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도산검림의 미식가(6)

- 그대가 도저히 놓을 수 없는 그 단 한 가지

by 블랙스톤

이상한 일이었소. 이제 나에게 복수는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에서, 할 수 있으면 해야 하는 일로 바뀌었소.

그동안 나를 지탱하던 우선순위가 바뀌었는데도 내 마음은 편안했소이다.

이렇게까지 마음 놓고 회복에 전념했던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요.

이제는 더 이상 복수에 미쳐 무공에만 매달리지 않았소.

복수를 다짐한 이후 처음으로 눈을 돌려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한 거요.


세상에 관심을 가지니 참 볼만한 것도 많고 신기한 것 투성이었으며 맛있는 것도 많더이다.

매일 몸이 굳지 않을 정도로 간단하게 운동을 하고 그녀와 이야기를 하며 함께 거닐었소.

어두워져 그녀와 헤어져 방으로 돌아오면 운기조식을 하며 몸을 관조(觀照)하였소.

가끔 나에게 관심을 가진 사자권이 방문하면 그와 무공에 대해 대화하고 가끔은 가르침을 받기도 했소.

어찌 보면 지루할 정도로 평온하고 한가한 나날이었소. 그런데 무공이 점점 발전하는 것이 느껴졌소.


그녀를 만나기 전의 내 기준에 따르면 아예 손을 놓은 수준으로 무공을 등한시하였는데 내공은 점점 더 정순해졌고 무학의 깊이는 깊어졌소이다.

혹시 내가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든 것은 아닐까 걱정될 정도였소.

하지만 나의 걱정을 들은 사자권은 한쪽으로 치우쳐 깊게만 파여 있던 우물이 그 폭을 넓혀 호수가 되는 과정이라고 하더이다.

내 이야기를 들은 그녀는 자신의 폭넓은 음식 이야기와 세상에 대한 조예(造詣)를 들은 덕에 내 안목(眼目)이 넓혀지고 있는 것이라 했소.

그리 말하며 살짝 턱을 치켜드는데 그 모습조차 귀엽더구려.


나는 고개를 끄덕였소.

기의 흐름이 불안해진 것도 아니고 제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니 불안한 마음을 덜어내기로 했소.

그녀와 사자권의 말대로 나의 세상이 넓어지고 있어 그만큼 기의 수발(受發)이 자유로워지는 것이리라 추측했소.

그런 마음 가짐으로 천천히 관조하니 과연 예전에는 단호하고 단단하던 기의 흐름이 조금 유연해진 것이 느껴지더구려.

무공에서 조금 눈을 돌리니 더 높아지는 경지라니.

그녀라는 위안이 내게 얼마나 큰 것들을 안겨주었는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소.

그래서 다음날 그녀를 만났을 때 아무 말 없이 한참을 꼭 끌어안고 있었소.

놀라서 버둥거리던 그녀가 이내 잠잠해지더군.

슬쩍 보니 귓불까지 빨개져서는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소.

그렇게 평화(平和)가 드디어 내게 찾아온 거요. 아주 잠시뿐이었지만.


부상이 나은 나와 의제(義弟)들의 설득을 못 이긴 사자권이 정식으로 주작단에 합류했을 때는 전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소.

무림맹과 사도련의 전투부대가 맞붙는 사이에 사도련의 지원을 받은 사파들이 각자의 지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기 시작했던 거요.

정파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앞마당이 흔들리고 있으니 도저히 눈앞의 전투에만 집중할 수가 없었지.


정파고 사파고 간에 무림맹과 사도련에 지원을 하느라 여력이 없는 것은 같은 입장이었으나 정파와 사파의 근본적인 차이를 파고든 일격이었소.

사파가 정파의 영역에서 치안을 불안하게 만들면 그 등쌀을 이기지 못하는 이들이 사파에 협력하게 되는 식이었소.

우격다짐으로 일단 때리고 보는 사파는, 그놈들이 그럼 그렇지, 정도의 시선만 받고 영역을 확장하거나 정파의 영역을 흔들 수 있었던 거요.

그걸 지켜야 하는 정파의 입장에서는 환장할 노릇이었지.

여력(餘力)이 있는 대문파는 자신의 영역이 동요(動搖)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지만 작은 문파는 여지없이 흔들렸소.

안방부터 흔들어버리는 이 전략은 놀랍도록 유효해서 몇몇 이들은 전투를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기도 했소.

그녀는 전투의 양상을 듣고 얼굴을 굳혔소. 사도련이 이런 악수(惡手)를 두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했지.

내가 물었소. 사도련에게 유리한 수가 아니었느냐고.

그녀는 말했소. 이건 원한(怨恨)을 만들어내는 수라고.

단순히 전투부대끼리 한 두 번의 전투로 끝날 일이 서로 문파의 존망(存亡)을 걸고 싸우게 만드는 수라고.

이야기를 듣고 나니 과연 상황이 그렇게 돌아가고 있는 것 같았소.

앞마당을 공격당해 터전을 잃거나 뒤에 편안히 있어야 할 가족이 공격당한 이들이 사파에 원한을 불태우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정파가 사파를 미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하고 묻자 그녀는 가만히 내 손등을 다독이며 말했소.


무림이라는 동네에서 평화(平和)라는 전제(前提) 안에서 함께 살아온 우리에게 사파는 그저 마음에 들지 않는 이웃과도 같았다고.

하는 언동(言動)이나 행실(行實)이 마음에 들지는 않아 자주 어울리지도 않고 분명히 미워하지만 함께 살고 있는.

분명히 배척(排斥)하고 멀리할 이들이지만 피해를 감수하며 멸살(滅殺)해야만 하는 존재는 아니었다고.

하지만 이번 일로 인하여 정파와 사파는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가 되어가고 있는 것만 같다고.

게다가 단기적으로는 사파가 득세(得勢)하는 것처럼 보여도 장기적으로 보면 정파가 더 단단해지게 하고 정작 큰 이득은 얻기 힘든 수라고 말해주었소.

결국 무림의 전쟁이라는 것은 나라 간의 전쟁처럼 땅따먹기가 아니라고.

하나하나가 전략병기(戰略兵器) 수준인 절세고수가 존재하는 곳이며 엄연하게 나라와 법도(法度)라는 것이 따로 존재하는 곳이니까.

이 상황은 뻔히 보이는 절벽으로 달려가는 꼴이라며 그녀는 눈살을 찌푸렸소.

그녀의 말은 길고 어려웠지만 하나는 이해할 수 있었소.

지금의 상황은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


그녀의 걱정처럼 정사간의 싸움은 대전(大戰)이 되었소. 너도나도 칼을 들고 뛰쳐나와 휘둘러댔지.

세상은 흉흉해졌고 무림맹은 정의를 부르짖으며 덩치를 더 키워나갔소.

이제는 가벼운 세력다툼이 아니라 사도련을 깨부수고 지역단위의 사파들을 멸문시키기 위한 전쟁이 되었소.


나와 그녀, 그리고 주작단은 여러 전투에 참가했소. 몇 번은 이기고 몇 번은 졌소이다.

이제 정말 조화경으로 가는 문턱에 선 나와 이미 조화경에 든 사자권이 앞장서서 주작단을 이끌었소.

이기는 전투건 지는 전투건 피해는 크지 않았소.

나와 맞설만한 이들은 가끔 있었어도 사자권과 맞설만한 무인은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오.

그만큼 조화경이란 경지가 대단하다는 뜻이었소.

이 넓은 땅덩이에 사자권과 견줄만한 무인은 채 스물 남짓이었으니.

그의 전투를 보는 건 내게도 도움이 되는 일이었소. 손짓 하나에도 깊은 무리(武理)가 숨어있었거든.

그는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 신중한 행동 하나하나가 내게는 좋은 가르침이었소.

사자권 역시 가끔 내가 보는 앞에서 자신의 비기(祕器)를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보여주곤 했소.

그녀를 만난 덕에 복수를 해야 한다는 조바심을 버릴 수 있었고 평생을 목말라했던 고급 무리에 대한 갈증도 풀 수 있었소.

그녀가 갈수록 예뻐 보이는 것은 당연했소.


무림맹과 사도련의 대전은 속절없이 길어졌소이다.

밀고 밀리는 전투의 나날들 사이에서 적수를 찾을 수 없는 사자권의 명성이 끝없이 올라갔소.

그 옆에 있던 나도 덩달아 명성이 오르더군. 그러다 내가 이제는 멸문된 설가장의 마지막 생존자라는 사실도 알려졌소.

무언가 변화가 있을지도 몰라 잔뜩 긴장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소.

그들은 내가 참화(慘禍)의 생존자라는 것보다도 무림맹주의 딸을 애인으로 두었다는 것에 더 관심을 가졌소.

사람들은 이미 사라진 것보다는 현재에 영향을 미치는 것에 더 집중하곤 한다오.

그리고 내가 무림맹주의 사위가 될지도 모른다는 것에 어떻게든 나와 끈을 만들려는 자들도 생겼소.

나를 비난하는 자도 생겼다오. 한낱 낭인 출신인 내가 이런 관심을 받게 되다니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소.


무림맹에서는 새로운 작전 하나를 보내왔소.

길어지는 싸움을 멈추기 위해서 적의 머리를 칠 것이니 각 무력단체들이 시선을 끌어달라는 내용이었다오.

그녀는 무림맹주인 아버지가 직접 나서는 작전이라면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소.

그는 조화경의 무인이었으며 그의 의제 역시도 조화경의 무인이었으니까.

강한 고수인 사자권이 포함된 주작대는 가장 큰 소란을 피우기로 했고 사도련의 강력한 전투부대의 뒤를 잡아 습격했소.

전투는 순조로웠소이다. 손쉽게 적을 쓰러트리고 물러나려는 때에 요란한 호각소리와 함께 적들이 몰려왔소.

함정에 빠진 것인지 혹은 우연찮게 적의 다른 전투부대가 주변에 있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었소.

알 수 있는 것은 사자권의 앞에 나선 적이 무척 강하다는 것뿐이었소.

그를 도우려는 나를 막는 이들은 사자권의 앞에 선 이를 '련주(聯主)'라고 불렀소.

그제야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지.

평소에 말이 별로 없던 사자권은 크게 고함을 치며 모두 물러나라고 했소.

나는 도를 뿌리며 그의 곁으로 가려했지만 사도련주의 호위들에게 막히고 말았소.

그리고 그 호위들의 가장 뒤에 서 있던 백발의 노인은 다급한 내 칼질을 보면서 여유롭게 다가오며 말했다오.


"설가장의 어린 아해(兒孩)야. 네 아비의 품에선 장보도가 나오지 않았단다.

어린 나이에 이리도 빠르게 강해지는 것을 보면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이렷다.

검해(劍解)를 어디에 숨겼느냐. 혹시 들고 다니는 것일까?

아니, 아니야. 그런 보물을 품에 지니고 있을 리는 없고. 묻는다고 대답하지는 않으려나.

그럼 잡아서 알아내면 되겠지. 팔다리쯤은 없어도 말하는 것에 문제는 없으렷다. 팔다리만 다 꺾어버리거라."


련주의 호위는 그의 제자들인지 비슷한 무공을 사용했는데 부모님의 유해(遺骸)에 남았던 흔적이 연상되는 무공이었소.

얼마 전 포위망에서 만났던 얼굴 허연 녀석과 같은 무공.

그들 하나하나는 나보다 못한 무위를 지녔지만 합이 좋아 쉽게 떨쳐낼 수가 없었소.

나는 그들에게 발이 묶이고 사자권은 련주라는 이에게 연신 밀려나고 있었다오.

그 사이에 주작단은 사방으로 산개(散開)하여 몸을 피하고 있었소.

이들의 목적은 아무래도 사자권과 나였는지 그들을 공들여 쫓지는 않았소.

한참을 싸우다 보니 이미 포위망이 완성되었더군. 주작단은 이미 다 도망갔는지 보이지 않았소.

이내 나와 눈이 마주친 사자권은 크게 웃으며 련주에게 달려들었소.

그의 모습을 보고 나도 반대 방향으로 호위들에게 달려들었지.

평소에 사자권과 무학 토론을 할 때면 그는 아주 과감한 수를 선호하였소.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과감한 돌파를 노릴 거란 생각이 맞았소.

그는 살을 주고 뼈를 취하는 전략으로 나와는 반대 방향으로 탈출을 시도했고 나 역시 동시에 비슷한 전략으로 포위망을 벗어났소.

그 와중에 적지 않은 상처를 입었지만 어쨌든 포위망을 벗어날 수 있었지.


산 하나를 넘고 강가의 근처에 다다랐을 때 백발의 노인이 귀신처럼 따라붙었소.

아마도 그는 나와 독대를 하고 싶었던 듯 하오.

그는 내게 손을 쓰며 외쳤소. 검해는 어디 있느냐고.

가슴팍을 쥐어뜯을 듯 달려들다가 돌연 어깨를 내리쳐서 꼼짝없이 일격을 허용했소.

그러고는 어깨는 잘못 쳤다며 다리를 대라고 하더군. 아마도 그는 제정신이 아닌 듯했소.

이런 미친 노인네에게 부모님이 당한 거라니 나도 솟아오르는 울분으로 돌아버릴 것 같았소.

그는 확실히 나보다 강했지만 제정신이 아니어서인지 순간순간 빈틈이 보였소.

칼을 들지 않은 어깨를 다시 한번 내주며 가슴에다 칼을 쑤시려는데 외마디 비명과 함께 누군가 달려들었소.

노인은 음흉하게도 빈틈을 유도했던 거요.

그걸 숨어서 바라보던 그녀가 나를 대신해 노인의 손에 달려들어 공격을 대신 맞았소.

나는 그 사이에 노인의 팔 하나를 잘라냈소. 그리고 장력에 떠밀려 오는 그녀를 안고 강으로 뛰어들었지.

물속으로 잠수하여 자리를 벗어나는데 노인의 광소(狂笑)가 들려왔소.

그는 팔이 잘려 나갔는데도 미친 듯이 웃으며 외쳤소.

검해! 이것이 검해의 위력인가! 아파! 아파! 미친 듯이 아프구나!


섬뜩하게 따라붙는 그 외침을 뒤로하고 의식을 잃은 그녀에게 기를 흘려 넣어 운기를 도우며 생각했소.

저런 미친놈들에게 복수를 하려던 나도 확실히 제정신은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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