무슨 소문이 돌았는지 무림의 지배자를 선출하는 날이라는 말까지 떠돌았소.

새롭게 퍼진 종교는 훗날 다가올 초인(超人)을 기다린다는 교리(敎理)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초인이 오늘 뽑힌다는 말도 하더군.

누가 뽑히든 무림에 드디어 평화가 올 거라는 믿음이 팽배했소. 싸움 한 번으로 결정 나는 무림의 지배자라니.

무림인으로서 그것을 직접 볼 수 있는 기회를 어찌 쉬이 넘길 수 있겠소.

뒤늦게라도 달려오는 이들을 이해할 수 있었지.


결전(決戰)은 바로 시작하지 않았소.

사도련주는 천천히 무대 중앙으로 나가며 발언을 하려 했고 그런 그를 아무도 말리지 않았소.

그가 무슨 말을 할지 모두가 궁금했으니까.

그는 이십 년도 훨씬 넘은 장보도 사건을 꺼냈소.

그 당시에 장보도의 존재를 알린 익명의 편지가 있었다는 내용이었소.

그리고 여러 곳에 뿌려진 그 편지에는 각 문파가 혹할만한 실전 무학 혹은 검해라고 불리는 신묘한 검법의 묘리(妙理)가 있었다고 말하더군.

그 묘리가 얼마나 대단한지 겨우 네 줄의 검해를 가지고 세 번째 대련을 했던 고수가 조화경의 실마리를 잡았다는 말도 하더군.

그러면서 그 ‘검해’의 첫 줄을 읊어주었네.

내공이 실려 저 끝의 사람들에게까지 모두 들린 검해에 모두 조용해졌네.

무림인들이 조용해지자 구경꾼들이 떠들어대기 시작했지.

그리고 그 틈을 타서 어떤 사람들이 관객들에게 무언가 종이를 나눠주기 시작했다오. 사도련주는 그들에게 주의가 돌아가기 전에 다시 입을 열었네.


어떠한 원한으로 혹은 이유로 장보도를 소지했던 가문이 멸문해야 했는지는 알 수 없다고 했네.

그저 사도련의 입장에서는 그 편지들에 적혀있던 ‘검해’가 더욱 중요했을 뿐이니.

그들은 사파에 뿌려진 편지를 입수하고 정파에 뿌려진 편지를 도둑질하거나 빼돌렸다고 하였소이다. 일부는 거래로 얻기도 하고.

총 열 두줄의 검해를 통해 새로운 조화경의 무인을 둘이나 탄생시킬 수 있었다고 했소.

그 말을 들으니 미친 노인의 검해 타령과 계속 발전하는 무위에 대해서 납득할 수 있었소.

그리고 사도련주가 달리 보이더군. 그러한 비전을 수하에게 아낌없이 풀었다는 뜻이 아닌가.


사도련주는 말했네. 우리가 편지를 통해 얻은 ‘검해’는 열두 줄이지만 실상은 더 많을 것으로 예상한다고. 그 ‘검해’를 쥐고 있는 자가 아마 흑막일 것이라고.

사도련주는 무림맹주에게 물었소.

원흉이 누구인지 알겠느냐고. 무림맹주는 허허로운 목소리로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고 하더군.

그의 군자신검(君子神劍)이라는 별호에 어울리는 고고한 태도였소.

하지만 굳이 묻는 사도련주의 태도와 조화경에 이를 수 있는 ‘검해’를 쥔 흑막과 새롭게 조화경에 이른 자가 맹주의 수족이라 불리는 이라는 것이 사람들의 작은 의문을 품게 했지.

허허롭게 웃기만 하던 맹주는 주위가 잠시 조용해지자 말했네.


“흑막에 떠밀려 정사대전을 일으켰다는 변명은 이제 끝이 났소?

심지어 그 흑막은 이십 년 전에 있었다는 것 아니오.

그렇다면 이십 년 전부터 그 흑막은 정사대전을 기획하고 련주가 맹을 공격하도록 유도하고 있었다는 뜻이겠소?

조화경의 고수를 마음대로 유도할 수 있는 사람이라니. 말만 들어도 대단하오.

하지만 지금은 결전의 순간이니 이 쪽에 더 집중해주지 않으시겠소?”


사도련주와 무림맹주의 싸움은 치열했네. 아니, 겉보기에는 치열했지만 무림맹주가 분명히 두 수는 위였소.

그는 자신의 기품을 지키며 여유롭게 사도련주를 상대하고 있었지.

사도련주는 기선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거듭 공격하고 있었다오.

그 공격이 한 호흡이라도 느려지면 바로 반격을 받을 상황이었지.

뭔가를 결심한 듯 강력한 공격을 뿌린 사도련주는 훌쩍 물러선 후 방어를 하기 시작했네.

모든 공격을 포기하고 방어에만 집중하는 그의 모습에서 애초에 패배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느낌이 강하게 느껴졌소.

맹주는 급하지 않게 자신을 유지하며 유려(流麗)하고도 현묘(玄妙)한 검을 휘둘렀소.

아슬아슬하긴 했지만 마음먹고 방어를 굳힌 사도련주는 그 현기(玄機) 넘치는 검을 잘도 막아냈소.

그러면서도 뭔가 틈을 보고 반격을 할 듯한 모습을 취하거나 진짜 한 번씩 찔러 넣어 흐름을 느리게 만들었네.

한 번씩 숨을 돌려가며 방어를 굳히고 있으니 결국 맹주가 사도련주를 무릎 꿇리는 것은 시간이 필요한 상황이 되었소.


그 사이 종이를 뿌리던 사내들이 우리 곁에도 다가왔소. 슬쩍 내미는 종이를 받아보고 나는 얼굴을 굳혔소.

종이에는 여불위의 장보도와 열두 줄의 검해, 그리고 사도련에서 알아낸 흑막의 정체와 그를 유추해 낸 과정이 적혀 있었소.

의혹. 그래. 의혹일 뿐이었지. 그 당시의 정황과 이후의 흐름, 그리고 검해가 어디로 갔는지에 대한 의문.


맹주의 별호 군자신검은 유려하고 단단한 검이 굽힘이 없는 군자와 같다고 해서 붙여졌소.

그의 검은 끊임없이 흐르되 상대의 공격을 부드럽게 받아넘기거나 되돌려주는, 부드럽고 도도한 것이 특징인 검이오.

하지만 지금 결전을 벌이고 있는 맹주의 검은 처음의 유려함을 찾을 수가 없었소.

시간이 지나도 사도련주의 방어가 흔들리지 않자 맹주의 검은 매우 빠르고 격정적이며 일검일검이 치명적인 형태로 바뀌었소.

아마도 주변의 웅성거리는 소리를 들었거나 혹은 뭔가를 느낀 것이겠지.

사도련주가 심었던 작은 의심이 씨앗이 되어 발아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얼굴을 굳힌 상태로 잠시 눈을 감았소.

종이에는 장보도를 계획하여 사파에 정파에 균열을 일으킨 것은 맹주의 수족이며 갑자기 퍼져나간 종교는 맹주의 의제가 힘을 썼다는 내용이 있었소.

과연 오늘을 지나고 나면 누가 초인이라 불리게 될 것인가? 하는 의문으로 종이의 문장은 끝이 났소.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에는 그 글이 끝나지 않았지.

사도련주가 버틸수록 무림맹주의 검세는 더 강해지고 흉포해졌으며 변화(變化)를 예상할 수 없는 기괴(奇怪)한 변초가 마구 튀어나왔소.

눈을 어지럽히는 그 변초보다도 마음을 어지럽히는 종이의 음모론(陰謀論)이 나를 어지럽게 하더군.

그때 조심스레 내 손을 잡는 그녀의 온기가 느껴졌네.

그 따뜻함이 어지러운 마음과 어지러운 눈을 살며시 덮어주는 것만 같았다네.


그래. 이 따뜻함을 위해 나는 도를 떠나보냈네. 무림을 떠나보냈지. 어지러울 하등의 이유가 없었소이다.

나는 눈을 떠서 그녀를 바라보았소. 그녀는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소.

비를 맞고 축 쳐진 듯한 모습으로, 처마 밑에서 언제쯤 비가 그치려나 하고 불안해하며 기다리는 듯한 눈빛으로 내 눈치를 보고 있더군.

얼른 그녀의 손을 꽉 잡아주었네.

그 불안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남지 않도록 굳건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살짝 안아주었네.

잠깐 사이 얼마나 불안했던지 그녀의 몸은 살짝 떨리고 있었고 땀도 슬쩍 배어 나오는 듯했네.

그녀의 등을 몇 번 쓸어주고 그녀를 마주 보며 웃었네.

이제 내겐 그녀뿐이라. 그녀만이 내 세상이며, 내게는 이 뿐이라. 그녀에게는 애닳게 하는 사랑은 한 점도 보이고 싶지 않았다네.

한 점의 망설임 없는 내 눈을 보고서야 그녀도 웃어주었네.


그녀를 다독이는 사이 맹주의 검은 마치 맹수가 으르렁거리는 듯한 소리를 내며 사도련주의 방어를 여러 방위로 후려쳤네.

한참이나 맞던 사도련주가 견디지 못하고 물러서자 쫓아가는 맹주의 검격은 결국 사도련주를 깊게 베었소이다.

그렇게 맹주의 승리를 선언하려는 순간 검해를 외치던 백발노인이 어느새 맹주의 등에 기습을 했소.

맹주는 어렵지 않게 피했지만 노인은 정말 미친 사람처럼 눈을 까뒤집고는 마구잡이로 공격을 이어나갔소이다.

마치 생명을 태워내는 듯이 동귀어진(同歸於盡)을 노리고 달려드는 데다가 기습을 당한 터라 맹주로서도 뒤로 계속 물러날 수밖에 없었소. 노인은 공격을 가하며 계속 외쳤소.


검해! 검해! 검해! 검해 때문에 내 아들이 죽었다! 내 아들이 검해를 구하러 가서 죽었어!

검해만 내게 남기고 아들이 죽었어! 검해를 내놔라! 검해를 내놔! 아니면 내 아들을 내놔!


피를 토하는 듯한 그 처절한 외침에 모두가 잠시 멈칫했소.

그 사이 사도련의 조화경 고수들이 일제히 맹주를 공격했소.

맹주가 위태해지자 무림맹의 조화경 고수들이 나섰고 곧 사도련과 무림맹의 무사들이, 그리고 서로의 편을 들며 싸우던 구경꾼 무사들이 서로 뒤엉켜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소.


도를 휘두르고 검을 찔러대는 그야말로 도산검림(刀山劍林).

죽음이 죽음을 부르고 죽음을 쌓는 그야말로 비정무림(非情武林).

경지에 든 이후 심신(心身)이 안정되어 크게 동요(動搖) 하지 않던 내가 짧은 시간에 두 번이나 동요하게 만드는 참상(慘狀).

잠시 이 난장판을 바라보던 나는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정신을 차렸소.

그녀의 손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소.

그녀는 하얗게 질려서 나와 마주 잡지 않은 손으로 입을 막고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소.

미간은 한없이 찌푸려져 온갖 번민에 괴로워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소.

나는 손을 들어 그녀의 미간을 문질러 주었다오. 그리고 말했지.


“걱정하지 마오. 신경 쓰지 마오. 그대에게 괴로운 것들은 내가 다 치워줄 테니. 내게는 그대의 허기만이 두려울 뿐이라오.”


내 농담에 그녀가 살짝 인상을 풀었네.

그것에 만족할 수는 없기에 나는 잠시 그녀의 손을 놓고 마치 도를 쥔 것처럼 허공을 쥐고 기수식을 취했네.

내기는 자루가 되고 외기는 도신이 되어 자연의 기를 칼날 삼아 자연스럽지 않은 모든 기를 향해 휘둘렀소.

일격에 전장(戰場)의 대부분이 무릎을 꿇었소.

다시 기수식을 취해 머리 위로 보이지 않는 칼을 들어 올렸소.

다시 휘두르자 조화경의 고수들만이 꿋꿋하게 버티고 서 있었소.

다시 기수식을 취해 머리 위로 보이지 않는 칼을 들어 올렸소.

내기와 외기를 반대로 회전시키고 자연의 기를 감응시켜 그 날을 날카롭게 벼른 후 다시 자연스럽지 않은 기를 향해 내리쳤소.

이제 이 땅 위에 나와 그녀를 제외한 무림인은 아무도 서 있지 못하고 모두 바닥에 주저앉았소.


어느새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던 백발노인이 그륵거리며 피를 토하면서도 웃어대기 시작했소.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도 그 광소(狂笑)는 쩌렁쩌렁 울리더구려.


내가 말했잖아! 검해 따위! 내 것을 박탈(剝奪)하는 놈이 더 무서워! 다 뺏어간다! 모두 다 뺏어가! 내 아들도 가져갔잖아. 아파.


광소와 함께 노인의 외침이 잦아들었소. 그의 목소리가 잦아들고 나서야 모두가 정신을 차렸지.

쭈뼛쭈뼛 종교의 대표가 나섰네. 무림맹과 사도련의 결전은 맹의 승리요! 하고 외치고는 맹주의 앞에 무릎을 꿇어 보였네.

그의 우러름에 맹주는 어정쩡한 자세로 일어났다가 이내 허리를 펴고 주변을 둘러보았소이다.

나와 눈이 마주치기에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그녀의 손을 잡고 천천히 걸었소.

그녀는 잠시 나를 멈추더니 몸을 돌려 아버지에게 깊게 인사를 하더군.

그리고 내 손을 붙잡고 배시시 웃어 주었네. 우리는 함께 걷기 시작했지.


그 많은 사람들이 있음에도 우리가 걷는 발소리가 들렸소.

그 와중에 종교 대표가 맹주의 앞에 무릎을 꿇은 상태로 외치더군.


“후일 도래(到來)할 초인이 지금 여기 강림(降臨)하셨도다!

사도련과의 대전(大戰)을 승리로 이끄시고 큰 피해 없이 평화로의 길을 여신 이 분이 초인이 아니면 그 누가 초인이시겠는가! 저희의 절을 받으소서!”


맹주가 그를 말리는 소리가 들려왔소.

그리고 사도련주가 사람들에게 뿌린 의심의 씨앗이 지금 뿌리를 내리고 그 위로 줄기가 솟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졌소.

주변은 웅성거리는 소리 하나 없이 조용해 종교 대표와 맹주의 대화만 들렸소.

그리고 그 침묵 사이로는 의심의 시선들이 흐르고 있었지.

사도련주는 맹주의 마지막 일격에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웃고 있었소.

마지막 승부 전, 패배를 직감한 그의 수는 완벽하게 들어맞았소.

맹주는 온전히 이겼으면서도 온전하게 이기지 못하게 되었소.


강호무림(江湖武林)에 다시 나와서 그녀가 가졌던 번민은 사자권의 의제들이 주었던 종이뭉치에서 시작되었소.

아마도 그 종이에는 무림맹에서 암약(暗躍)하는 이들이 맹주의 심복이라는 내용이 있었겠지.

그로 인해 맹주가 흑막이 아닌가 의심이 되었을 테고.

그녀의 고민이 느껴졌기에 나는 잡은 손에 힘을 주었소.

그런 고민 따위가 나와 그녀를 갈라놓을 수는 없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소.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그녀가 아버지를 미워하게 두고 싶지도 않았기에 가볍게 돌아서서 일상(日常)으로 돌아왔소.

그리고 나는 그녀를 절대로 놓치지 않기 위해서 신묘한 단어를 말했소.


부인. 오늘 저녁은 어떤 미식(美食)을 즐겨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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