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대가 도저히 놓을 수 없는 그 단 한 가지
복수의 수레바퀴는 아주 천천히 구르기 시작했소.
그 시작은 내가 복수심에 눈이 멀어 담을 넘었던 사파였소.
문주(門主)와 핵심 간부(幹部)를 잃은 그 사파는 혼란에 빠져 새로운 문주를 뽑는답시고 지들끼리 칼질을 시작했소이다.
한 지역에서 가장 강한 세를 과시하던 문파가 자중지란(自中之亂)에 빠지자 그 밑에 눌려 있던 자들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고개를 들었소.
체면 따위 차리지 않는 사파는 그냥 앞에 이득이 보이니 먹는다는 식이었고 정파는 질서를 회복하겠다는 명분으로 각기 자신들의 영향력을 넓히려 했다더군.
제 잇속을 차리는 이들이 넘쳐나고 그들을 제어할 이가 없다면 당연히 난리(亂離)가 나는 법이라, 작은 눈송이 같은 다툼들이 쌓여 점점 눈덩이가 구르듯 커지기 시작했소.
처음에는 그래도 주변의 눈치를 보느라 사소한 분쟁(紛爭)에서 멈추다가 아무도 제지(制止)하는 이들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점점 그 분쟁의 수위(水位)가 높아졌소.
사파와 정파는 끝이 나지 않는 말다툼과 주먹다짐 속에서 칼을 뽑아 상대를 영원히 잠재워버리는 방식으로 각자의 평화를 찾아 나서게 된 것이오.
그렇지. 죽음은 영원한 침묵(沈默)이니까.
영원히 침묵하기 싫은 이들은 모두 칼을 잡아야만 했소.
작았던 분쟁은 이제 쇳소리와 원한(怨恨)이 가득한 아수라장(阿修羅場)이 되었소.
각기 정파와 사파의 뒷배 역할을 하는 무림맹과 사도련도 강 건너 불구경하듯 뒷짐만 지고 구경만 할 수는 없게 되었지.
그리고 엄청난 덩치를 가진 그들이 움직인 이상 쉽게 손을 털고 물러나지는 못하는 상황이 된 거요.
무림맹과 사도련이 아수라장에 끌려들어 가든 말든 나는 그녀의 감정을 확인한 것에 기뻤소.
그녀도 내 감정을 확인했기에 우리는 서로에게 집중하느라 세상을 잊었소.
아니, 그녀라는 처음 본 세상이 너무 좋아서 도저히 눈을 돌릴 수가 없었지.
정의로운 무인이 되는 것이 꿈이라던 그녀는 함께 장터를 거닐다가 군것질거리를 양손 가득 들고서는 슬쩍 내게 귓속말을 해줬소.
자신은 맛있는 음식을 너무도 사랑한다고.
신기한 음식, 새로운 맛, 그리고 마지막으로 먹는 달콤한 간식을 너무 좋아해서 참을 수가 없다고.
사실 맛있는 음식을 너무 많이 먹어서 운동삼아 무공을 배우기 시작했노라고.
아주 작게 속삭이며 고백하고는 얼굴이 빨개져서 어깨를 으쓱이며 멋쩍게 웃어 보이는 그녀가 너무도 귀여웠지.
나도 그녀를 따라 얼른 입 안에 군것질거리를 털어 넣었소.
양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면서 길거리 음식을 먹는 나를 보며 그녀는 눈꼬리를 휘며 살짝 어깨에 기대어 오더군.
그 보드라운 살결과 달달하면서도 살짝 상쾌한 향을 잊지 못하오.
그 향에 취해 바라볼 때면 입을 오물거리며 음식을 열심히 씹으면서도 나를 향해 웃어주던 그 눈웃음까지도.
서로를 좋아하게 되면 서로의 세상을 닮아가고 싶어 하는 법이오.
내 세상을 그녀라는 빛으로 덧칠하고 싶어지는 게지.
그녀라는 빛을 알기 전까지는 내 세상이 이렇게까지 우중충한 빛이었다는 걸 몰랐다오.
내 세상이 그녀라는 빛으로 물들기 시작하고 나서야 내 세상이 얼마나 우중충하고 삭막했는지 알게 되었지.
그리고 그것은 내게 어떤 예감(豫感)을 주었소.
이제 나는 다시는 예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겠구나.
오롯하게 복수에 미쳐서 살아갈 수는 없겠구나.
사실 나는 한 번도 복수 이후의 일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소.
복수에 미쳐서 그 너머까지는 생각해 볼 여력이 없었던 탓이지.
어제까지의 나는 그러했소.
하지만 지금의 나는 온통 그녀와 함께 하는 미래에 대한 상상(想像)으로 가득 찼지.
그러함에도 죄책감이 들지 않았소.
단 한순간이라도 편히 앉아 있으면 가슴 한구석에서 심장을 찔러대던 죄책감마저 그녀를 만나곤 잠잠해졌지.
부모님도 내가 편안히 지내길 원할 거라던 사냥꾼의 말이 몇 번이고 생각났소.
그래. 이 모든 게 나 스스로 하는 생각이란 걸 잘 알고 있었소.
그녀와 함께 있기 위해서 변명거리를 만들고 있다는 걸.
복수를 위해선 그녀를 이용하고 때곤 속여야 하며 어쩌면 납치(拉致)와 겁박(劫迫)을 해야 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러기 싫었소. 그럴 수가 없었지.
열 살 무렵 무공을 제대로 배우기 시작할 때부터 품어왔던 복수는 그 자체로 내 삶이었지만 그녀라는 빛을 만나고 그것만이 내 삶이 아님을 알았던 거요.
복수를 위해 쌓았던 시간들은 준비 과정이 아니라 모두 내 삶이었소.
땀 흘리고 인내하며 버티고 악다구니를 쓰며 독하게 칼을 휘두르던 시간들이 다 내 안에 있었소.
칼 휘두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것도 내가 쌓아온 나의 삶이었소.
복수가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에 나는 그녀를 이용하는 선택을 할 수 없었소.
그녀와의 미래를 꿈꾸기에 복수를 달성하고 나서도 살아갈 방법을 찾아야겠다고 느꼈소.
그것은 큰 변화였고 큰 깨달음이었소.
그렇게 두드리던 절정 너머로의 길이 조금 보인다고 느껴졌을 정도로.
나는 크게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고 그녀는 여전히 양 볼에 가득한 음식을 우물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렸소.
그 모습은 또 다람쥐 같더군. 나도 몰래 그녀의 손을 꽉 쥐었소.
그녀는 다시 얼굴이 빨개져서는 급하게 입을 오물거리며 슬쩍 고개를 숙였지.
살짝 보이는 흰 목덜미가 얼굴에 이어서 빨갛게 달아오르는 모습마저도 내 마음을 설레게 했었다오.
함께 맛있는 음식을 찾아다니기만 한 것은 아니오.
음식을 좋아하는 만큼 그녀는 무공에도 진심이었소.
고백했듯이 처음엔 그저 살을 빼기 위해 운동삼아 시작했으나 이제는 무공을 연마하고 느끼는 상쾌함과 변화되는 몸을 바라보는 것이 즐겁다고 했소.
나는 기꺼이 그녀의 무공을 봐주었지.
그녀는 무공 자체에 재능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소. 다만 개념(槪念)에 대해 이해(理解)하는 속도가 남다르더군.
초식(招式)이 가지는 의미와 의도를 알려주면 무엇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것인지를 금방 알아차렸소.
무조건 외우게 하여 몸에 익히는 것보다는 왜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인지, 무엇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인지를 알려주는 방식으로 지도(指導)했소.
물론 이해하는 것과 몸으로 하는 것은 다른 일이라서 몇 번이나 지적을 당하곤 했소.
그럴 때면 그녀는 코를 찡긋거리며 볼과 입술을 씰룩거렸지.
자기 딴에는 티를 내지 않겠다고 입을 앙다물었지만 기분이 표정에 다 드러나는 그녀의 모습이 어린아이 같아서 괜히 더 놀리고 싶었다오.
그리고 기분 하나 감추지 못하고 표출(表出)하는 것이 어린아이 같아서 곁에서 보호해주고 싶었지.
그녀의 가전무공(家傳武功)을 내게 모두 알려줄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그녀가 알려준 몇몇 초식에 가르침을 주었는데 뭔가를 느낀 것인지 그녀는 가문의 기본공을 내게 알려주었소.
기본공은 그 가문의 바탕이 되기에 그들이 처음 무가(武家)를 세우며 가졌던 무공의 방향성을 알 수 있지.
그것을 바탕으로 그녀의 무공 또한 방향성을 알려줄 수 있었소.
나와 만나기 전에는 주작단에서 중위(中位)에 겨우 턱걸이하던 그녀의 무공은 잠깐의 가르침을 받은 것만으로 상위(上位)로 올라섰소.
그것만으로 평소에 그녀가 얼마나 열심히 연마(練磨) 해왔는지 알 수 있었소.
무공이 완전히 몸에 배도록 연마해 왔기에 이해를 시켜주고 방향성을 제시한 것만으로도 효과를 보았던 것이오.
단기간에 강해지는 그녀를 보며 자극받은 주작단 역시 더 열심히 수련하는 모습을 보였소.
그 모습이 두 노인을 흡족하게 했는지 단체 훈련 외에 개인 훈련시간에 그녀가 나와 돌아다니는 것을 허락해 주었소.
그 소식을 내게 전하러 온 그녀는 통통 뛰어와 와락 안기며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더 생겼다고 말했지.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꼭 안아주었소.
그저 쿵쾅대는 이 심장소리가 그녀에게 들려 대답이 되었기를 바라며.
함께 돌아다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그녀도 조금 더 나를 편하게 느끼는 듯했소.
전에는 그저 입안 가득 음식을 먹는 모습만 보였는데 언제부터인가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흐물흐물 몸에 힘이 빠지는 모습을 보여주었소.
뭐가 그리 좋은지 음식을 씹는 입은 오물오물 멈추지 않으면서도 어깨나 몸의 힘이 빠져 스르륵 가라앉는 듯한 모습이었소.
나는 상상도 해보지 못한 모습이라 처음에는 한참이나 웃었다오.
웃는 나를 살짝 흘기면서도 여전히 흐물흐물 풀어진 모습으로 맛있는 음식에 집중하는 그녀를 보며 나는 행복함을 느꼈소.
편안한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 내게 믿음을 보여주는 것만 같아서 마음이 든든해졌지.
그녀는 함께 걷다가 신기한 것이 생기면 눈을 반짝이며 자신이 느낀 것을 내게 전달해주려 했소.
그녀가 느끼는 것을 모두 공감(共感)할 수는 없었지만 그녀의 모든 이야기를 들어주려 노력했소.
감정을 공유(共有)한다는 것은 꽤나 즐거운 느낌이었소.
그녀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항상 진중하게 행동하고 말을 가려서 하곤 했소.
자신이 어지간한 남자보다 큰 키와 체격을 가졌기 때문에 이질적(異質的)으로 보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오.
그런 그녀가 나와 있을 때는 소녀(少女)와 같은 감성과 모습을 보여주고 오직 내게만 생각을 공유해 주는 것이 얼마나 기뻤는지 모르오.
특별(特別)한 사람이 된 것만 같아 기뻤소.
그리고 언제까지나 그녀의 특별한 사람이고 싶어서 그녀의 모든 것에 관심을 기울였지.
아주 작은 것이라도 그녀에 대해 새로운 것을 알게 되면 무공을 깨우친 것처럼 기뻤소.
우리가 만난 지 백일, 그녀의 세계와 나의 세계는 조금씩 서로에게 물들어 갔소.
그것은 하루만큼씩 서서히 이루어진 변화였기에 양보하고 타협할 것도 없이 우리는 서로에게 쉽게 익숙해질 수 있었소.
서로에게 익숙해지는 만큼 그녀의 무공도 완숙으로 접어들어 주작단 내에서는 감당할 수 있는 자가 없어졌고 두 노인과도 어느 정도 호각을 이룰 수 있을 만큼 강해졌소.
그녀가 이토록 빨리 절정(絕頂)에 이른 것은, 사실 내가 익힌 다양한 무공을 보여줘 가며 그녀에게 맞는 무공의 이치(理致)를 찾아냈기 때문이었소.
물론 그녀에게 개념을 이해하는 재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겠지.
절정에 이르던 날 울먹이며 내게 안기던 그녀의 얼굴을 잊을 수 없소.
양 볼을 잡아당기고 누르며 그녀를 놀리자 이내 그녀는 뿌엥 하고 울면서 웃었소.
코를 훌쩍이는 그녀가 어찌나 귀엽던지.
한참 울고서야 부끄러웠는지 얼굴을 가리며 보지 말라 말하던 그녀의 모습이 아직 내 뇌리에 선명하오.
그 모습은 그녀를 떠올릴 때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랑스러운 모습 중 하나라오.
나와 그녀가 행복했던 백일의 시간 동안 복수의 불길은 전혀 잦아들지 않았소.
지역분쟁(地域紛爭)에 개입하게 된 사도련과 무림맹의 입장은 조금 다를 수밖에 없었다오.
내게 우두머리를 잃긴 했지만 사파가 지배하다시피 하던 지역이었기에 이미 이득(利得)이 큰 곳은 대부분 사파가 차지하고 있었지.
사도련은 작금(昨今)의 상황을 지역의 이권(利權)을 두고 충성경쟁을 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로 봤소.
그들은 충성을 맹세하며 가장 심하게 배를 뒤집어 까 보이는 사파에 고수들을 파견했지.
아, 정확히 말하면 해당 문파에서 사도련의 고수들을 장로로 초빙하였소.
사도련에서도 끗발 좀 날린다는 고수들이 지역의 작은 문파로 가서 장로를 한다니.
동네 꼬마가 들어도 코웃음 칠만할 일이었으나 명분을 중시하는 정파에서는 발만 동동 구르며 손가락질만 할 뿐 대응하지 못했소.
맞대응하기 위해서는 무림맹의 고수가 자신의 직을 버리고 작은 문파의 장로로 들어가야 하는데 그게 체면을 중시하는 정파에서는 통용(通用)될 수가 없었던 일이었기 때문이오.
무림맹도 아예 손을 놓을 수는 없었기에 싸움을 중재하고 정파를 보호하겠다는 명목으로 고수를 파견하였소.
하지만 사도련처럼 한 문파에 뭉쳐서 파견할 순 없었소.
보호를 명목으로 했기에 가장 큰 정파 세 곳에 나누어 파견해야 했던 거지.
그것은 명목상의 파견이고 실상은 사도련을 견제하기 위함이었지만 기동성(機動性)을 전혀 살리지 못하는 선택이었소.
전직(前職) 사도련 출신의 장로들은 뭉쳐서 반항하는 사파 몇 곳을 전격적(電擊的)으로 깨부쉈소.
그리고 반발하는 정파 두 곳을 멸문시키는 데에 나흘도 소비하지 않았지.
그동안 무림맹에서 파견된 고수들은 유감(遺憾)을 표시하며 서한(書翰)이나 날려댈 수밖에 없었소.
맞부딪혀 봐야 각개격파를 당하거나 세 군데에서 뭉쳐 달려오면 이미 함께 기동(機動)하는 사파의 장로들은 자리를 피하면 그뿐이었거든.
그렇다고 사도련도 지역의 모든 정파를 다 때려 부수고 다닐 순 없었소.
그들이 작은 규모의 정파를 때렸기에 항의(抗議)로 끝난 거지 조금만 더 큰 곳을 건드리면 무림맹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란 걸 잘 알았지.
이건 기선제압(機先制壓)이며 기싸움의 일종이었소.
여긴 우리 지역이니 너희들은 가만히 있다가 조용히 물러서라는 의사표시였지.
사도련은 기싸움의 일종으로 내가 죽인 문주를 두고 무림맹의 고수에게 당한 것 같다고 발표했소.
무림맹은 반발했지만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소이다.
사도련이 그런 발표를 함으로써 그들의 정당한 복수를 무림맹이 막아서는 그림이 됐다는 것이 중요했던 거요.
그리고 정당한 복수를 천명(闡明)한 사도련에 비해 명분이 미약했던 무림맹은 악수(惡手)를 두고 말았소.
사건 당시 주작단이 해당 도시에 있었음을 알렸소.
그 주작단에는 무림맹주의 딸도 있는데 일이 벌어지면 그들이 위태로워질 걸 뻔히 알면서 자신들이 그런 사건을 일으킬 리 없다고 발표했소.
그리고 공동으로 범인을 찾을 것을 권했지. 사도련은 그들의 권유를 받아들였소.
한시름 놓은 무림맹에서는 중요 증인이라고 발표한 주작단의 보호를 위해 고수를 더 파견했소이다.
사도련은 공세(攻勢)를 멈췄고 일을 그렇게 일단락되는 듯 보였소.
사도련은 무림맹 고수들의 움직임을 면밀히 살펴 주작단이 있는 곳을 특정(特定)했소. 그리고 들이쳤지.
주작단 자체가 후기지수들의 모임인 데다가 그들은 명문 정파의 자식들이었소.
심지어는 무림맹주의 딸도 있다고 했지.
그들을 잡을 수만 있다면 분쟁지역을 아예 넘겨받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소.
천천히 구르는 복수의 수레바퀴 위에서 타오른 불꽃은 어느새 한 지역을 잡아먹고도 모자라 주작단을 향해 불타올랐소.
그 밤, 그녀를 숙소로 데려다주던 나는 복수의 불길을 보고 한숨을 내쉬며 칼을 꺼내 들었소.
일단 나는 그녀를 지켜야 했소. 나의 새로운 세상을.