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대가 도저히 놓을 수 없는 그 단 한 가지
주작단이 모두 돌아온 것은 아니었소. 어느 순간 추적(追跡)이 사라진 것을 깨달은 그녀가 자신을 따르던 몇몇을 데리고 돌아온 것이었소.
쫓기면서도 저들이 호각 소리를 통해 추적하고 의사소통한다는 것을 눈치챈 그녀가 그것을 역이용해 혼란(混亂)을 주겠다는 계획을 세웠소.
노인과 주작단원들은 반대했다고 하오. 하지만 그녀는 차분하게 그들을 설득했소.
주작단과 그녀를 놓친 이들이 나의 거센 저항에 부딪히고 게다가 돌발적인 변수까지 생기면 목표를 놓친 상태에서 피해를 더 누적(累積)시킬 수 없어 포위를 풀고 돌아갈 것이라고.
오히려 더 거세게 공격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했다고 하오.
나라는 사람이 단시간 내에 쓰러질 사람이더냐고.
모두의 이야기를 들은 노인 또한 도박성이 짙다며 그녀를 설득하려 했지만 고집부리는 그녀를 말릴 수가 없었다고 했소.
무위(武威)도 높아져 쉽게 제압할 수도 없었던 이들은 몰래 살펴보고 아니다 싶으면 바로 몸을 빼야 한다는 약속을 받고서 동행했다고 했소.
다시 돌아온 이들은 포위가 한쪽을 향해 조여드는 것을 확인했고 그로 인해 약해진 경계의 틈을 파고들었네.
그리고 그 안에서 내가 저항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됐지.
그 뒤는 말했던 대로요. 정해진 규칙을 무시하고 호각을 사방에서 부니 당황한 이들은 곧 포위를 풀었고 내가 구출된 거지.
다시 그녀를 보게 된 것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이었지만 그녀가 돌아온 것은 문제가 있었소.
당장은 포위망이 흐트러졌다고 해도 그녀가 다시 돌아왔다는 것을 알게 되면 다시 포위망이 촘촘해질 터.
그녀에게 무모했노라고,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고 말하자 그녀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 웃으며 내게 말했소.
믿는 구석이 있었노라고. 그리고 포위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고.
고개를 돌리자 주작단원들도 어리둥절해하는데 오직 노인만 끄덕이고 있더구려.
그제야 노인의 별호가 머리에 스쳤소.
지금에야 단독인 별호가 더 유명하지만 그가 젊었던 시절에는 삼협(三俠)의 일원으로 더 유명했다는 게 생각난 거요.
그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처럼 곧 장내에는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크고 하얗게 샌 머리를 봉두난발처럼 아무렇게 기른 이가 도착했소.
사자권(獅子拳). 내가 엿보고 있음에도 어떻게 가야 하는지 아직 감도 오지 않는 조화경(造化境)의 고수가 도착한 거요.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소. 이 정도 패라면 자신감이 없는 것이 더 이상하지.
주위를 보니 나처럼 고개를 끄덕이는 주작단의 표정도 환해져 있더구려.
우리가 추적에서 벗어나고 정과 사의 다툼은 더욱 격화되었소. 주작단은 후기지수의 모임이기에 각 문파의 미래들이 대거 포진하고 있는 곳이오.
그런 이들을 습격하여 사상자까지 발생한 덕에 무림맹은 정식으로 전투부대를 출동시켰소.
사도련 역시 기다렸다는 듯이 맞불을 놓았지.
처음에는 문파의 후계 다툼이었으나 곧 지역 분쟁이 되고 이제는 정사간의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된 거요.
보통 정파와 사파의 전투라는 것은 일종의 약속 대련과 같은 것이었소.
사실 한쪽은 완전히 없애기는 보통 어려운 일도 아닐뿐더러 소림사(少林寺)나 무당파(武當派)와 같은 곳은 강호인이 아닌 민간인들도 기도를 위해 방문하는 곳이오.
그런 곳을 함부로 불태워 관(官)의 관심을 받게 되면 어떤 문파도 이 땅에 발을 붙이기는 힘든 법이니까.
또한 사파든 정파든 유명한 가문에는 관에 진출한 관리들이 적지 않게 있었기에 무조건적인 멸문(滅門)을 목적으로 싸울 수는 없었소.
그런 민간이 연계된 문파에나 가문에는 무림에서의 봉문(封門)을 요구하고 끝나는 식이었소.
한쪽을 완전히 사라지게 하려고 싸우는 것이 아니었단 말이오.
한데 이번에는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했소.
무림맹의 전투부대와 맞붙을 사도련의 전투부대에 시선이 끌린 사이에 정파의 가문 몇 곳이 불타올랐소.
이전 같으면 봉문을 요구하는 선에서 끝났어야 할 전투가 멸문까지 이어진 거요.
무림맹의 해명 요구에 사도련은 그들이 끝까지 저항했으며 봉문을 거부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고 말했지만, 모두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있었소.
무림맹과 사도련은 전투부대를 더욱 보충하고 기존의 부대를 보강했지.
그러한 것의 일환으로 주작단 역시 전력보강을 시작했소.
다른 부대와는 다르게 주작단에는 노인들의 대형(大兄)인 사자권과 나라는 인연(因緣)이 있었기에 우리를 설득하려 했소.
덕분에 나와 그녀에게는 대화할 시간이 충분히 생겼지.
붕대를 칭칭 감은 내 옆에는 항상 그녀가 있었소.
거동이 조금 편안해진 날, 나는 그녀와 함께 호숫가에 앉아서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해주었소.
설가장이 불타오를 때 나의 동심(童心)도 함께 불타버렸으며 그 잿더미 위에는 복수심만이 남아 있었노라고.
가전무공을 익히고 낭인으로 활동하며 무공을 모아 나만의 무공을 만들었던 것도 모두 복수를 위함이었다고.
그 복수심과 위험(危險)을 무릅썼던 것이 우연찮게 맞아 들어 현재의 무공이 탄생했으며 기초를 이렇게 쌓아 올렸기에 앞으로도 내 무공은 위험과 위태(危殆)를 끌어안은 상태로 발전해 나갈 것이라고.
무공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이후, 원수들을 찾았으며 그들은 사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정파에도 있다는 것도 말했소.
심지어 정파에 내가 아는 원수는 현 무림맹주의 수족으로 알려진 사내였소.
그녀가 삼촌이라고 부르며 따르는 사내.
이야기하는 내내 그녀의 눈치를 살피게 되더군.
그녀에게는 불편한 이야기일 수밖에 없었기에 이대로 나를 외면할 것만 같았소.
이번 전투에서 원수 하나를 참살하고 원수일지도 모르는 이의 무공을 알아본 것까지 모두 이야기했소.
불안했지만 모두 이야기하고 싶었소.
그녀라면, 가문의 기초공까지 알려주며 내게 진심을 보이기 위해 노력했던 그녀라면 나를 이해해 주리라고 생각했소. 그녀를 믿었소.
그녀는 한참이나 가만히 있었소. 아니 울고 있었지.
그녀는 이야기를 듣는 내내 놀랐는지 눈을 크게 뜨고서는 입을 막고서 작게 흐느끼고 있었소.
이야기가 끝나고 나서도 그녀의 흐느낌은 멈추지 않았지.
그 흐느낌이 멈추고 나면 어떤 식으로든 결론이 날 것이라서 나는 그저 긴장한 상태로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었소.
신뢰(信賴)하지만 그녀가 가족(家族)을 의심하는 나를 떠난다 해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소.
그녀는 흐느낌을 멈추고 한 손을 내밀어 내 손등을 덮었소. 그리고 가만히 토닥거렸지.
그 무언(無言)이 내 마음의 준비를 무너뜨렸소.
나도 모르게 그녀의 손을 꼭 붙잡았지. 떠나지 않기를 바라면서.
그녀는 손을 살짝 빼냈소. 나도 모르게 어깨를 늘어뜨렸던 것 같소. 눈앞이 캄캄해졌지.
그녀는 눈물을 닦고 그런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고 했소.
세상을 잃은 듯 멍하니 있는 내 모습에 왠지 웃음이 나왔다고 그녀가 나중에 말해주었다오.
눈앞이 캄캄해진 내가 서서히 정신을 차릴 때까지 그녀는 내 볼에 난 칼자국과 목 옆쪽에 칼이 스친 흔적, 그리고 온통 몸을 휘감은 붕대를 바라보았소.
상처 난 과거를 온통 휘감고 있는 나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고 했소.
어디에도 현재나 미래를 꿈꾸는 흔적이 없는, 과거에 매몰(埋沒)되어 살아가고 있는 이 불쌍한 사내를 연모(戀慕)하는 것은 그를 가련(可憐)하게 여기는 것인가? 혹은 측은(惻隱)하게 여기는 것인가?
그녀는 초점이 돌아오는 나를 보며 자신의 마음을 다잡았다고 했소.
그녀에게도 확신이 필요했던 거요.
그리고 초점이 돌아와 자신을 마주 보는 그녀를 발견하고 기뻐하면서도 곧 떠날까 봐 우울해하며 눈치를 보는 나를 보고서야 그녀는 확신했소.
내가 그를 연모하는 만큼 그도 나를 연모하는구나.
그녀는 나를 향해 환하게 웃어주었소. 아직 남은 눈물 몇 방울을 눈을 깜박여 떨쳐내면서.
그리고 그녀는 나를 안고 한참이나 등을 쓰다듬고 토닥여 주었소.
그녀의 따뜻한 품에서 나는 가슴속 잿더미 속에 서려 있던 복수심이 누그러드는 것을 느꼈다오.
그리고 그녀는 말했소.
고생했어요.
복수심이 조금씩 녹아서 눈으로 흐르는 것만 같았소.
어쩌면 나는 작은 위로(慰勞)를 원했는지도 모르겠소.
뻔한 위로 따위 필요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소.
내 마음에 와닿은 그 따뜻하고도 작은 속삭임은 충분한 위로였소.
불시에 닿아버린 그녀의 마음에 나는 속절없이 눈물을 흘리고 말았소.
가슴이 다시 차분해진 이후에 그녀는 뭔가 이상한 점이 있다고 말했소.
복수심이 그녀의 따뜻함에 녹아서 인지 혹은 그녀이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나는 가만히 이야기를 들었소.
무림에서 부(富)라는 것이 중요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멸문까지 이르게 할 만한 일은 아니라고.
심지어 그것이 정파와 사파가 연합하여 저지를 만한 일은 아니라고.
나는 그동안 내가 조사한 것들을 그녀에게 상세하게 이야기해 주었소.
이야기를 모두 듣고 나서 그녀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소.
나의 추측대로 여불위의 보물을 얻어 각 문파들이 더 번창했다면 사이좋게 그 보물을 나눴다는 뜻이 되는데 정파와 사파가 섞여있는 그들끼리 그런 것이 가능했겠느냐고 말했소.
차근차근 이야기하는 그녀의 말을 들어보니 과연 무언가 이상했소.
일시적으로 눈이 멀어 서로 손을 잡게 만들 정도의 보물이라면 그것을 차지하기 위한 다툼이나 이동시키기 위한 소문 따위가 퍼지지 않을 리가 없었으니까.
설가장의 무공 묘리를 사용하자마자 알아보는 흉수 역시도 이상했소.
어쨌건 멸문한 지 십 년도 훌쩍 넘은 문파의 무공을, 전부 끌어다 쓰는 것도 아니고 그 묘리를 끌어다 쓰는 것인데 바로 알아본다는 것.
심지어 사용하는 무기도 달라 형(形)만으로는 알아볼 수가 없을 텐데, 공격까지 멈춰가며 묻는다는 것은 뭔가를 알아봐야 한다는 것과도 같은 것이라 말했소.
그리고는 그녀는 생각에 잠겼소. 나는 그녀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말을 걸지 않았소.
그녀는 똑똑한 사람이었소.
무공을 가르칠 때도 느꼈지만 개념을 이해하는 부분에서는 천재라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 사람이었지.
이번에도 그녀가 의문점들을 해결해 줄 거라 믿었소.
머리보다는 몸을 움직이는 것이 훨씬 편한 나로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의문들이니까.
나는 그래서 고민에 빠진 그녀를 관찰했소.
살짝 찌푸린 아미와 앙다문 입술, 그로 인해 통통하게 튀어나 온 볼까지.
그녀를 방해할까 봐 그 볼을 만져보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다오.
한참을 고민하던 그녀는 어디론가 급하게 이동했소.
놓치지 않을 정도로만 천천히 그녀를 따라가니 예전에 내게 입방정을 떨다가 양볼을 얻어맞았던 덩치를 찾아 말을 걸더군.
덩치는 내가 다가오자 먼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소.
고맙다고. 대협(大俠)의 희생 덕에 살아났다고.
나도 마주 인사했소. 그리고 그녀와의 이야기를 들었지.
그녀는 언젠가 덩치가 삼촌에게 들었다고 한 장보도(藏宝图)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소.
덩치는 황보가의 둘째였는데 십 년이 훌쩍 넘은 과거에 가문으로 투서(投書)가 날아들었다고 했소.
그 당시의 자신은 어린 소년이라 잘 모르는 일이었는데 그 투서로 가문 회의까지 일어났었다고.
덩치의 삼촌은 처음에 그 투서를 가문 내 아이들의 장난이라고 생각했다고 했소.
하지만 그 내용이 자세하고 치밀해 혹시나 싶은 마음에 가문에서 회의까지 소집되었다고 했소.
장보도를 한 가문이 차지하고 있으며 그 보물들 사이에는 황보가의 실전된 무공이 있다는 내용이었는데 회의를 통해 그들은 그것에 관여하지 않기로 했다고 했소.
무림인이 무공에 욕심을 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나 뻔히 의도가 보이는 투서였기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하더구려.
덩치는 주변을 둘러보고 목소리를 죽여서 말을 덧붙였소.
사실 실전됐다고 외부에 알려진 그 무공은 서고의 구석에서 진본(眞本)이 발견되었기에 투서의 내용을 믿지 않았다고.
또한 덩치는 이야기의 끝에 덧붙였소. 자신의 가문뿐만 아니라 몇몇 가문에도 이러한 투서가 왔던 것으로 안다고.
그녀는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소.
사실 나는 그녀가 나를 향해 끄덕이는 것이 무슨 뜻인지 잘 몰랐소. 하지만 그녀를 따라 고개를 끄덕였지.
내가 끄덕이는 것을 어떤 신호로 받아들였는지 그녀는 덩치에게 감사를 표하고는 사파 놈들의 준동(蠢動)에 대해 조사하는 것이니 함구(緘口)해줄 것을 요구했소.
덩치는 고개를 끄덕였고 나와 그녀는 그에게 감사를 표하고 자리를 떴소.
생각에 잠겨 빠른 걸음으로 걷는 그녀의 뒤에서 천천히 따라 걸으며 생각했소.
누군가 우리 가문에 여불위의 일지가 있다고 소문을 냈다는 것이 그리 중요한 일인가?
덩치와 그녀의 대화를 곰곰이 되짚어 보며 혹시 쳐 죽여야 할 놈들이 더 늘어난 것은 아닌지 걱정했소.
이제 복수보다는 그녀와 함께 있고 싶은 내게 그건 조금 부담스러운 일이었소.
한적한 곳에 다다르자 그녀가 내게 말했소.
여불위의 일지, 그러니까 장보도의 소문을 퍼트리며 그 보물 안에 각 파의 실전된 무공이 있다는 소문을 퍼트린 자가 있다고.
그리고 그 자는 그 소문을 통해 공격을 유도(誘導) 한 것이라고.
진정한 원수는 그 소문을 퍼트린 자일 거라고.
어쩌면 그 보물을 차지한 자 역시 소문을 퍼트린 자일 것이라고.
처음에는 허탈했소. 복수를 위해 갈고닦은 시간이.
내가 복수심을 불태웠던 자들마저 누군가의 손아귀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자들일 수 있다니.
하지만 이내 칼자루를 꽉 움켜쥐었소. 이제라도 알게 되었으니 진정한 원수를 찾으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이제 복수는 놓고 그녀와 함께 하기로 마음을 먹었는데?
나는 마음이 어지러워져 칼자루를 놓았소.
그런 내 마음을 아는 것인지 그녀가 나의 양볼을 감싸 쥐었소.
내 눈을 마주 보며 그녀는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말해주었소.
“나와 함께 가요. 어떤 어려운 길이라도 함께 가요.
당신의 마음이 한 조각이라도 어두운 곳에 박혀 있는 거, 난 싫어요.
난 당신을 혼자 두지 않을 거예요. 나랑 같이 가요.
그렇게 마음의 짐을 다 털고 나면 약속했던 대로 나와 함께 맛있는 거나 먹으러 가요. 어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소. 그녀는 환하게 웃어주었소.
어쩌면 고통만 주었던 세상이 내게 미안해 이제라도 그녀라는 위안(慰安)을 마련해 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소.
그래서 세상에 조금 감사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