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대가 도저히 놓을 수 없는 그 단 한 가지
그녀와 함께하며 칼을 놓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내 칼이 무뎌진 건 아니었소.
복수(復讎)를 위해 평생 갈았던 칼이기에 그 무엇보다도 날카롭고 공격적이었지.
방어전이라고 해서 크게 달라질 건 없었소이다.
그녀를 보호해야 하기에 오히려 더 거세게 휘둘렀소. 이제 더 이상 어떤 것도 잃고 싶지 않았거든.
무림맹 지부는 금방 불타올랐소.
무림맹의 눈과 귀를 가리기 위해 어떤 수를 쓴 것인지는 몰라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상태로 사방에서 공격당했지.
그만한 병력(兵力)이 이동했음에도 몰랐던 무림맹이 무능(無能)했던 것인지 아니면 주변의 사파와 산적들을 잡아다가 지부 외곽에 소동을 일으킨 사파의 전략이 뛰어났던 것인지는 잘 모르겠소.
어쨌든 대다수의 잡졸(雜卒)들이 불을 지르며 난동을 부리면 그들 사이에 숨은 고수 한둘이 하수들의 난동을 제압하려는 무림맹 인사를 공격하는 방식으로 혼란을 일으켰소.
그 소동 사이에 담을 넘은 사파의 고수들은 서넛씩 조(組)를 이루어 무림맹의 머리를 사냥했지.
기습(奇襲)이 이루어지기 전에 이미 눈과 귀가 가려진 상태였고 기습으로 머리까지 잃게 된 상황에서 무림맹이 전황(戰況)을 돌릴 방법은 없었소.
주변이 시끄러워지자 일단 그녀와 주작단에 합류했소.
그리고 최대한 인원을 수습(收拾)해 탈출(脫出)을 시도했지. 이번 탈출은 쉽지 않았소.
인원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주작단이 아닌 무림맹 지부의 인물들도 대거 합류(合流)했고 그만큼 전력도 강해졌지만 탈주하는 인원이 모였다는 이야기는 추격하기도 쉬워졌다는 이야기거든.
지부를 빠져나가기도 전에 몇 번이나 발이 묶였지.
칼을 휘둘러 추격자를 쓰러트리고 그녀와 눈을 맞추며 몇 번이나 망설였소.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지부에서 빠져나가서 각자 흩어지는 거였소.
그리고 그렇게 흩어진 이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뒤에서 쫓아올 이들을 막아줘야 할 테고.
이 무리에서 가장 강한 내가 남아 시간을 끌어준다면 많은 이들이 살아남겠지만 그녀와 헤어져야 했소.
시선을 끈 이후에 추격을 따돌리기 위해서라도 엉뚱한 방향으로 도주해야 했지.
적을 향해 뿌리는 칼은 여전히 날카로웠어도 가슴속의 칼날은 이미 무뎌진 것인지, 위급한 상황임에도 그녀와 헤어지는 선택지는 고르기가 힘들었소.
어쩌면 대적이 가능한 적들만 있었기에 위급하다는 생각이 덜했는지도 모르지.
행복함에 젖어서 칼날 위에서 살아오던 전투감각이 무뎌졌던 것인지도 모르고.
나를 이기지는 못해도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시간은 끌 수 있는 이들이 내 앞에서 버티는 사이에 갓 절정에 오른 그녀에게도 고수가 붙었소.
그리고 그 고수가 고전(苦戰)하던 그녀의 몸에 생채기를 내는 순간에 모든 감각이 정상으로 돌아왔지.
마음의 칼날이 예전보다도 더 날카롭게 벼려졌소.
기존의 복수심(復讐心)과 그녀를 지키고 싶다는 마음이 날을 벼리는 숫돌이 되었소.
그리고 감히 그녀에게 칼을 들이민 녀석들을 가만두지 않겠다는 마음과 겨우 찾아온 행복에 조금씩 금이 가는 것이 내 분노에 불을 붙였지.
그래. 내가 언제부터 여력을 두고 살아왔다고.
나는 언제나 일검(一劍)에 내 모든 것을 담아서 휘둘러 왔소.
복수, 원한(怨恨), 그 두 가지에 미쳐 살아온 일생(一生)이 고스란히 내 일검에 담겨 있었소.
적들이 쉽게 받아내지 못하는 내 일검은 그동안 노력해 온 내 모든 것이었소.
지금의 검에는 일말의 망설임이 있었소. 불안과 걱정이 담겨 있었지.
그녀가 일격(一擊)을 허용(許容)하는 순간 그 모든 불안과 걱정은 분노로 치환(置換)되었소.
안일하게 행동한 자신에 대한 분노와 그녀를 공격한 이들에 대한 원한, 그리고 언제나 나를 괴롭히지 못해 안달이 난 것만 같은 세상에 대한 저주(咀呪)로 바뀌었지.
전력(全力)을 다한 일검으로 상대를 참살(斬殺)했소. 그리고 일대의 적을 휩쓸었지.
당황하는 그녀와 주작단을 이끌고 도주를 시작했소.
몇 번의 추격을 뿌리치고 흩어지기 좋은 산의 초입에서 헤어짐을 고했소.
이제는 제법 강한 기파(氣波)가 쫓아오고 있었기 때문이었소.
그녀는 갑자기 상처를 입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우는 나를 보고 당황했소이다.
주작단의 인원들은 조용히 역시 전귀(戰鬼), 혹은 역시 귀랑도(鬼狼刀) 따위의 이야기를 수군거렸소.
노인들의 인솔로 주작단은 몇 번이나 흩어졌다가 뭉쳤다를 반복한 후 은밀히 안가(安家)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소.
단원들이 떠나고 그녀는 노인 하나와 끝까지 남았다가 내게 조용히 말했소.
“설랑(雪郞). 아프지 마세요. 다치지 마셔요. 싸우는 것만 봐도 너무 걱정돼요.
하지만 아파도 좋아요. 다쳐도 좋아요. 꼭 살아서 돌아와요. 꼭.
같이, 우리 같이 동정호(洞庭湖)변의 동정은어(洞庭銀魚)도 먹어보기로 했고 사천(四川)에 가서 별미(別味)도 맛보기로 했어요.
약속은 꼭 지킨다는 말 믿을게요.”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내 손목에 자신의 손수건을 묶어 주고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소.
나는 손을 그나마 옷의 깨끗한 부분에 문지르고 그녀의 얼굴을 감싸려 했지만 이미 피가 굳어 지워지지가 않더구려.
그래서 그녀의 얼굴을 만지지 못하고 허공에 손을 멈출 수밖에 없었소.
그녀는 눈물을 떨구고 내게 환하게 웃어 보인 후 노인의 재촉에 못 이겨 자리를 떠났소.
나는 한참을 그리 서있다가 몸을 돌렸소.
세상이 언제나 내게 강요하는 이 불합리함에 대한 분노를 풀 곳이 필요했고 마침 적들이 호각(號角)을 불어가며 찾아왔소.
나는 모든 분노와 증오를 담아 칼을 휘둘렀소.
절정 너머를 바라보는 내 무공의 근간(根幹)은 가전무공이지만 그 뿌리와 줄기는 불안정한 기를 다루는 내공심법서로 인해 한차례 변질되었소.
그리고 불안정한 기를 다루는 방식을 나만의 방식으로 변화시켜 접목(椄木)시켰기에 이제는 독문무공(獨門武功)이 되었다고 할 수 있지.
어쨌든 원래 내 가전무공은 변화에 치우쳐 있는 도법이었으나 현재 내 독문무공은 내가중수법(內家重手法)을 중심에 둔 무공이 되었소.
나와 상대의 기, 그리고 나아가 나와 상대를 둘러싼 자연의 기(自然之氣)까지도 흔들어버리는 것이 내 무공의 핵심이었소.
내공의 수발이 부자연스러운 하수(下手)들에게 더욱 치명적인 무공이지.
고수라고 해도 자연의 기가 흔들리는 데에는 당황할 수밖에 없고 그 당황을 파고들면 어렵지 않게 승리를 할 수 있었소.
유일한 단점은 내공의 소모가 크다는 것이었는데 그것도 맞부딪히는 순간만 발출하여 상대를 흔들었기에 어느 정도 감당이 되었소.
다만 길게 이어지는 추격전에는 내공이 버텨낼 리 없었소.
해서 적당히 시선(視線)을 끌고 피하려 했으나 고수 몇 놈을 꺼꾸러뜨리니 악에 받쳤는지 점점 더 많은 고수들이 몰려오더군.
이리저리 몸을 감추면서 상대를 베어 넘겼소.
처음에는 자잘한 상처 따윈 무시하고 적을 벴지만 시간이 지나니 이러다가 가랑비에 젖는 것처럼 내가 쓰러질 판국이더군.
내공의 소모도 무시할 수가 없었고. 방법이 필요했네.
숨거나 도망가기 위해서는 더 길게 싸울 방법이.
꼬박 하루를 도망치며 싸웠소.
절정 너머를 엿본 이후 가장 치열하게 싸운 것 같았소.
이제 조금씩 내공이 부족하더군.
사실 어떤 무공이라도 하루가 넘도록 싸움을 지속하면 내공이 부족할 수밖에 없소이다.
아무리 극단적으로 내공 소모가 적더라도 계속 쓰면 줄어들기 마련이니까.
어느새 하루를 쫓기면서도 계속 궁리(窮理)를 멈추지 않던 나는 내게 가장 익숙한 것에서 실마리를 찾았소.
내 가전무공은 변화무쌍(變化無雙)한 도법(刀法)으로 태생적으로 베기에 치중될 수밖에 없는 도의 한계를 변화로 넘어서려 했던 무공이오.
출수(出手)한 이후에도 몇 번이나 베기의 방향과 속도를 바꿀 수 있었기에 상대의 눈을 현혹하기 좋았지.
가볍고 얇게 개량한 유엽도(柳葉刀)를 이용해 빠른 변화를 이루는 무공이었기에 지금 쓰는 장도(長刀)에는 어울리지 않았소.
또한 지금 사용하는 내가중수법을 이용할 수 없어 몇몇 초식만 취하고 사용하지 않고 있었소.
그 가전무공에는 변화를 주기 위해 상대와 부딪히는 순간을 발도(拔刀)와 같은 방식으로 이용하는 초식이 있었소.
상대와의 부딪힘을 속도로 이용하는 방식이었지.
용케도 그걸 떠올린 나는 불안정한 기를 이용하는 내 방식 위에 그 도식을 접목했소.
정확히 말하면 그 요령을 덮어씌워 본 거요.
휘두르던 중간에 기의 흐름을 건드리거나 터트려 방향과 속도를 제멋대로 보내버리는 방식이었소.
확실히 상대가 혼란스러워하더군.
조금 익숙해지니 내공 없이도 상대의 검과 부딪히거나 내 검의 무게중심을 이용해 방향과 속도 조절이 가능해졌소.
그래.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몸을 쓰는 것에 관해서는 천재가 맞았소.
하수(下手)들과 부딪힐 때는 내공 없이 초식만으로도 상대의 힘을 이용해 처리할 수 있었소.
다행히 이미 그 이치를 익히 알고 있는 도식이기에 어렵지 않게 응용이 가능하더군.
아주 조금 더 길게 싸울 수 있게 된 거요.
다시 반나절이 지났을 때 포위망의 끝에 도달한 듯했소. 미리 기다리던 이들을 만났지.
얼굴을 아는 낭인(浪人)들이었소. 낭인들 중에 고수라 칭해지는 이들은 다 온 듯하더군.
돈에 팔리는 것이 낭인의 인생이기에 이해했소.
하지만 셋이 한 조(組)가 되어 아홉이 한 번에 덤벼오는 데에는 치가 떨리더군.
그들 중에는 나와 함께 싸워봤던 이들도 있었기에 효율적으로 덤벼왔소.
둘은 내 칼을 막고 나머지 하나는 칼을 막은 이를 보호했소. 그리고 나머지 다른 조가 공격해 왔지.
내 칼을 막는 순간 경직(硬直)된다는 것을 그들은 경험으로 알았던 거요.
그들의 전략은 유효해서 단시간 내에 그들을 돌파할 방법은 없어 보였소.
시간이 끌리는 사이 한 남자가 장내(場內)에 도착했지.
자신을 어느 문파의 장로라고 소개한 놈은 잊을 수 없는 놈이었소.
원수 놈 중에 하나였으니까.
사도련에 있어야 할 그놈이 어째서 작은 문파의 장로가 되었는지는 관심이 없었소.
다만 원수가 당당하게 내 앞에서 섰으니 그 목을 따는 일에만 관심이 쏠렸지.
없던 기운이 나는 듯했소.
그 불타오르는 분노를 자양분으로 삼고 머리는 아주 냉정하고 차갑게 싸울 준비를 했소.
불리하지만 물러설 수 없었으니까.
그들은 내가 무림맹에 고용(雇傭)된 것으로 알고 있었소.
의리가 무슨 소용이냐며 주작단이 어디에서 다시 모이는지, 그녀는 어느 쪽으로 갔는지, 같은 정보들을 달라고 했소.
그리하면 편한 죽음을 주겠다고.
자기들도 살려줄 거라는 말을 믿지 않을 거라 생각한 것이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몸에 힘을 빼고 칼을 늘어뜨렸소. 그리고 아주 작게 중얼거렸지.
그들이 내 소리에 신경 쓰는 그 찰나의 틈에 모든 내공을 끌어올려 공격했소.
내 생에 가장 강력한 일격이었소.
원수는 팔을 잃었지만 어쨌든 살았고 나는 공격을 멈추지 않았소.
기겁한 낭인들이 뒤에서 공격해 왔지. 내공을 아낄 생각이 없었기에 공간 자체를 흔들었소.
그들을 멈출 순 없었지만 공격을 약화시킬 순 있었지.
최대한 피하고 가벼운 것은 몸으로 받아내며 원수에게 칼을 휘둘렀소.
원수 놈은 세 합을 견디지 못하고 목에 칼이 박혔소.
베지 못한 것은 뒤에서 날아온 검격을 내가 피하지 못하고 허용했기 때문이오.
하지만 덕분에 목이 반쯤 떨어진 채로 그는 고통에 몸부림쳤소.
내겐 아주 기꺼운 일이었지.
이후에 낭인들과의 싸움은 진흙탕 싸움이었소.
상처 입는 것을 도외시하며 달려들었소.
어깨를 창(槍)에 찔린 상태로 창을 든 이의 목을 치고 등을 때리는 낭아곤(狼牙棒)의 힘을 빌려 앞에 있는 검수의 가슴을 찔렀소.
큰 상처 하나를 입을 때마다 하나씩 목숨을 거뒀소.
목숨을 중시하는 낭인들 입장에서는 아주 손해 보는 장사였지.
과연 견디지 못하고 여섯의 목숨을 거뒀을 때 셋이 도망쳤소.
말이 도망친 것이지 자리를 피했다가 내가 반격(反擊)할 기운을 잃은 것 같으면 다시 기습(奇襲)해 올 놈들이었소.
그것이 낭인이니까. 그리고 나도 그렇게 살아왔기에 그들을 나무랄 생각은 없었소.
상처를 대충 수습(收拾)했지만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었소.
내공은 이제 삼할 남짓 남았고 창에 찔린 왼팔은 올라가지 않았으며 다리 또한 상처를 입어 빠르게 움직이기가 불편했소.
배와 등에 난 구멍에서는 피가 멈추지 않았소.
주저앉고 싶었지만 일어났소.
전 같으면 원수를 떠올리고 복수를 생각하며 견뎌냈겠지만 그날은 아니었소.
피를 많이 흘리고 온몸에 성한 구석이 없음에도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그녀와의 약속을 지켜야 했기 때문이오.
그녀가 웃는 모습을 보고 싶었소.
그 통통한 볼이 동그랗게 모여서 귀엽게 웃는 모습을 다시 보고 싶었소.
멍한 얼굴로 그녀만 바라보는 내 모습이 담긴 그녀의 눈동자를 꼭 다시 한번 보고 싶었소.
그리고 그 순간 복수보다도 그녀가 내게 더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았소.
그녀가 복수를 포기하라고 하면 포기할 수 있을 것 같았소.
그래. 살아난다면 모든 것을 그녀에게 이야기해야겠다고. 이후에는 그녀의 판단을 따라야겠다고.
그렇게 결심했소. 그러자 머리가 맑아지더군.
드디어 복수가 아닌 내 인생의 목표가 희미하게나마 생겨난 거요.
그녀와 함께 있고 싶었소.
복수를 했든 아니든 더 많은 시간을 그녀와 함께 하고 싶어 졌소.
그러려면 일단 살아야겠지.
옷을 찢어 상처를 다시 한번 동여맸소. 여전히 피는 멈추지 않았지만 이제는 이동해야 했소.
적들의 기척이 다시 느껴졌거든. 칼을 손에 묶었소. 심호흡을 한번 크게 하고 다시 이동했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적들을 마주쳤소.
이번에는 조장(組長)쯤 되어 보이는 녀석을 마주쳤는데 왠지 굉장히 당황한 상태였소.
저 멀리 숲에 도망쳤던 낭인들의 기척이 느껴지는 것이 그들의 강요로 앞장서게 된 것이 아닌가 싶었소.
나는 칼을 들었소. 살기 위해서는 앞을 막는 자들을 모두 베야 했으니까.
고수들이 줄줄이 죽어나갔기에 그들도 겁에 질려 있었소.
하지만 물러나면서도 포위망은 풀지 않았지.
결국 내가 먼저 가는 수밖에. 달려들어 칼을 휘두르는데 조장이 땅을 뒹굴어 피하며 공격을 지시했소.
몇 놈을 베어내는데 낭인 놈들이 다가왔소.
그들을 견제하며 주변을 돌아보니 과연 강력한 기파가 다가오고 있더구려.
평상시의 온전한 몸으로도 감당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 정도로 강력한 기파였소.
얼마 지나지 않아 얼굴이 허여멀건한 놈이 날아왔소. 녀석은 단 한마디 말도 없이 바로 공격에 나섰소.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강력한 장력(掌力)을 가지고 있더구려.
스치기만 해도 뼈가 으스러질 것 같았소. 그리고 녀석의 초식 하나가 유난히 눈에 들어왔소.
공격하며 손을 비틀어 공격하는 반대방향부터 뼈를 으스러트리는 듯한 동작을 보이는 초식이었소.
침착하게 녀석의 공격을 막아내며 내가중수법을 발휘했으나 크게 흔들리지 않더군.
하지만 틈이 있다면 얼마든지 녀석의 기를 흔들 수 있을 것 같았소.
틈을 만들기 위해 계속 물러서다가 변칙적으로 방향과 속도가 변하는 도식을 펼쳤소.
당황할만한데도 침착하게 잘 막아내더군.
반격을 흘려내며 기회를 보고 있는데 녀석이 잠시 공격을 멈추더니 뒤로 물러섰소. 그리고 묻더군.
설가장과는 무슨 관계냐고. 그제야 나는 알았소. 녀석의 공격이 눈에 들어왔던 이유를.
부모님의 뼈에 남았던 흔적이었소. 어린 나는 고문의 흔적이라 생각했던 상흔. 뒤부터 으스러진 뼈.
아무 대답 없이 모든 내공을 끌어올려 도에 욱여넣었소. 호신(護身)에 사용하던 작은 내공까지 모두.
단 한 번이라도 도에 부딪히면 누구라도 기가 흔들릴 수밖에 없도록.
그리고 한 걸음을 내디뎠소.
녀석은 코웃음을 치며 내 도를 손바닥으로 쳐내려 했지. 그리고 내공이 흔들려 경직됐소.
녀석의 경악한 얼굴을 향해 도를 내리쳤소. 그의 정체 따위는 알고 싶지 않았소.
그 흔적만으로도 원수라는 증명이었으니.
낭인들이 경악하며 득달같이 달려들어 내 도를 막아내더군.
그 와중에 한놈은 내 도에 얼굴이 베이기도 했소.
다시 내공을 끓어올렸소. 이미 무리한 상태였기에 울컥 피가 역류하더군.
그대로 피를 뱉어 한 놈의 얼굴에 뿌리고 다시 강맹한 일격으로 낭인 둘을 베었소.
그리고 얼굴 흰 녀석의 배에 칼침을 넣었지. 하지만 얕았소.
얼굴을 베인 놈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서도 내 도로 달려들었기 때문이오.
낭인 놈들이 이렇게까지 보호하다니 뭔가 있는 놈이 분명했지.
다시 역류하는 피를 꿀꺽 삼키며 다시 내공을 일으켜 도를 들었소.
얼굴 허연 놈은 질색하며 두 팔을 들어 올렸지.
그리고 사방에서 호각소리가 들려왔소.
가까운 곳에서도, 먼 곳에서도. 뒤쪽에 물러나 기회를 노리던 조장 녀석이 기습을 날렸고 강력한 마지막 일격을 낭비할 수 없어 뒤로 물러섰지.
조장은 얼굴 허연 놈과 얼굴이 베인 낭인을 몸으로 막으며 후퇴를 명했소.
나를 한참이나 노려보던 녀석들은 이내 자리를 피하더구려.
도저히 따라붙을 기력이 없던 나는 기척이 사라진 이후에야 땅에 칼을 박고 기대어 섰소. 그리고 피를 토했지.
그들이 모두 물러날 때까지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기에 도저히 주저앉을 수가 없었던 거요.
한참이나 그렇게 서서 그들이 사라지고 아무도 없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땅에 주저앉았소이다.
괜히 웃음이 나더군. 복수심에 불타던 것이 바로 전인데 살았다 싶은 안도감(安堵感)이 들어 그런 듯 싶었소.
그리고 그렇게 실없는 웃음을 흘리고 있는데 익숙한 기척이 다가왔소.
숲을 날 듯이 달려와 내 앞에서 우는 사람.
그녀였지. 눈물을 쏟아내며 그녀가 다가왔다오.
그녀와 헤어진 지 하루 반나절이 지나 석양(夕陽)이 짙게 드리운 하늘을 후광(後光)처럼 두르고 그녀가 나타난 거요.
그 은은하게 붉어진 노을이 그녀를 감싸안는 것을 보면서 붉은빛마저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소.
우는 모습임에도 참 아름답구나 싶었소.
그래도 다시 울리고 싶지는 않더구려.
붉은 석양이 내 가슴을 찌르는 듯했다오.
내 상처를 보고 차마 손을 못 대는 그녀에게 팔을 뻗었지.
그녀는 내 팔에 딸려와 가슴에 안겼다네.
이제야, 안도감이 들더구려. 피곤, 아픔, 불안, 다 필요 없었소.
이제 내게 그녀 하나만 있으면 된다고 느꼈지. 내 세상을 얻었다고 느꼈다오.
뒤늦게 달려오는 노인과 주작단의 기척이 느껴졌네.
평소 같으면 그녀를 놓아줬겠지만 그럴 수 없었지.
이제 그녀라는 세상은 나의 것이니 절대 놓을 수 없다 생각했소.
그녀를 더 힘주어 안았소이다.
그녀도 나를 다시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단단히 끌어안았지.
그 몸짓이 나를 안도하게 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