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도산검림의 미식가(7)

- 그대가 도저히 놓을 수 없는 그 단 한 가지

by 블랙스톤

강물에 몸을 맡기고 어느 정도 떠내려 온 후, 그녀의 상태를 확인했소.

나와 싸운 백발노인의 장력은 나와 비슷한 내가중수법(內家重手法)이었소.

나는 기를 침투시켜 충돌시킨다면 그는 기를 침투시켜 안에서부터 긁어낸다는 것이 다를 뿐 상대를 안에서부터 붕괴(崩壞)시킨다는 점은 같았소.

하여 그녀를 안고 강물에 떨어졌을 때부터 내기를 순환시켜 그녀의 몸을 보호하려 했소.

어느 정도는 성공했으나 완전히 막아낼 수는 없었소이다. 그녀의 내부는 불안정해졌소.

강물을 타고 이동하며 노인의 기를 어느 정도 해소한 후 의원(醫院)을 찾아 나섰소.

어찌어찌 찾아낸 의원에서 그녀는 나흘이나 일어나지 못했소.

나는 그녀의 곁에 앉아 매일 그녀의 내부를 살피고 후회하고 후회했소.

온갖 상념(想念) 속에서 그녀에게 기를 불어넣고 그녀의 기가 흐트러지지 않고 약해지지 않도록 도왔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었소.


나흘 후 그녀가 깨어났을 때 나는 부끄럽게도 눈물을 보이고 말았소.

그녀는 그 쇠약해진 몸으로도 웃으며 나를 달래려 하더군. 자신은 괜찮다면서. 나는 그저 펑펑 울었소.

그 순간에는 그 어떤 것도 원인과 이유가 될 수 없었소. 그저 나는 울 수 밖에는 없었소.

하다못해 그녀의 야윈 몸짓에 흐트러지는 옷의 주름마저도 슬퍼서 견딜 수가 없었으니까.

그녀는 그저 희미하게 웃으며 나를 다독여주었소.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느껴지는 공기의 흐름마저도 쇠약해진 것만 같아서, 그것들이 모두 내 탓인 것만 같아서 나는 도저히 후회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소.

자책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소. 그녀는 오히려 내게 말해주었소. 괜찮아요. 나는 괜찮아요.


의원(醫員)은 불안정해진 그녀의 기를 최대한 보충하는 약을 써 주었으나 얼마나 효험이 있을지는 미지수라고 했소.

처방문을 받고 몇 번이나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소. 그리고 뛰어난 의원을 찾아 그녀와 함께 길을 나섰지.

그녀는 걷기도 힘들어했기에 대부분의 시간을 내게 안겨서 이동했소이다.

우습게도 그녀가 아프고 나서야 우리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붙어있을 수 있었소.

자는 순간에도 나는 그녀에게서 손을 떼지 않았소. 그녀에게 기를 불어넣어 피곤하지 않도록 도왔소.

그녀는 내게 안겨 아프다는 핑계로 마음껏 기댈 수 있어서 좋다고 했다오.

나는 또 한참이나 눈물을 흘리고 말았소.


두 번째로 만난 의원 역시 그녀의 병은 기가 불안정해져서 그런 것이라 기를 보완(補完)하고 보충(補充)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했소.

그리고 그의 진단을 통해 노인의 기가 상대의 뼈와 기에 달라붙어 기생(寄生)하며 안에서부터 상대를 부식(腐蝕)시키는 종류의 것임을 알았소.

뭔가에 집착하고 갈구하는 기라니. 딱 그 노인네 같은 기였소.

그랬기에 나는 그녀에게 무림맹으로 복귀할 것을 권했소.

그녀의 아버지인 맹주를 만나 영약을 얻어 치료해 보자는 계획이었소.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소.

첫 번째 의원과 두 번째 의원의 진단은 같았소. 기가 불안정해졌다.

그녀의 그릇이 깨져 기가 새어나가며 변질되고 있기에 그녀의 기가 불안정해졌다는 것이었소.


그녀는 깨진 그릇을 고치는 것은 환골탈태(換骨奪胎)의 영역이며 그것은 영약만으로 도달할 수 없는 곳이니 애쓰지 말자고 했소.

그리고 그저 기를 보(補)하는 것에만 신경 쓰자고 했소.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녀는 웃으며 무림맹으로 돌아가봐야 신경 쓸 일만 잔뜩 하니 우리가 나중에 함께 하려 했던 것을 하자고 하였소.

맛있는 음식을 찾아 여행하는 것. 그래. 미식여행(美食旅行).

그것은 나중에도 할 수 있으니 지금은 무림맹으로 돌아가 맹주의 힘을 빌려 치료하는 것이 우선이라 말했고 여전히 그녀는 고개를 저었소.

확실하지 않은 일에 매달리기보다는 확실한 행복이 보장되는 것을 하고 싶다고.

돌아간다면 치료를 위해서라도 우리는 떨어져 있어야 하는데 그건 싫다고.

언제 치료될지도 모르고 혹여 치료를 할 수 없을지도 모르기에 나와 함께 있고 싶다더군.

무림의 정과 사가 지금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겠냐며, 그깟 무림, 사도련이 정복하더라도 인생은 이어지고 세상은 굴러갈 거라고.

지금은 자신만 생각하고 싶다고 말하구려. 그리고 처연히 웃는 그녀를 바라보며 나는 차마 고개를 저을 수가 없었소. 그저 다시 눈물만 흘리고 말았지.


나의 도(刀)와 그녀의 검(劍)을 두 번째 의원에게 맡겼소. 그리고 사람을 통하든 어떻게 하든 무림맹으로 전해주길 부탁했소.

강에서 떠내려온 시체를 발견했는데 그 무기를 수습(收拾)하여 돌려주는 것이라고.

의원은 몇 번이나 거절했지만 우리의 간곡한 부탁을 뿌리치지는 못했소.

무림맹주의 딸과 사위의 유해를 수습하여 얻을 수 있는 부(富)로 가난한 이에게 더 큰 의료를 베풀 수 있을 거라는 그녀의 설득이 주효했소이다.

무기를 버린 우리는 길을 떠났소. 돈이 모자랄 일은 없었소.

평생을 고급 낭인으로 돈을 벌어온 내게 그간 무공서를 모으는데 쓰고 남은 돈만으로도 여행경비는 충분했소.

그녀는 여전히 내게 안기거나 업히거나 기대어 걸었소.

그녀가 힘든 기색을 보이면 잠시 앉아서 숨을 돌렸소이다.

그렇게 숨을 돌릴 때면 항상 그녀의 손짓을 따라 주변을 둘러보았소.

한 가지 목표에 집중해 살아온 나는 주변을 돌아볼 줄 몰랐지만 그녀는 주변을 돌아볼 줄 아는 이였소.


그녀의 손짓을 따라 바라본 풀숲 사이의 작은 들꽃은 그 뿌리가 단단하고 길었소.

유난히 목만 긴 들꽃은 제 꽃잎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휘청이고 있었소.

어딘가 하나씩 모자란 것만 같은 그 모습을 보여주며 그녀가 말했소.

모든 것은 하나씩 특출(特出)난 것들을 가진다고.

뿌리가 단단하고 긴 들꽃은 몇 번이나 밟혀도 뿌리를 통해 영양을 공급받고 다시 일어날 수 있으며,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목이 긴 들꽃은 유연한 목으로 흔들리며 꽃씨를 멀리 띄워 보낼 수 있게 되었다고.

그녀는 세상을 특출 나게 바라보았고 나는 그것을 신기(神奇)하게 받아들였소.

신기한 것은 흥미(興味)와 재미를 주기 마련이어서 나는 그녀와 함께 앉아 쉬는 시간을 기대하며 길을 걸었소이다.


길의 끝에는 항상 맛있는 음식을 파는 식당이 있었소.

그녀는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면 흐물흐물 녹아들어 가는 듯한 표정을 보이곤 했소.

그리고 차근차근 내게 맛을 설명해 주었소이다.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가 싶었는데 자꾸 듣다 보니 무엇을 말하는지 알 것만 같았소.

그녀는 맛에도 이치(理致)가 있고 상성(相性)이 있으며 추구하는 진리(眞理)가 있다고 했소이다.

각각의 맛이 가진 위치(位置)와 역할(役割)이 있고 그들이 조화(調和)를 이루어야 비로소 맛이 된다고 하더구려.

무공은 내가 더 높더라도 맛이나 세상을 사는 것은 그녀가 훨씬 고수더구려.

나는 그녀와 밥을 먹는 시간도 기대하게 되었소.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방에 누우면 그녀는 내게 살짝 머리를 기댄 상태로 오늘의 좋았던 일들을 천천히 회상하곤 했소.

그렇게 기분 좋았던 일과 신기했던 것들을 말하고 행복한 마음으로 잠이 드는 날들이 많아졌소.

그녀의 따뜻한 온기와 조금씩 잦아드는 말소리와 일정해지는 숨소리가 나를 안아주었소.

그 온기와 그 기분이 나를 행복하게 하더구려. 하루의 좋았던 일을 듣는 그 시간이 매일 기다려졌소.

행복해하고 신나 하는 그녀의 모습이 나까지 들뜨게 하였소.

그리하여 행복한 꿈을 꾸고 즐거운 내일을 기대하게 했소이다.


그녀와의 나날들은 나를 채워주었소.

그녀는 내게 고맙다고 했지만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나’라는 사람의 빈틈이 채워지는 것만 같았소.

나도 그녀에게 고마움을 표했지.


내 곁에서 재잘거리던 그녀는 어느 날 자신만 말하는 것은 재미가 없다며 내가 잘하는 것을 들어보고 싶다고 했소.

그러고는 내게 자신이 익힌 모든 무공의 구결과 그것을 익히며 가졌던 느낌을 이야기했소.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궁리(窮理)하여 최대한 쉽게 풀어서 이야기를 해주었소.

그녀가 웃으며 무공을 배우는 것이 이리 쉬웠다면 진작에 고수가 되었을 거라 하더군.

이해하기 쉽도록 최대한 풀어서 이야기하는 것은 내게도 많은 도움이 되었소.

몸으로는 당연하게 행하던 것을 설명하려 하자 이유를 댈 수 없는 것이 많았소.

왜 그래야 하는 것인지, 어떻게 그렇게 된 것인지를 살펴보는 것은 그녀가 세상을 보며 이해하는 것과 비슷하더구려.

직선적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나와는 달리 유연하게 바라보고 상황에 따라 흐르기도 하는 그녀의 관점이 무공을 해석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소.

그녀는 항상 내게 도움만을 주더군.


우리가 주유(周遊)하는 동안 천하는 여전히 어지러웠소.

딸을 잃은 무림맹주는 분노하였고 사도련주는 둘을 공멸(共滅)시키려는 음모(陰謀)가 있다며 목소리를 높였소.

여전히 둘은 충돌했고 조금씩 정파가 기세를 잡아가는 와중에 지친 민심을 달래는 종교가 등장했소.

이 종교는 지친 민심을 등에 업고는 무섭게 세를 불리더니 싸우느라 비어버린 정파와 사파의 본거지까지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소.

대적(大敵)과 싸우는 중에 새로운 적을 만들까 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각 지역의 민심을 휘어잡은 종교에서 중재안을 내놓았소.

앞으로 일 년 후 정과 사의 고수 몇을 뽑아 우열을 가리고 그로 인한 승자와 패자로 전쟁을 끝내자는 것이었소.

중재자의 신뢰성은 의문이었지만 언제까지고 싸움을 지속할 수는 없었기에 둘은 그 안을 받아들이고 숨 고르기에 들어갔소.

다만 커다란 충돌만 멈춘 것이지 국지적(局地的)인 전투는 계속 이어졌고 승부를 낼 장소를 정하기 위한 논의로 몇 번이나 충돌하기도 했소.

그리고 마지막 승부를 위한 전투가 있기 반년 전에 그녀는 배를 쓰다듬으며 내게 말했소. 아버지를 보고 싶다고.


그녀가 더 쇠약해지거나 한 것은 아니었소.

분명히 그녀의 그릇은 여전히 금이 가고 깨진 상태였지만 더 나빠지지는 않았소.

오히려 조금은 건강을 되찾았다고 해야겠지. 그녀와 함께하는 시간은 내게 많은 것을 생각하고 느끼게 했소.

세상을 알게 되었으며 음미(吟味)하게 되었고 반추(反芻)하게 되었지.

조화경을 넘어서니 그동안의 내 무공이 얼마나 극단적이었으며 충동적이었는지를 알게 되었다오.

분노하면 더 강렬해지는 것만 같았던 무공들은 그저 극단적으로 방어를 도외시하고, 내공과 무공이라는 장작에 수명이라는 기름을 부어 만들어낸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었소.

그저 좁고 깊기만 했던 내 세상이 기형적일 정도로 극단적인 무학을 만들어낸 것이었다오.

그녀의 집안에 수대에 걸쳐 내려오던 무공이 내게 전해진 이후 나는 내 모든 무공을 돌아볼 수 있게 되었소.

그로 인해 지금의 그녀를 위한 무공도 만들어낼 수 있었소.

이미 금이 간 상태이지만 그녀의 그릇을 더 단단하게 만들 수 있었기에 그녀는 약간이나마 건강을 회복했소.

건강을 회복하고 나자 역시 핏줄을 외면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오.

그녀는 마지막 승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서 아버지를 만나고 싶다고 했소.

고개를 저을 이유가 없던 나는 그녀와 함께 길을 나섰다오.


무림맹으로 가는 길을 서두르지는 않았소.

아직 마지막 승부까지는 시간이 많이 있었고 가는 길에 멋진 풍경과 맛있는 음식은 여전히 많았으니.

우리는 급하지 않게 걸으며 때론 풍경에 취해 머무르고 맛있는 음식을 찾아 잠시 돌아서 가기도 했소.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들었소. 우리가 떠나 있었던 무림에 대해, 그리고 정과 사의 싸움에 대해, 마지막으로 새로운 종교에 대해.

무림맹은 수세에 몰렸던 처음과는 달리 맹주가 전면으로 나서면서 느리지만 착실하게 사파를 몰아붙였소.

사파는 자신들의 영역마저 잃어가고 있었으며 새로 발호한 종교는 기존 정파의 영역과 사파의 영역에 걸쳐서 영향을 끼치고 있었소.

이런 상황에서 중재안이 나왔으니 사파는 반기면서도 줄어든 영역을 회복하기 위해 악착같이 싸움을 걸었소.

정파는 유리한 상황이긴 하나 길게 이어진 전쟁을 멈추고 피해를 복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소.

그렇기에 중재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고 했소.


출발한 지 한 달이 지나고 무림맹의 은신처 근처에서 우리는 사자권의 의형제인 노인들을 만날 수 있었소.

노인들은 그녀를 보고 눈시울을 붉혔소. 그녀가 어렸을 때부터 손녀처럼 애지중지했던 인연이라고 했소.

그들은 이제 더 이상 무림맹에서 일을 하지 않는다고 했소.

그들을 따라 한적한 마을의 작은 집에 도착했을 때 내공을 잃은 사자권을 만날 수 있었소.

그는 눈 하나와 손가락 세 개를 내공과 함께 잃었는데 겨우 이 정도로 그 많은 후기지수들을 살릴 수 있었으니 다행이라 말하더이다.

치명적인 내상을 입고 탈출하여 무림맹에 복귀 요청을 했을 때 복면인들의 습격을 받았고 그들을 물리치는 과정에서 내공을 대부분 잃었다고 했소.

그리고 그는 그들이 무림맹 내부의 인물인 것 같다고 했지.

노인들이 옆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확인해 주었소. 그들이 알아본 바로도 본단에 사자권이 설명한 이들이 있는 것 같았다고.


나는 아무 말 없이 눈을 감았소.

복수는 잊기로 했고 그녀와 함께 살아갈 예정이었소.

무림에는 잠시 다녀갈 예정이며 우리는 앞으로 도와 검을 잡지 않을 것이었소.

다시 눈을 떠 사자권을 바라보았을 때 사자권은 웃고 있었소.

드디어 복수라는 미몽(迷夢)에서 벗어난 것을 축하한다고 말했소.

그는 많은 이들이 자신의 손에 스러져 갔듯이 이번에는 그저 자신의 차례가 온 것이라고 말했소.

이것은 손에 피를 묻혔던 이의 당연한 업보이니 복수 따위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고.

우리는 밤새워 지나간 무림에 대해서 이야기했소.

다시는 돌아가지 않을 그 비정한 세상에 대해서.

그녀는 유독 노인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지.


다음날, 노인들은 그녀에게 두툼한 종이뭉치를 건넸고 그녀는 그것을 갈무리했소.

그리고 우리는 이별을 고했소.

노인들은 사자권의 고향으로 함께 떠날 예정이며 참한 노파가 있다면 살림이나 차려볼까 한다고 했소.

언제나 진중하던 그들의 너스레에 나와 그녀는 한참이나 웃었소.

그들이 떠나고 나서 그녀는 한적한 곳에서 내게 작게 말했소.

이상한 것들이 있다고.


무림맹과 사도련의 싸움은 이상할 정도로 극단적으로 진행되었고 누군가 조정하는 것처럼 비슷한 피해를 입었지.

이 틈을 비집고 나타난 종교는 너무도 빠른 속도로 민심을 휘어잡았소.

간단하게 보자면 이득을 본 종교가 의심되지만 그들이 무림맹과 사도련에 피해를 강요해서 얻는 이득은 거의 없었소.

그들은 무림세력도 아니었고 무림세력이라고 해도 종교가 무림을 좌지우지할 정도의 무력을 가지게 되면 얻을 수 있는 것은 황제(皇帝)의 견제와 관(官)의 박해뿐일 테니까.

전쟁을 시작했으나 여러 이득을 보고서도 끝내지 못한 사도련주는 신뢰를 많이 잃었고 여러 차례 실수가 있었던 무림맹주 역시 위엄에 손상이 있었소.

다만 그것들이 그들의 자리를 위협할만한 일은 또 아니었소.

정과 사, 누구도 큰 이득을 얻지 못하고 약간씩의 손해를 입은 상황.

누군가 꾸민 일이 아니라면 이 모든 것은 우연이라는 것인데 그럴 리는 없다고.

그래서 묻노니 복수는 정말 잊은 것이냐고. 여기 무림맹 내부에서 암약하는 이들에 대한 정보가 있다고.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펼치지 않은 종이뭉치를 내게 내밀었소.


나는 그것을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소. 종이를 내민 그녀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거든. 그리고 은근슬쩍 배 위에 얹은 다른 쪽 손도 역시 떨리고 있었소.

나는 그 떨리는 손을 잡아주었소.

이제 내겐 진실은 필요 없다고 말했소. 진정한 복수나 흉수도 관심 없다고 말했지.

우리가 함께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내가 하고 싶은 것이라 말했소.

그러니 오늘 저녁은 어떤 맛있는 것을 먹을 것이냐 물었지.

머뭇거리던 그녀는 웃으며 엄청 맛있는 것을 생각해 뒀으니 기대하라고 말하더군.

왠지 물기를 머금은 듯한 그 반짝거리는 눈동자가 여전히 나를 설레게 해서, 그래서 나는 그녀의 말대로 한껏 다음 순간을 기대할 수 있었다네.

우리는 여전히 무림맹으로 가는 길을 서두르지 않았고, 한껏 기대를 안은 발걸음으로 서로를 마주 보며 걸을 수 있었지.

아마 과거를 직시하고 털어냈기 때문인지 우리는 더 이상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았네.

오롯하게 순간을 즐기기로 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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